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 김병기는 평양 중심가 중성동의 집에서 해방을 맞았다. 바로 이튿날 장인이자 평양 유지 김동원이 서울의 송진우에게 보내는 밀서를 품고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개성을 거쳐 도착한 서울역 앞에는 구름 같은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김병기는 ‘태극기’도 ‘조선독립만세’ 깃발도 그날 처음 봤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5년 8월15일 뜻밖의 해방을 맞은 사람들은 일장기의 붉은 원을 먹칠하거나 태극무늬로 덧칠해 만든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사진은 서울 부민관에 걸려 있던 일장기를 재활용한 태극기. 사진 우리문화가꾸기회 제공
1945년 8월15일. 20세기 한국 역사에서 이처럼 감격적인 날이 얼마나 더 있을까.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날, 역사는 이날의 현장을 뜨겁게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일이건 개인의 일이건 ‘독립’이라는 말처럼 싱그러움을 주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독립, 독립, 조선독립! 해방정국은 새로운 역사를 요구했다. 평양의 29살 청년 김병기 화가에게도 그랬다. 평양의 이름난 부잣집 아들이었던 김병기는 ‘그림 같은 양옥’에서, 그날도 보통 때처럼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대일본제국 천황의 옥음’, 그것은 항복선언이었다. 항복!
광복이 그만큼 고마운 것은 일제강점 말기의 전시체제 때문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이른바 성전(聖戰)이란 침략의 암흑기를 연출했다. 전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예술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전쟁 예찬의 나팔을 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 미술의 깃발은 높이 올랐다. 불행한 일이었다. 예컨대 김은호는 <금채(金釵)봉납도>(1937)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친일 귀족 부인들의 모임인 애국금채회에서 패물을 모아 조선총독에게 헌납하는 장면이다. 김인승은 놋그릇 공출 장면을 <유기(鍮器)헌납>(1943)에 담았다. 일제는 이렇듯 금붙이부터 놋그릇까지 앗아가면서 군수물자 동원에 혈안이었다. 친일 미술의 절정은 ‘결전(決戰) 미술전’이다. 전쟁 예찬의 이 전시에 많은 화가가 동원되는 오명을 남겼다. 친일부역의 대표 집단은 단광회(丹光會)라 할 수 있다. 이 단체는 회원전을 열면서(1943) <조선징병제 시행기념> 유화를 출품했고, 이 그림을 군사령부에 기증했다. 징병제 예찬에 앞장선 화가는 김인승·김만형·손응성·심형구·박영선·이봉상 등이었다. 나라를 잃은 예술가들에게 내리는 엄혹한 시련이었다. 그런 암흑 속에서 이쾌대의 신미술가협회 활동은 빛나는 보석과 같았다. 이들은 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전을 외면하면서 예술가적 순수성을 지켰다. 박문원의 평가대로 이는 일제에의 소극적 저항이었다. 그래서 이쾌대·이중섭·문학수·진환·최재덕 등의 이름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일제 강점기 평양역사 전경. 김병기는 1945년 8월16일 평양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한겨레> 자료사진
암흑을 떨쳐내고 광명이 왔다. 8월15일. 어찌 이날을 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빛을 얻은 날. 그 감격의 하루가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런 와중에 김병기는 평양의 유지 김동원 앞에 섰다. 화가는 민족지사의 밀사가 되어 서울행 기차에 올라야 했다. 김동원의 밀서를 서울의 송진우에게 전달하는 임무였다. 갑작스럽게 맞은 해방정국에서 남북 지도자들끼리의 의견 조율이 시급했던 상황이었다. 8월16일 아침 화가는 밀사의 신분으로 평양역으로 나갔다.
8월15일 평양 집에서 들은 ‘천황의 항복’
16일 장인 김동원의 밀서 품고 역으로
“기차에는 도망가는 일본군 장교로 가득”개성 집집마다 일장기에 덧칠한 태극기
처음 본 일본사람들 “패전 슬퍼서 먹칠”17일 원서동 비원 담벽 송진우 자택으로
‘남북 공동전선’ 제안한 밀서에 바로 답장
“일본인들 죽이는 건 실수…미국 기다리자”1943년 친일미술인들 모임인 단광회 화가들이 공동으로 그려 일본군사령부에 기증한 ‘조선징병제 시행기념 헌납도’. 일제 말기 전쟁예찬에 나선 이들은 김인승·김만형·손응성·심형구·박영선·이봉상 등이다. 사진 윤범모 미술평론가 제공
“평양에서 기차를 타면 서울까지 약 4시간이 걸린다. 16일 평양역에 나가니 도망가는 일본군 장교로 가득했다. 일본이 패망했다 하나 그들은 동방요배(東方遙拜)를 버리지 않았다. 그런 일본 장교들 틈에 끼어 겨우 기차를 탔다. 4명씩 앉는 객실에서 패잔병들은 조선사람 욕을 마구 했다. 3시간쯤 달리다 기차는 개성역에서 섰다. 개성은 고려의 서울이다. 양옥은 보이지 않고 초가집만 보였다. 하지만 개성은 전통적으로 민족성이 강해 일본인들이 발붙이기 어려운 곳이었다. 해방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마을은 집집마다 깃발을 올리고 있었다. 바로 태극기였다. 갑작스럽게 태극기를 구할 수 없으니까 일장기를 먹칠로 고치니, 그게 바로 태극기가 되었다. 일장기는 집집마다 다 있었으니까. 함께 앉아 있던 일본군이 지방 사투리로 물었다. ‘저 깃발은 무엇이냐.’ 일본 사람들은 당연히 태극기가 뭔지 알지 못했다. 그들 중 하나가 이렇게 대답했다. ‘전쟁에서 지면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먹칠을 한다.’ 참으로 희한한 해석이었다. 검은색이 있는 깃발을 보고 패전의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임시 태극기는 일장기의 붉은 원 아랫부분을 검게 칠하고, 또 사괘를 그렸다. 일장기의 붉은 태양에 먹칠을 한 것이었다. 해방된 마을은 그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일장기 대신 급조 태극기를 걸었다.”
화가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은 해방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울역을 나서니 무엇보다 현수막이 맞아주었다. ‘우리들 앞날에 희망이 있으니 동요하지 말고 난동치지 말라.’ 그런 내용이었다. 새까만 먹 글씨였다.
“희망, 희망이란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그날 우리들 앞에 희망이 있었다. ‘조선독립만세’라는 말이 얼마나 대담하고 용감했던지. 조선독립만세라는 말은 그대로 가슴에 와 닿았다. 그리고 희망이란 말이 또 가슴에 와 닿았다. 36년 만에 조선독립만세를 보고, 또 태극기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리고 광장에 나가니까, 동요하지 말라는 것. 질서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1945년 8월15일 김병기는 평양유지인 장인 김동원(왼쪽)이 준 밀서를 받고 서울로 내려와 송진우에게 전달하는 밀사 노릇을 했다. 1947년 월남한 김동원은 48년 5월 초대 제헌의회에서 신익희(오른쪽)와 함께 국회 부의장에 당선된다.
서울역 광장은 군중으로 가득했다. 광복의 기쁨과 더불어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소련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그래도 미국은 4년을 싸웠지만 소련군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소식 이후에 선전포고했다. 겨우 일주일 싸운 것에 불과하다. 일주일 싸운 소련군이 서울로 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하고 맞서 있었기 때문에 거의 기진맥진 상태였다. 아무튼 서울 중심가는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군중으로 가득했다. 그런 속에 일본 탱크도 보였다. ‘우리는 아직 무기를 가지고 있다. 너희들이 난동하면 쏘겠다’라는 시위 같았다.”
화가는 해방의 현장, 서울 거리를 걸었다. 종로의 와이엠시에이(YMCA) 건물 앞에 서니, ‘조선독립만세’라는 커다란 붓글씨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해방된 민족은 눈물을 흘렸고, 춤을 추었다. 화가는 걸어서 돈암동 부친 집에 도착했다. 화가의 부친 김찬영은 1910년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서양미술 수용의 선구자였다. 고미술 수장가로도 유명했다. 오랜만에 해후하는 부자 사이였다. 김찬영-김병기 부자는 한국근현대미술사의 현장과 맞물린다.
화가는 17일 고하(古下) 송진우(1887~1945) 자택으로 찾아갔다. 고하의 집은 원서동 비원 담에 붙어 있었다. 원서동 조그만 집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집은 기역(ㄱ) 자 형태였고, 서가에는 <다이쇼(大正) 정당사> 같은 책이 꽂혀 있었다. 송진우는 해방정국에서 국민대회준비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어 그는 김성수, 김병로, 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을 결성했고, 당수 격인 수석총무로 추대되었다. 송진우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선포식에 초청받았으나 불참했고, 여운형의 협력 요청도 거절했다. 그러고 나서 독자노선을 선택한 것이 바로 한국민주당이었다. 8월16일 송진우는 서상일·김준연·장택상 등과 국민대회준비회 조직 관련을 선포했다.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해방정국에서 김병기 밀사는 송진우와 대좌했다.
“해방은 여름에 왔으니까 무더운 날씨였다. 나는 민족지도자 고하 선생과 마주 앉았다. 그런데 시선 두기가 편하지 않았다. 선생은 모시옷을 입고 있었는데, 속살이 훤하게 보였다. 거기다 바지 속에 팬티까지 입지 않아 속이 다 보였다. 민족지도자는 속을 다 보여야 하는가, 의아했다. 하기야 본인의 집이니 편하게 옷을 입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하 선생에게 밀서를 전해드렸고, 또 그 자리에서 답장을 받았다. 밀서 내용은 해방을 맞았으니 남북 공동전선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평양 인사들의 뜻을 모은 것이었다.
1935년 11월 각각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내던 고하 송진우(왼쪽)와 몽양 여운형(오른쪽)이 김천의 독지가 최송설당(가운데) 동상 제막식에 함께 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런 평양의 제안에 대하여 송진우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가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니까, 해방을 이룬 상해의 김구, 미국의 이승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면서 일본 사람들을 곱게 보내자고 했다. 게다가 평양은 이미 신사를 불태웠고, 심지어 일본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는데, 그건 다 실수라고 했다. 고하의 생각은 그랬다. 신사도 우리 재산이니까 불태운 것은 잘못이다. 일본은 이웃나라가 될 테니까 곱게 보내자, 해방은 해외 인사들이 이룬 거니까, 사실 미국이 한 거니까, 그들을 곱게 기다리자, 라는 내용이었다.”
평양에서 밀서를 준 김동원, 그는 누구인가. 독립운동가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중 생활도 했고(1911), 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차 옥중 생활을 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1920년대 그는 조만식과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펼쳤다. 그는 평양고무공장 같은 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그는 조만식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북한 땅에 입성하자 월남했다. 미군정 장관의 행정고문을 지냈고,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민주당 상임위원 및 기획부장을 역임했다. 제헌국회가 성립되자 서울 용산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와 같은 여세로 김동원은 제헌국회의 부의장으로 피선되어 정치계의 일선에 섰다. 하지만 6·25전쟁은 그에게 납북이라는 불행을 안겨주었다. 김동원 부의장은 화가 김병기의 장인이다. 해방정국에서 밀서를 맡길 만한 관계였던 것이다. 정치가 김동원과 소설가 김동인은 형제 사이이다.
식민지 치하 평양의 민족지도자는 도산 안창호 계열과 고당 조만식 계열이 있었다. 조만식은 오산학교 교장이나 조선일보 사장도 했지만 평양 지방에서는 물산장려운동의 거목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은 한마디로 우리 물건을 쓰자는 것. 경제성 추구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기다란 두루마기는 낭비이니 길이를 짧게 하자는 것 등이다. 신발은 갖신 아니면 짚신을 신었다. 갖신은 가죽으로 만들면 너무 딱딱하고 폭이 좁아 신기 어려웠다. 짚신은 쉽게 낡아지기 때문에 불편했다. 고무신의 경우, 일본은 동남아에서 고무원료를 가지고 와 만들었다. 평양에는 고무신 공장이 많았다. 그중 하나는 김동원의 공장이었다. 고무바닥에다가 헝겊을 댔는데, 매우 편리했다. 그래서 그것을 편리화(便利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편리화라는 것은 고무바닥에 헝겊을 대는 것. 이것이 부산 피난 시절에 농구화가 되었다. 평안도 사람들은 고무신 만드는 솜씨를 자랑했다. 평안도는 편리화 이외 메리야스와 양말도 잘 만들었다. 양말공장도 평안도가 발달되었다. 서울 사람들은 양반 후예여서 그런지 공장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고무 공장도 평안도가 많았다. 그와 같은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조만식은 앞장섰다. 김동원은 실천운동에 일익을 담당했다. 하지만 김동원은 도산 안창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흥사단 조직에 참여했고, 수양동우회 사건에도 연루되었던 것이다. 도산은 교육입국을 중요시 여겼다.
구술집필 윤범모/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