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환영 시민대회’ 직전 소련군 대표인 그리고리 매클레르(오른쪽) 중좌와 강미하일 소좌(왼쪽)가 김일성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한 뒤 축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장군님께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뭐, 장군님! 1945년 초가을의 어느날 밤, 통행금지 시간인 깊은 밤,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대기했던 지프의 문을 열어주자 젊은 ‘서기장’은 올랐다. 여기서 장군님은 김일성이고, 서기장은 화가 김병기다. 장군께서 왜 예술인을 만나자 했을까. 당시 평양 사람들은 김일성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김일성 장군’이라는 호칭만 널리 퍼지고 있었다. 차는 시내의 서쪽 수옥리의 집에서 남쪽 서기산 방향으로 달렸다. 서기산 고개 위에서 차는 섰다. 바로 토산품을 파는 평안도상품진열소였다. 이 건물은 1923년 설립 이래 부친 김찬영과 김관호 등 삭성회 화가들이 미술전을 열었던 곳이다. 그러니까 근대미술사에서 기억해야 할 공간이다. 미술로 낯익었던 건물, 그 2층 넓은 방에 열댓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평양의 대표격 예술가들이 하나둘 모였다.
1945년 초가을 한밤중에 김병기는 평양예술문화협회 서기장 자격으로 평안도 상품진열소에서 34살의 청년 김일성을 처음 만났다. 그 뒤 10월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해방군환영군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은 처음 대중 앞에 등장했다.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는 김일성 뒤로 보이는 스탈린 초상화를 비롯한 무대 배경 포스터는 소련군의 요구로 최연해·문학수 등 평예협 화가들이 그린 작품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장군’의 곁에 허정숙이 서 있었다. 바로 허헌의 딸이 아닌가. 그는 군복 비슷한 옷에 장화를 신고 피스톨까지 차고 있었다. 멋있게 보였다. 경호 책임자인지 임춘추도 있었다. 젊은 김일성이 다소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짧은 상고머리에, 호탕한 성품임을 보여주면서, 지식인 풍모까지 연상시켰다. 그는 만주에서 펼친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평양 사람들은 김일성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예술인들에게 요구했다. “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예술인 여러분께서 나를 선전해 주시오.”
1945년 가을 김병기가 김일성을 처음 봤던 평안남도 상품진열소. 해방공간 북조선공산당 임시 사무실로 쓰였고 48년 10월10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 창립을 발표한 공간으로 지금은 노동당사적관이 됐다.
평양에 시계 파는 가게로 유명한 환천시계점이 있다. 어느 날 그 시계점 건물에 평남지구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라는 간판이 붙었다. 하지만 그 단체의 정체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없었다. 평양을 대표하는 예술단체로 평양예술문화협회가 활동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무슨 유사 단체인가. 예술동맹은 연안에서 귀국한 사람들이 주축이라 했다. 알 만한 사람은 소설가 김사량과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 정도였다. 뒤에 이들은 평양예술문화협회와 합병하자고 했다. 합치려면 상식적으로 비슷한 수준이 기본인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100:2의 수준이라 할까, 형평에서 많이 기울었다. 하지만 순수 지향의 예술협회와 비교하여 예술동맹은 경향성 지향으로, 당(黨)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었다. 당을 배경으로 갖고 있다면, 상식과 진리가 되었다. 1946년 봄, 두 단체의 대표자들은 시계점에 모였다. 불균형을 딛고 합병하여 새로운 예술단체가 출범했다. 그것은 북조선예술총동맹(문예총)이었다. 이는 1951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 개칭되면서 북녘땅의 대표 예술단체로 자리매김되었다.
북조선예술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은 최연해였다. 1946년 10월 문학가가 주축이 되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 개편되었고, 산하에 분야별 단위기구를 두었다. 장르 기구로 북조선미술동맹을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정관철, 부위원장으로 황헌영을, 그리고 서기장으로 김병기를 선출했다. 정관철과 김병기는 동갑이었지만, 정관철은 김일성 영웅화 내용의 <보천보의 횃불> 그림으로 뒤에 미술계의 지도자로 부상되었다. 미술동맹의 일은 김병기 서기장이 도맡아 처리했다. 실질적 위원장 노릇을 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북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미술동맹의 초대 대표가 월남했으니, 자랑스럽게 기록할 사실은 아니었을 것이다.
해방공간 북한 전역에서 수많은 군중집회 때마다 내걸렸던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6·25전쟁 때 평양에 진주한 영국군들이 수거해 가고 있다. <전쟁미술> 제공.
1945년 초가을 밤 대문 두드리는 소리
“장군님께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평양상품진열관 2층 예술가들 소집
“짧은 상고머리·쉰목소리·호탕한 풍모”45년 10월 공설운동장 김일성 첫 등장
소련군 요구로 무대배경 포스터 제작
최연해 등 공동작업 500호 대작 완성김사량·안막 등 프롤레타리아동맹
평양예술문화협회와 합병 제안해
46년 3월 북조선예술총동맹 ‘출범’
김병기 산하 미술동맹 초대 서기장
“훗날 월남해서 북쪽 기록엔 없어”45년말 조선민주당 중앙위원 참여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 민주주의?”
최명익 질문에 김병기는 반문했다
“민주주의가 두 가지 있습니까?”1947년 9월16일 제43차 노동당 상임위원회는 민족문화예술 건설의 방향 설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첫째, 문화예술은 당과 인민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 둘째, 문화예술은 근로대중을 선전의식으로 교양시키는 사상적 무기가 돼야 한다. 셋째, 문화예술은 당과 국가정책을 올바르게 반영해야 한다. 넷째, 민족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진보적 문화유산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다섯째, 부르주아 사상에 반대하는 투쟁을 강력히 전개하고 사회주의적 내용에 부합되는 새로운 민족적 형식을 찾아 창작방법을 구사해야 한다.” 예술은 사상적 무기가 되어야 하고 사회주의 내용과 부합되어야 한다. 이런 점을 강조하는 평양 사회의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화가의 증언이다.
“해방을 맞자 해외에서 귀국하는 지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국 연안에서 한 200명쯤 들어온 것 같다. 거기에는 김두봉도 있고, 안막이나 김사량도 있고, 학자나 장군도 있었다. 강팀이었다. 게다가 연안에서 공산당이 성립됐으니, 어쩌면 연안 사람들이 정권을 잡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상상에 불과했다. 모택동이 아니고 소련군이 들어왔으니까. 소련군은 불과 열댓명과 더불어 왔는데, 그 가운데 김성주, 아니 김일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군 치하의 정국은 김일성 체제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1946년 3월 결성된 북조선예술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 최연해는 일찍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하며 ‘평양의 자랑’으로 꼽힌 화가였다. 사진은 32년 모두 조선미전에 입상한 오월회 동인들로, 왼쪽부터 권명덕·박영선·최연해·현이호의 20대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최연해가 작고 1년 전인 1966년 그린 자화상.
경방단 공동화실로 러시아 장교 스레첸코가 찾아 왔다. 14명이 함께 작업할 정도로 제법 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 발언은 이랬다. ‘조선의 화실은 왜 이렇게 빈약합니까.’ 그러면서 그는 러시아의 화가는 축제일이 되면 그림도 그리고, 슬로건도 쓴다고 했다. 그는 내일 공산당 본부로 화가 3명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나는 최연해, 문학수와 함께 공산당 본부가 있는 숭실전문학교로 갔다. 소련 장교는 포스터를 보여주면서 커다란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그림 내용은 소련군이 일장기를 밟고 서서 조선 농민에게 태극기를 주는 장면이었다. 소련군이 우리에게 태극기를 주다니!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화가들은 소련군이 지시한 내용의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물화를 잘 그리는 최연해가 주축이 되고 여러 화가가 동원되었다. 500호가량의 대작을 급하게 완성했다. 물론 스탈린 초상화도 함께 그렸다. 나는 그림 작업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 그림은 10월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첫 연설 때 무대 배경으로 걸렸다. 김일성이라는 실체가 평양 사람에게 처음으로 소개되는 공식 집회였다. 그날 집회에 나는 참가하지 않았다. 전해듣기로, 김일성은 생각보다 젊었고, 평양 출신이라고 했는데 함경도 사투리를 써 의아해했단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평안도 말보다 함경도 말은 억양이 드세, 이른바 ‘혁명 언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최연해는 함경도 어투 흉내를 잘 내 놀라게 했다.”
최연해(1910~67)는 평양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그는 김관호와 김찬영이 지도하는 삭성회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920년대 미술학교 설립운동까지 추진했던 삭성회는 근대 유화 전개의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최연해는 조선미전 특선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해방 전 세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고, 해방 이후에는 예술단체에서 활동했다. 전쟁시기 이후 그는 항일혁명 전적지 답사를 통해 50여 점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영화미술이라든가, 삽화 혹은 공예품의 디자인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다. 최연해는 인물상, 특히 좌상을 잘 그렸다. 1943년 제22회 조선미전의 특선작 <유(劉) 노인상> 같은 작품을 보면 쉽게 입증할 수 있다. 월남한 장리석이 최연해 화풍을 유머러스하게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미전 심사위원이었던 이시이 하쿠테이 등 일본 화가들은 최연해를 극찬하기도 했다. 평양의 한 미술평론가는 이런 평가를 남겼다. “최연해는 풍경화 창작에서 대상에 무한히 충실하였지만 미술가의 사색과 의도를 표현하지 않은 맹목적인 복사를 반대하였다. 중심을 살리고 부차적인 것을 생략하면서 필요한 대상에 형상의 세부를 주고 색채 구성을 합리적으로 함으로써 조형성을 높이었다.”(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참조)
1946년 북조선예술동맹 산하 미술동맹 위원장으로 최초의 김일성 초상화 작가인 정관철(오른쪽)이 54년 무렵 러시아 유학파 변월룡의 부인 제르비조바(가운데), 미술동맹 유화분과 위원장 문학수(왼쪽)와 함께한 모습. 사진은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중에서.
정당의 다당제를 의식해서 그랬을까. 어느 날 김일성은 조만식을 찾아와 공산당 하나만으로는 일이 잘 되지 않으니 반대되는 당을 창당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조만식은 일당 체제의 소련 치하에서 두 개의 당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대하여 김일성은 소련사령부 설득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공산당은 좋지 않은 일을 자초하여 민심과 멀어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새로운 당을 만드니 그것이 조선민주당이었다. 당수는 조만식이었고 부당수로 이윤영 이외 김일성의 추천에 의한 최용건이었다. 김일성은 최용건 이외 서기장으로 김재민을 추천했다. 운영자금은 김동원이 주로 조달했다. 조선민주당은 33명의 중앙위원을 두었는데, 청년 대표로 극작가 오영진과 뒤에 서울에서 조만식 기념사업을 주도했던 박재창, 그리고 미술동맹의 서기장인 김병기를 선임했다.
그런데 최용건은 부당수이면서 어쩌다 가끔 당에 들렀다. 그는 오산학교 시절 조만식의 제자이기도 해서, 조만식에게 큰절하면서 환심을 샀다. 김재민은 아주 약은 사람이었는데, 사실 그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게다가 그는 당에 나오지도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김재민은 바로 김책의 가명이었다. 6·25 전쟁 때 총사령관을 지낸 장본인이다. 당시 김일성 쪽은 조선공산당을 별도로 운영했다. 그러다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김일성과 소련군 쪽은 신탁통치 찬성 결의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민주당은 긴급 중앙위원회를 소집했다. 아침 일찍 삼근(三根)여관(현재 고려호텔)에 33명이 모였다. 김병기도 참석했다. 하루 종일 토론해도 결론을 얻지 못했다. 사실 조만식과 민주당에서는 당장 독립을 원했지, 신탁통치는 아니었다. 저녁나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배달되었는데, 서울은 신탁통치 반대 일색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조선민주당도 신탁 반대를 결의했다. 그러자 소련은 노골적으로 민주당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조만식은 한복 차림에 머리에 부스럼이 생겨 수건으로 감싸고 다닌 까닭에 간디 같은 인상을 주었다. 조만식은 연금당하고, 다른 이들은 도망가거나 잡히거나 했다. 결국 조만식 불참 아래 민주당은 찬탁을 결정했다. 그러니까 조만식 체제의 조선민주당은 2개월도 가지 못했다. 이에 김일성 세력은 지방 사람들을 모아 조선민주당 조직을 다시 추슬러 33명의 중앙위원을 상무집행위원이라고, 김재민을 정치부장이라 하는 등 자기들 편한 대로 정리했다. 조선민주당 창당은 처음부터 김일성 세력의 정치공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이름이 조선민주당 중앙위원 명단에 발표되고 나니, 경방단의 협회 사무실 베란다에서 최명익이 물었다. ‘김 선생,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입니까, 부르주아 민주주의입니까?’ 이는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이에 나는 ‘민주주의가 두 개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두 개 있을지 몰라도 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데모크라시’ 하나였다. 하지만 최명익은 민주주의가 두 개 있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민주주의를 두 개로 생각한 거다.”
이후 평양 사회는 김일성 체제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결과로 조만식은 불행하게 생애를 마쳤으니, 1950년 전쟁 직후 인민군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은 불행하게도 분단으로 이어졌고, 전쟁이란 씨앗을 준비했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 현장을 지킨 예술인이 있고, 밀실을 지킨 예술인이 있다. 화가 김병기는 ‘현장의 예술인’이었다.
구술·집필 윤범모/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