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신문 방송 인용

김병기화백 한겨레 연재 "난 지주집안 출신이지만 '토지는 농민에게' 지지했다

정종배 2017. 3. 13. 19:13

“난 지주집안 출신이지만 ‘토지는 농민에게’ 지지했다”

등록 :2017-02-08 22:12수정 :2017-02-23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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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⑤ 해방공간 미술단체와 좌우 분열

구술·집필 윤범모/미술평론가

해방공간 남과 북은 각각 농지개혁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김병기는 평양 대주지 집안 출신이었지만 신문명을 깨친 유학파 예술인이자 열혈 청년으로서 ‘토지는 농민에게’란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사진은 1946년 3월 소련군정과 북조선공산당 주도로 이뤄진 북한의 토지개혁 선전 포스터로, ‘토지는 농민의 겄!’이란 구호 아래 무상몰수·무상분배가 진행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해방공간 남과 북은 각각 농지개혁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김병기는 평양 대주지 집안 출신이었지만 신문명을 깨친 유학파 예술인이자 열혈 청년으로서 ‘토지는 농민에게’란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사진은 1946년 3월 소련군정과 북조선공산당 주도로 이뤄진 북한의 토지개혁 선전 포스터로, ‘토지는 농민의 겄!’이란 구호 아래 무상몰수·무상분배가 진행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해방과 함께 미술계도 분주하게 돌아갔다. 해방 사흘 만인 1945년 8월18일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조직되었는바, 이는 엄청난 속도감을 보여준 것이다. 서기장 정현웅을 비롯해 윤희순, 김주경, 길진섭 등이 주동자였다. 회원은 노수현, 김용준, 변관식, 오지호, 이인성, 장발, 임용련, 문석오, 이국전, 윤승욱, 김만형 등이었다. 본인 확인을 모두 거쳤는지 알 수 없지만 해방기 미술인의 총망라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187명의 명단으로 화려하게 꾸렸다. 다만 명단에서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김용진,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배운성 등은 친일 문제로 제외했다. 이 조직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미술계의 발언을 대표했다. 더구나 시국 관련 작품 제작과 강좌 실시 등 적극적 할동을 벌였다. 특히 발족 두달 만에 10월 해방 기념 미술전람회를 여는 기민성을 보였다. 하지만 조선미술건설본부는 고희동을 위원장으로 추대하면서 문제의 씨앗을 키웠다. 정치적 중립 기조를 깨고 친미반공 노선을 선택한 고희동과 정현웅 일파의 결합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자 미술계에서도 다양한 결사체가 이념 지향과 인맥을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사흘 만인 8월18일 가장 먼저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좌우를 망라한 187명의 화가들이 모두 참여해 두달 만인 10월 해방 기념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사진은 10월20일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 시민대회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자 미술계에서도 다양한 결사체가 이념 지향과 인맥을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사흘 만인 8월18일 가장 먼저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좌우를 망라한 187명의 화가들이 모두 참여해 두달 만인 10월 해방 기념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사진은 10월20일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 시민대회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해방기의 미술계 역시 좌·우익 노선투쟁이 치열했다. 다만 미군정 치하 남한에서의 좌익계 활동은 점점 영역을 좁혀야 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은 9월15일 박문원 등의 참여 아래 결성대회를 열었다. 위원장 이주홍(소설가) 이외 강호, 김일영 등 좌파 성향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프로미술동맹은 뒤에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산하 조직으로 들어가 다른 장르의 작가들과 연합했다. 프로예맹은 중앙위원장에 소설가 한설야를 비롯해 서기장 윤기정으로 집행부를 꾸렸다.

같은 해 10월 말 조선미술건설본부가 해체되고 조선미술가협회가 창립되었다. 이 자리에서 협회는 정치적 엄정 중립, 미술문화의 독립, 민족미술의 창조 등을 선언했다. 회장 고희동, 부회장 이종우, 평의원 길진섭, 김만형, 김용준, 김주경, 이쾌대, 노수현, 장발, 장우성, 정현웅, 허백련 등을 선임했다.

그런데 고희동이 친미반공 노선의 이승만 정권을 지원하고자 미군정의 고문 노릇을 하는 예일대 출신 임용련을 부회장으로 내세웠다. 고희동은 정치중립이란 강령을 깨고 이승만 계열의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하여, 의장 이승만 아래 서무국장 자리를 맡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고희동에게 반기를 들고 좌익계와 중도 성향 회원들이 조선미술가협회를 탈퇴해 각각 새 단체를 만들었다. 바로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이었다. 두 단체는 하필 1946년 2월23일 같은 날 태동했다.

조선미술가동맹은 김주경, 오지호, 이인성, 박영선, 박상옥, 기웅 등이 결합해 일제 잔재 청소, 국수주의 퇴폐예술사조의 배격, 민족미술의 신건설을 강령으로 삼았다. 이날 서울 이화여고 강당에서 열린 결성대회의 개회사에서 화가 오지호는 ‘국가가 없는 곳에 무슨 미술이 있겠느냐’며 이렇게 강조했다. “미술인으로서의 우리의 투쟁의 궁극적 목적은 새로운 민족미술의 수립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인식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목표하는 새로운 민족미술-조선민족에 특유하고 또 공통된 감성과 이념의 완전한 표현으로 조선인민이 다 같이 향유할 수 있는 미술-의 창건이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의 기초가 없이는 그 실현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술가가 이윤에 기생하는 흉악한 동물로부터 던져 주는 부스러기 돈을 줍는 것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는 종래의 상태가 지속되는 한 우리가 목적하는 민족미술의 수립이란 몽상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조형예술동맹에는 중견작가 32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2월23일 서울신문사에서 모여 단체 결성을 논의했고, 2월28일 대학로 중앙시험소(훗날 서울대 공대 자리)에서 결성대회를 열었다. 위원장에 윤희순, 부위원장에 길진섭 등을 선출했다. 그밖에 회원은 김기창, 이쾌대, 정종녀, 정현웅, 조규봉, 김만형, 박래현, 박생광, 이중섭, 최재덕, 김종영 등이었다.

1946년 2월 남쪽 미술계는 조선미술가협회 회장 고희동의 친미 노선에 반발해 좌·우·중도 세력들로 각각 분열한다. 사진은 40년 11월 고희동의 개인전 때로, 앞줄 왼쪽부터 장석표·이해선·이승만·최우석·고희동·노수현·이봉영·이종윤·이건혁, 뒷줄 왼쪽부터 고흥찬·이태준·윤희순·김규택·김용준·길진섭·임학수·안석주·이용우·고유섭·전순택 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6년 2월 남쪽 미술계는 조선미술가협회 회장 고희동의 친미 노선에 반발해 좌·우·중도 세력들로 각각 분열한다. 사진은 40년 11월 고희동의 개인전 때로, 앞줄 왼쪽부터 장석표·이해선·이승만·최우석·고희동·노수현·이봉영·이종윤·이건혁, 뒷줄 왼쪽부터 고흥찬·이태준·윤희순·김규택·김용준·길진섭·임학수·안석주·이용우·고유섭·전순택 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해방 사흘 만에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직
정현웅·윤희순·김주경·길진섭 등 ‘주동’
‘친일화가’ 뺀 좌우 총망라 187명 참여

45년 10월 조선미술가협회로 재창립
위원장 고희동 ‘친미반공노선’에 반발
좌익성향 조선미술가동맹으로 결집
중도세력은 조선조형예술동맹 결성

46년 2월23일 서울 파견된 김병기
‘지령’과 달리 조형동맹 대회 ‘정세보고’

평양 복귀하자 연안파 주도 예술인 집회
김사량 “지주편 김구·이승만 타도” 결의
김병기 나홀로 반대에 거수투표로 고립
최승희 남편 안막 “동무, 용감한 발언 감사”

1945년 8월18일 가장 먼저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기장 정현웅은 한국전쟁 때 가족을 두고 월북해 이산가족이 됐다. 사진은 39년 10월 평양 출신 이화여전 피아니스트 남궁요안나(왼쪽)와 결혼해 백암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정현웅기념사업회 제공.
1945년 8월18일 가장 먼저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기장 정현웅은 한국전쟁 때 가족을 두고 월북해 이산가족이 됐다. 사진은 39년 10월 평양 출신 이화여전 피아니스트 남궁요안나(왼쪽)와 결혼해 백암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정현웅기념사업회 제공.
특기 사항은 조선조형예술동맹 결성대회에 평양의 김병기가 참가했다는 점, 그래서 평남 미술계 정세보고를 했다는 점이다. 다음은 김병기의 증언이다.

“나는 1946년 2월 소설가 유항림과 함께 3·8선을 넘어 서울에 왔다. 그때 동행자로 불문학도 이휘영이 있었다. 3·8선을 넘는데 소련군이 제일 무서웠다. 그들은 무조건 총을 쏘니까. 오히려 미군을 보니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오르규의 소설 <25시>가 연상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2월28일인가, 동시에 두 개의 집회가 서울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미술인으로 하여금 택일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하나는 남산 신사 자리에서의 좌익 집회이고, 또 하나는 동숭동 서울 공대에서의 우익 성향 집회였다. 그런데 좌익 척결에 앞장섰던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남산 대회를 무산시켰다. 나는 지령으로 남산의 미술동맹 대회에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사실 거기는 기웅 정도만 알았지 잘 모르는 인물들이었다. 남산 대회의 불발은 오히려 내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조형예술동맹 모임에 갔다. 조형예술동맹에 가니 이쾌대 등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윤희순은 사회를 보면서, ‘김병기 동무, 북조선 정세를 보고하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평양 미술계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모든 걸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양에서 어렵게 와 참석해서 그런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며칠 뒤 김병기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다. “가자마자 김사량과 안막이 소집한 회의에 참가했다. 집회 장소인 한천시계점은 2층에 호화스런 공간이 있어 회의실로 사용하기 좋았다. 하지만 낯선 현수막이 걸려 있어 놀라게 했다. ‘살인강도 두목 김구·이승만을 타도하자!’ 살인강도라는 구호가 너무 지나치다 생각하면서, 오늘의 집회와 무관한 줄 알았다. 예술가 33명이 모였다. 김사량이 사회를 보고 그 옆에 안막이 서 있었다. 당시만 해도 평양에서 안막은 알려졌어도 김사량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김사량은 중요한 인물이었다. 김사량과 나는 가까우면서도 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어 늘 충돌했다.

1946년 2월 말 평양에서 예술인들을 소집해 ‘김구·이승만 타도 결의’를 주도한 연안파의 대표 김사량은 김병기와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유한 친구였지만 가장 생각이 다른 맞수였다. 39년 도쿄제국대학 졸업반 때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최창옥(오른쪽)과 결혼해 아들을 뒀으나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6년 2월 말 평양에서 예술인들을 소집해 ‘김구·이승만 타도 결의’를 주도한 연안파의 대표 김사량은 김병기와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유한 친구였지만 가장 생각이 다른 맞수였다. 39년 도쿄제국대학 졸업반 때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최창옥(오른쪽)과 결혼해 아들을 뒀으나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날 회의의 주제는 토지개혁을 반대하는 이승만 일파를 타도 대상으로 결의하자는 것이었다. 북의 정책과 반대되는 노선을 걸으면 살인강도가 된다는 것이었다. 김사량이 말했다. ‘김병기 동무, 먼저 이야기하시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민주주의는 언론 자유가 기본이다. 현수막에 김구·이승만을 타도하자라고 써놨는데, 내가 알기로 그들은 오랫동안 해외에서 살다 온 지사이지 살인강도는 아니라고 본다. 정말 그들이 살인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 신문을 보게 하고 라디오를 듣게 하자. 당시 일반인은 라디오, 신문과 단절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언론 자유를 주장하니 청중석은 조용해졌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포목상 광림상회 집 아들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동조하는 말을 했다. ‘옳소. 예술가는 정치싸움에 가담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에 연안파 한 사람이 호통을 쳤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렇게 시계불알 같은(한가한) 소리를 하는가.’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김사량은 제안했다. ‘거수로 결정합시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무기명 비밀투표를 주장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공개적으로 거수를 하니 결국 반대는 나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32 대 1로 김구·이승만 타도를 가결시켰다. 회의가 끝나 회의장을 나오려 하니, 안막이 와 악수를 청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무, 용감한 발언을 해주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용감한 발언’은 ‘너, 반동할래? 그러면 재미없어’라는 협박같이 들렸다. 어쩌면 안막의 속마음을 진정성 있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안막은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이다. 이들은 뒤에 연안파 숙청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일제 강점기 ‘전설의 무희’ 최승희(왼쪽)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작가 안막은 1946년 2월 말 ‘김구·이승만 타도 결의’ 집회에서 유일하게 김병기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48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30년대 중반 아내 최승희와 딸 성희와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일제 강점기 ‘전설의 무희’ 최승희(왼쪽)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작가 안막은 1946년 2월 말 ‘김구·이승만 타도 결의’ 집회에서 유일하게 김병기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48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30년대 중반 아내 최승희와 딸 성희와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날의 ‘김구·이승만 타도 결의’는 사실 토지개혁의 전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지주 편을 든다 하여 살인강도라는 식이었다. 우리 집은 평양에서 소문 난 대지주 집안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토지개혁은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토지는 농민에게’. 이런 구호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우리 집안은 평양 강서고분 일대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30대가 되도록 나는 별다른 생업 없이도 잘살았다. 하지만 토지를 몰수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세월이 흘러가면서 실감하게 되었다. 수입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다행히 부친이 황해도 신천 토지를 팔아 경기도 평택에 커다란 농장을 이미 구입해놓은 상태였다. 이남에서는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이는 토지를 정부가 매입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정책이었다. 평택 토지를 남의 손에 넘기고도 하천 부지로 39만평이 남았다. 결국 이 유산도 내 차지가 되지는 않았다. 재산은 나와 거리가 멀었다. 그 덕분에 나는 평생 붓을 들 수 있었다.”

북한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북한 주민의 74%가 농민임에도 경지면적의 58%를 4%의 지주가 소유하고 있었다. 그나마 자작농은 25%에 불과했다. 토지개혁은 토지의 완전 몰수가 원칙이었고, 그래서 지주계급은 사라지게 되었다. 김사량(1914~50) 역시 평양의 지주 집안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토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평양의 문예동인인 <단층> 동호인은 주로 광성고보 출신이었지만 김사량과 오영진은 평양고보 출신이었다. 김사량은 동경제대 독문과 출신이고, 오영진은 경성제대 조선어과 출신의 수재였다. 이들은 매우 친한 사이였는데, 좌익 성향과 우익 성향으로 노선은 달랐다. 김사량은 일본어로 쓴 소설 <빛 속에>(1939)로 아쿠타가와상 후보로 올라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45년 5월 중국 전선의 학도병 위문 행사에 참가한 이후 탈출해 연안 인근 태항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일제 말 망명작가로 이육사와 김사량을 들 수 있다면, 이육사는 망명에 실패해 옥사했고, 김사량은 망명에 성공한 사례다. 김사량의 연안 망명기 <노마만리>(駑馬萬里·1947)는 소설처럼 기록한 항일투쟁기이기도 하다.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본부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조선의용군 본부의 선발대로 귀국했다. 다시 화가의 증언이다.

“김사량은 일제 말 학병 지원 연설을 하게 되었다. 마침 그 자리에서 나도 들었는데,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아마 속마음과 달리 학병 지원을 이야기하려니 그랬을 것이다. 그런 괴로움을 씻고자 그랬을까. 그는 연안으로 달려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연안파의 일원이 되어 점령군처럼 귀국했다. 하지만 평양 정권이 김일성 체제로 굳어지게 되니까 그는 연안파이면서 김일성과 손을 잡았다. 그는 좌익 성향이 강했기 때문인지 토지개혁에도 앞장서서 찬성했다. 그러고 보니 김사량은 동경 시절, 주영섭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 연극운동을 할 때 그도 연극단체를 꾸렸다. 우리가 학생 중심으로 극단을 운영했다면 김사량은 노동자 참여의 극단을 조직했다. 그만큼 김사량은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소설가로서도 훌륭한 작품을 썼는데 전쟁 시기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81913.html#csidx97a5032db35a8109b73e0d735a248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