망우리공원(인문학)/신문 방송 인용

김병기 화백 한겨레 연재 " '반동' 낙인 찍힌 나를 구해준 은인은 김일성의 외척"

정종배 2017. 3. 13. 19:10

“‘반동’ 낙인 찍힌 나를 구해준 은인은 김일성의 외척”

등록 :2017-02-17 00:42수정 :2017-02-23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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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미술동맹 서기장의 ‘반동’과 평양 탈출

5월 ‘캄파’를 맞아 평양시내 중성사거리 경찰서 앞 광장에 미술 작품을 설치하라.” 1946년 4월 중순께 김일성 정권의 두뇌라 할 수 있는 김창만이 명령했다. 김병기를 비롯해 미술동맹 작가들은 긴급 동원되어 행사용 대작을 제작해야 했다. 노동절 기념 행사, 그러니까 ‘5월 캄파’라고 불렀던 군중 행사를 위한 분위기 조성용이었다. 이미지 동원, 새로운 사회체제는 이미지의 위력을 이해하고 활용에 들어갔다. 급조 미술제작단은 500호 대작 14점을 그렸다. 그리고 특별히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입체 작품도 만들었다. 인물은 마치 김일성 초상과 비슷했다. 이 조형물은 화가이면서 조각 실력도 수준급이었던 김원의 작품이었다. 그는 훗날 월남해 홍익대 교수 등을 지냈다. 평양의 점토는 점착력이 좋아 소조 작품 만들기에 훌륭했다. 하지만 아무리 재료가 좋아도 절대 시간 부족은 불철주야 작업에 매진하게 했다. 행사 일주일을 앞두고 현장에서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드디어 5월 캄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광장 앞을 지나던 군중은 조형물을 보고 함성을 질렀다. 대성공이었다. 이에 김창만은 평안도상품진열소로 작가들을 초청해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 자리에서 김창만은 ‘김병기 동무’에게 박수갈채를 선사했다.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한 데 이어 ‘노동법령’을 실시하면서 북한은 빠르게 공산당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해 5월1일 메이데이 ‘캄파’를 앞두고 김병기를 비롯한 미술동맹 작가들은 선전선동부로부터 기념 대형 조형물 제작 ‘지시’를 받아 성공리에 작업을 완성하기도 했다. 사진은 46년 봄 평양에서 열린 ‘민주주의 노동법령 실시’ 환영 행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한 데 이어 ‘노동법령’을 실시하면서 북한은 빠르게 공산당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해 5월1일 메이데이 ‘캄파’를 앞두고 김병기를 비롯한 미술동맹 작가들은 선전선동부로부터 기념 대형 조형물 제작 ‘지시’를 받아 성공리에 작업을 완성하기도 했다. 사진은 46년 봄 평양에서 열린 ‘민주주의 노동법령 실시’ 환영 행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독립운동가’ 김창만은 연안파이면서 김일성과 손잡은 첫번째 인물이다. ‘무인 김일성’의 문화 부문을 보완해주는 역할이었다. 나치 시절 히틀러 정권의 선전장관 괴벨스 같은 존재였다. 김창만은 예술인과 면담할 때 피스톨을 꺼내놓고 앉아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줬다. 월북한 소설가 이태준을 비판한 것도 그였다. 소녀 같은 미문의 소설을 쓴다고, 그러니까 ‘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태준은 서울에서 강경한 문투로 <소련기행>을 출간하기도 했지만(1947), 혁명화 사업의 대상으로 찍혀 해주 황해도일보사에서 인쇄공 노릇을 해야 했다(1957). 김창만식 논리에 의하면, 당성이 없는 예술가는 평양에 들어올 자격조차 없다는 것. 물론 한설야 같은 소설가의 이태준 비판은 시대 상황의 단면이기도 했다. 이태준과 그의 가족의 비참한 말로는 월북작가의 상징적 사례에 해당한다. 아무튼 김창만은 식민지 시절 조선의용대에 참여했고, 화북 조선독립동맹 선전책임자로 활동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조선독립동맹 중앙위원으로 귀국했다. 이어 ‘민족지도자 김일성’ 선전 사업에 앞장섰다. 그는 북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1946)을 지냈고, 6·25 전쟁 이후 백남운의 후임으로 교육상 자리를, 그리고 내각 부수상까지 올라갔다. 1958년 종파론 사건 때 연안파 숙청 바람을 잘 피했지만, 결국 66년 연안파의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선전선동부장 김창만 미술동맹 동원
1946년 5.1절 ‘캄파’ 기념 조형물 제작
“김병기 동무 수고했다” 박수갈채도

그러나 토지개혁 회의 이후 신분 불안
먼저 월남하려던 모친 진남포서 발각
‘서기장’에서 ‘반동분자’로 가택연금
“옆집 강양욱 목사 도움으로 특별용서”

46년 여름 해주 대저택 장만해 ‘정착 위장’
문석오·이쾌대·조규봉·김정수·김원 등등
해방탑 제작에 동행…사탕 장사 노릇도

47년 봄 “3.8선 루트 잘 아는 ‘송 영감 따라 월남”
체포됐던 친형 풀려나 월남했지만…
해주 집 예술인 ‘월남 거점’ 활용

1946년 ‘민족지도자 김일성 선전사업’을 주도한 연안파 출신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은 특히 월북한 작가 이태준의 ‘당성’을 비판했다. 사진은 월북한 직후 평양 대동강변 연광정 앞에 선 이태준의 모습.
1946년 ‘민족지도자 김일성 선전사업’을 주도한 연안파 출신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은 특히 월북한 작가 이태준의 ‘당성’을 비판했다. 사진은 월북한 직후 평양 대동강변 연광정 앞에 선 이태준의 모습.
소련 점령하의 김일성 체제는 점점 문화예술계를 옥죄기 시작했다. 토지개혁 관련 회의 이후 김병기의 신분도 불안한 상황으로 떨어졌다. 수옥리의 서양식 자택은 호사스런 외양과 달리 안에서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들의 노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보기 드문 더치 콜로니얼 양식의 2층 건물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불안한 시국이어서 ‘호신용’으로라도 소련군을 입주시킬 필요가 생겼다. 김병기 화가는 증언한다.

“대문을 두드리던 소련군 가운데 게리 쿠퍼처럼 잘생긴 장교 가족을 2층에 들였다. 그는 인상처럼 착한 군인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전직 교장선생이라 했다. 집에서 음악회를 열 때면 그들 가족을 초청하기도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몸짓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집 형편을 이해하게 된 장교가 어느 날 넌지시 말했다. ‘평양에서는 예술 활동 하기 어려우니 서울로 가라.’ 처음에는 나를 떠보는 말인 줄 알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말속에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시국은 점점 ‘반예술적’으로 돌아갔다. 특히 토지개혁 관련 회의 이후 나는 ‘반동’으로 의심받게 되어 주위의 눈초리가 따가워졌다.

1946년 봄 ‘반동’으로 찍힌 김병기 가족을 구해준 ‘이웃집 목사’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의 6촌 동생으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창립한 인물이다. 사진은 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1946년 봄 ‘반동’으로 찍힌 김병기 가족을 구해준 ‘이웃집 목사’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의 6촌 동생으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창립한 인물이다. 사진은 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김병기는 번민 끝에 월남하기로 결심했다. 미술동맹 서기장을 지낸 예술계 주요 인물의 월남, 이는 커다란 사건이기에 충분했다. 비밀 작전은 그래서 절실했다. 그해 봄 모친이 서너 집과 어울려 먼저 중요한 이삿짐을 배에 실어 평양 선천에서 진남포로 옮겨놓았다. 하지만 항구에서 그만 정보원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삿짐은 몰수당했고, 어머니는 감옥에 갇혔다. 서기장 신분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확실하게 반동분자로 바뀌었다. 낙인찍히니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우호적 손길을 보내면 같이 반동분자로 몰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가장 친한 문학수조차 외면했다. 그때 손을 잡고 같이 울어준 이는 소련 장교 부부였다. 하지만 소련 장교는 우리를 도와줄 수 없었다. 마침 그는 본국으로 귀환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부가 우리집을 떠나는 날 아침, 우리는 서로 붙들고 한없이 울었다. 이 장면을 동네 사람들이 보고, ‘소련군이 가는데 울고 있네’라면서 비아냥거렸다.

1946년 봄 먼저 월남하려던 모친이 붙잡히면서 ‘반동분자’로 찍힌 미술동맹 서기장 김병기는 가까스로 ‘용서’를 받은 뒤 형과 함께 해주로 이주해 ‘위장 정착’했다. 사진은 모산인 수양산 아래에 자리한 해주시의 일제 때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1946년 봄 먼저 월남하려던 모친이 붙잡히면서 ‘반동분자’로 찍힌 미술동맹 서기장 김병기는 가까스로 ‘용서’를 받은 뒤 형과 함께 해주로 이주해 ‘위장 정착’했다. 사진은 모산인 수양산 아래에 자리한 해주시의 일제 때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마침 옆집에 강양욱 목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의 6촌 동생으로, 모친 강반석에겐 작은아버지인 셈이었다. 평양신학교 출신인 강 목사는 해방 직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중앙위원이었다가 뒤에 중앙위원회 위원장도 지냈다. 46년 11월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한 그는 북조선노동당의 부주석 자리까지 오른 거물 정치인이기도 했다. 다행히 강 목사와 우리 장모는 가까운 사이였다. 결국 강 목사의 도움으로 나는 특별용서를 받았다. 조건은 이랬다. ‘때가 되면 다시 쓸 테니까 꼼짝 말고 있으라.’ 그 덕분에 모친은 감옥에서 풀려나오고 이삿짐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금 상태의 서기장 신세는 몰락 그 자체였다. 더 이상 평양에서는 숨 쉬고 살 수 없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해주로 이사했다.”

해주에는 이름 난 주물공장이 있었다. 조각가 문석오와 연결된 공장으로 거기서 많은 조형물을 제작했다. 전통적으로 입체 작품은 불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근대기에 이르러 재료와 기법 등 다양성을 얻기 시작했다. 근대기 최초의 조소작가는 1925년 도쿄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한 김복진이었다. 회화 분야와 비교하여 조소계열은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니까 일제하 서양화과 조선인 졸업생 46명에 비해 조각과는 9명에 불과했다. 김복진 이외 문석오(1932년 졸업), 김경승, 윤승욱, 김종영, 윤효중, 조규봉, 박승구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월북작가로는 문석오, 조규봉, 박승구를 들 수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한 연례 공모전이었던 ‘조선미전’의 조각부에 입선한 작가는 약 40명이었고, 이들의 출품작은 약 130점 정도를 헤아릴 수 있다. 물론 석고 작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김복진의 작품은 누드 등 일반 작품, 동상과 같은 기념조형물, 그리고 불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 작품 가운데 주물공장을 경유해야 하는 청동 재료의 동상도 있다. 실물대 크기의 주물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 이는 식민지 치하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상황 아래 해주에 전문 작가를 위한 주물공장이 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문석오의 존재는 빛났다.

1946년 7월 김병기가 해주로 이주했을 때 문석오·조규봉·김정수·김원·이쾌대 등 작가들이 소련군 기념 해방탑 제작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진은 그때 세워진 평양 모란봉공원의 해방탑. <한겨레> 자료사진
1946년 7월 김병기가 해주로 이주했을 때 문석오·조규봉·김정수·김원·이쾌대 등 작가들이 소련군 기념 해방탑 제작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진은 그때 세워진 평양 모란봉공원의 해방탑. <한겨레> 자료사진
해주에서 해방기념탑 제작을 위해 문석오 이외 조규봉, 김정수, 김원 등이 모였다. 이들이 참여한 평양 모란봉의 해방탑은 사각형 기둥 위에 붉은색 오각별을 장식한 모습이었다. 기단부의 청동 부조는 소련군의 전투 장면과 두 나라의 상봉 장면을 새겨 넣었다. 소련군을 기리기 위한 탑, 거기에 이런 말을 써넣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강점으로부터 인민을 해방하고 자유와 독립의 길을 열어준 위대한 쏘련 군대에 영광이 있으라!’ 이런 유형의 해방탑은 평양 말고도 북한 여러 도시에 건립했다.

해주의 유지라 할 수 있는 문석오는 김병기의 해주 생활을 도와주었다. 검문 통과 등을 도와주어 외부 출입을 가능하게 했다. 해주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친구는 화가 이쾌대다. 이쾌대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강원도 해방탑건설준비위원회 초청으로 조규봉, 김정수 등과 함께 북으로 왔다. 1946년 7월의 일이었다. 마침 김병기의 해주살이와 겹치는 시기였다. 해주에서 이쾌대의 할약은 빛났다. 그는 김병기에게 편의를 제공했는데, 이사할 때나 평양 출입 할 때 방패 구실을 했다. 그는 이른바 ‘반동분자’를 보살펴주었다. 문석오 공장에서 주물 뜬 작품을 평양으로 옮길 때 김병기도 일행을 따라갔다. 작품을 실은 트럭에 작가들과 동행하니 신분상 안심이 되었다.

해주와 평양 길에서 이쾌대와의 동행은 진한 우정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조규봉은 조각계 최고 실력자였다. 장발이면서 빼빼 마른 몸이었지만 조각은 힘이 넘쳤다. 그는 만수대의 김일성 동상을 제작해 명성을 높였다. 그무렵 해주에는 박성환도 살고 있었다. 그는 미술전에서 1등을 차지해 작품 판매대금으로 과수원을 장만했다. 과수원 안에 화실도 지어 그림도 그렸다. 김병기는 이 과수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박성환은 뒤에 월남화가로 분류된다. 다시 화가는 증언한다.

“해주는 서울로 가는 길목이다. 해주 생활을 위해, 그러니까 정보원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대저택 구입부터 서둘렀다. 해주에서 제일 크다는 솟을대문의 한옥을 샀다. 형님과 반씩 부담해 32만원의 집값을 지불했다. 평범한 일반인으로서의 모습이 해주 생활이었다. 그래서 드롭스 같은 미제 물건을 받아 평양에 가서 파는 장사꾼 노릇도 흉내 냈다. 그러는 사이 감시의 눈초리는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해주에는 ‘송 영감’이라는 충직한 어른이 있었다. 그는 3·8선을 넘는 비밀 루트를 잘 알고 있었다. 송 영감의 안내로 드디어 비밀리에 단신 남행을 단행했다. 1947년 봄이었다. 해주 집에서 계속 남아 있던 형님은 비밀리에 정보부대에 끌려가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정보기관은 감방에 스파이 소년을 넣어 형님의 의중을 염탐했다. 다행히 소년은 당국에 가서 형님에 대해 좋게 말해주었고, 그 결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형님은 위암에 걸려, 1948년 월남했지만 오래 살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해주의 솟을대문 집을 잊을 수 없다. 그 집은 월남 거점으로 활용되어 많은 이들을 남으로 오게 했다. 이 집을 경유해 월남한 인사 가운데 오영진(극작가)도 있다.”

구술·집필 윤범모/미술평론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83037.html#csidx79e2694ca9d6ad8b4d51e0dae71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