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 해방과 동시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한 몽양 여운형은 17일 서울 종로 와이더블유시에이 강당에서 중앙조직을 공포하고 3천만 동포에게 알리는 건준 선언문을 발표했다. 벽에 걸린 임시 태극기들의 문양이 눈길을 끈다.
인류는 평화를 갈망하고 역사는 발전을 지향한다. 인류사상의 공전적 참사인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서 제국주의적 착취와 억압하에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유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36년간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여 왔다. 이 자유 발전의 길을 열려는 모든 운동과 투쟁은 제국주의와 및 그와 결탁한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세력에 의하여 완강히 거부되어 왔다.”
1945년 8월 16일 서울에 온 김병기는 18일 종로 네거리에서 우연히 건국준비위원회 미술본부 사무실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건준 사무실은 서울 종각 네거리 화신백화점의 맞은 편 한청빌딩에 있었는데 사진은 35년 5월 준공 때 신문 광고에 실린 전경이다.
선언이다. 해방을 맞은 민족의 당당한 선언이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선언이다. 독립 이후 최초로 조직된 건국준비 단체의 선언. 일제는 패망에 앞서 일본인의 안전 귀환 문제를 걱정했다. 하여 1945년 8월15일 아침 민족지도자 여운형과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이 마주 앉아 협상을 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16일 오후 조선 민중 상대의 보고 연설회를 열고, 17일 중앙 조직을 공표하고, 18일 3천만 동포에게 ‘지령’을 발표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건국준비위의 2차 중앙조직에는, 여운형 위원장을 비롯하여 김약수·홍기문·유석현 등 33명 가운데 이여성이 들어 있었다. 경북 칠곡의 대지주 집안 출신 이여성은 화가·학자·언론인·정치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문화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여운형의 오른팔로 알려졌다. 그 이여성의 친동생이 바로 화가 이쾌대다. 훗날 이들 형제는 조국 분단 상황에서 북한을 선택했다.
1945년 해방 무렵의 이쾌대. 8월18일 종로 건준 미술본부에서 김병기를 맞아준 일본 유학시절부터 절친이다.
45년 8월18일 종로 ‘건준’ 사무실
“미술본부에 가니 이쾌대가 반겼다”돌아와 9월 평양예술문화협회 결성
“형이 운영하던 인쇄소 건물서 모여”
100여명 참여 해방뒤 첫 예술인단체
소설가 최병익 회장에 김병기 총무로강당에 공동화실 두고 문학수가 담당
한글학자 전몽수 우리말 강의에 ‘감격’신혼때 직접 지은 수옥리 2층 양옥
음악회·시낭송…폴 발레리 추도식도
불어학자 이휘창 ‘해변의 묘지’ 암송
“바람이 일어선다. 살아야겠다” 이쾌대가 그린 친형 이여성의 초상화. 건준 중앙조직 33명에 들어있던 당대 문화계의 거물이었다.
평양 밀사로 8월16일 서울에 온 화가 김병기. 그는 해방의 열기로 가득한 종로를 걸었다. 18일 종로 한청 빌딩(종로 사거리 현재 영풍문고 부근) 앞에 섰다. 빨간 벽돌 건물이었다. 거기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간판이 붙어 있었고, 옆에 미술본부 안내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본부에는 뜻밖에도 이쾌대 혼자 있었다. 이들은 반갑게 악수하고 해방의 기쁨을 나누었다. 특히 친일미술과 거리가 있었던 이들의 만남은 가볍지 않은 인연이 된다. 해방정국의 문화예술계 향방 등을 논의하던 둘의 대화는 태극기 문제로 이어졌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디자인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새로운 태극기 디자인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무엇보다 태극 옆에 사괘를 두는 것은 봉건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안한 대안은 사괘를 빼고 차라리 둥근 태극만 사용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헤어졌다.
며칠 만에 돌아온 평양에서도 예술인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예술인들은 서문 밖 숭실학교 부근의 기신사(紀新社) 인쇄소 건물로 모였다. 인쇄소 건물 2층은 서양식으로 꾸며 회합하기에 좋았다. 기신사는 화가의 친형, 김병룡이 운영했다. ‘기신’은 부친(김찬영)이 서양 영화 배급을 위해 설립했던 기신양행에서 따온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평화의 여성 독지가 백선행의 기부로 세워진 유일한 조선인 공회당 백선행기념관의 최근 전경. 1948년 9월 김병기가 총무를 맡아 출번한 평양예술문화협회 사무실이 이 건물 옆에 있던 경방단 빌딩에 있었다. <위키피디아> 제공
그해 9월 인쇄소 건물은 새로운 예술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평양예술문화협회, 바로 해방과 함께 탄생된 평양 최초의 예술단체가 결성된 장소였다. 소설가 최명익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조직은 5개의 분야로 나누었다. 문학 분야는 유항림 부장을 비롯하여 오영진·황순원·한태천 등, 미술은 문학수 부장 이외 정관철 등, 음악은 김동진 부장, 연극은 주영섭 부장, 외국문학은 이휘창 부장 등 약 100명의 예술인이 모였다. 평양 지역 예술인들의 총결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단체였다. 이런 예술가 단체의 살림을 맡은 총무는 바로 김병기였다.
화가는 말한다. “해방이 되자 고고하게 화실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다. 민중과 더불어 나라를 만들고 사회의 새로운 토대를 만들고 그림 그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현실을 무시하고 혼자서 그림 그리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리얼리티가 없는 그림은 장식품이다. 나는 장식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림을 돈벌이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림은 우리 시대의 정신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정신성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그림의 제일 목적이다. 그래서 해방이 와도 나는 현장에서 일을 해야 했고 이러한 생각은 평생 간직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해방 이후 이북에서 처음 결성된 평양예술문화협회 초대 회장 최명익의 대표작 <비 오는 길>의 표지. 2015년 주식회사 아시아에서 출간했다.
평양예술문화협회의 회장 최명익. 그는 김병룡과 친구 사이였다. 김병룡은 일본 법정대 경제과 출신으로 한때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했다. 일제치하의 대지주 아들 중에는 사회주의를 선호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병룡은 귀국할 때 <전기>(戰旗)와 같은 사회주의 계통의 금서를 숨겨오는 모험을 즐겼다. 하지만 그는 6·25 때 소련군의 조선인 여성 강간 현장을 목격한 뒤 사회주의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최명익은 30년대 지식인 소설을 써서 주목을 끌었고 <장삼이사>(1941) 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37년 ‘단층’ 동인을 결성하는 등 30년대 평양 문단을 이끌었다. 단층파는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출신들이 중심이었다. 유항림(본명 김영혁)·김이석·김화청·이휘창·김조규(시인) 등이 회원이었다. 최명익은 소설가 이태준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태준이 평양에 오면 최명익·김병룡 셋이 함께 어울렸다. 최명익은 도스토옙스키 같은 분위기를 보여 <무성격자> 같은 소설을 썼다. 이광수 등에게 영향을 준 톨스토이는 교훈적 경향을 자아냈다. 30년대의 청년 김병기도 도스토옙스키 문학에 경도되었다. 그런 결과 그가 얻은 깨달음은 이렇다. ‘톨스토이라는 언덕에 오른 뒤에야 도스토옙스키라는 산이 보인다.’ 하기야 그는 일본 유학 도중 휴학을 하고 평양에서 지낸 1년 동안 도스토옙스키 전집으로 세월을 대신할 정도였다. 식민지 시절 지식인 사이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
“평양예술문화협회의 본거지는 대동강변의 경방단(警防團·소방방공기관) 건물에 뒀다. 4층 높이 시멘트 건물로 백선행기념관 옆에 있었다. 백선행은 어렵게 돈을 모아 사회 환원을 한 독지가였고, 기념관은 일제 때 평양 유일의 조선인 공공시설이었다. 협회는 건물의 2층을 공동화실로, 3층과 4층은 강당으로 사용했다. 우리는 강당에서 언어학자 전몽수 선생을 모셔다 한글 강연을 들었다.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으로 지하에 숨어 있던 전몽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한글 이야기를 했다. 해방 직후의 한글 이야기는 굉장한 장관이었다.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들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강제로 없애려 했던 한글, 이것을 우리말로 우리 학자가 강연하니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작업 여건이 좋지 않은 화가들에게 여유 있는 공간은 꿈이다. 협회를 결성하고 무엇보다 배려한 것이 바로 제작 공간이었다. 공동화실 책임자는 문학수였다. 거기서 14명의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
1953~55년무렵 러시아에서 귀국한 변월룡과 함께 한 문학수. 평양예술문화협회에서 운영한 공동화실의 책임자였다.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컬쳐그라피 제공)
협회 건물의 1층 구석에 빈방이 있어 불어 강습도 열었다. 이휘창-이휘영 형제가 불어를 가르쳤다. 해방정국의 평양에서 불어 강습은 일종의 ‘저항’이기도 했다. 점령군처럼 온 소련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반문했다. ‘왜 러시아가 아니고 프랑스인가?’ 그 시절 대부분의 예술인들은 러시아보다 프랑스를 좋아했다. 친구인 문학수도 불어를 잘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을 원서로 읽을 정도였다. 나도 도쿄 시절 아테네 프랑세에 다니면서 불어를 공부했다.”
단층파 출신으로 불어를 가장 잘하는 이가 이휘창이었다. 그 역시 도쿄 시절 아테네 프랑세에서 불어를 배운 문학도였다. 아테네 프랑세는 프랑스 정부가 지원하는 훌륭한 불어 강습소였다.
“이휘창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가 하면, 폴 발레리의 장편 시집 <해변의 묘지>를 불어로 암송할 정도였다. 나와 평양종로보통학교 동기생으로 졸업 기념사진을 보면 이중섭과 셋이 같은 줄에 서 있다. 그는 여자로 오해받을 정도로 꽃미남이었다. 그는 월남했다가 중공군 남하 때 아이들이 보고 싶다고 다시 북으로 간 뒤 소식이 끊어졌다. 그의 부인은 소설가 김이석의 여동생이다. 이휘창의 동생 이휘영은 46년 내가 유항림과 함께 3·8선을 넘어올 때 데리고 왔다. 이휘영은 서울에서 불어강습소를 열었고, 뒤에 서울대 불어 교수가 되어 한국 불어불문학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평양 종로보통학교 동창생 이휘창(뒷줄 맨왼쪽)은 1945년 초겨울 평양 수옥리 김병기의 집에서 열린 폴 발레리 추모식에서 ‘해변의 묘지’를 암송할 정도로 불어에 유창했다.
그는 ‘불한사전’도 만들고, 많은 불어 학자들을 양성했다. 이휘영의 부인은 노래를 잘 부르는 소프라노 가수이면서 미모가 뛰어났다. 그 부인도 나와 같은 ‘청풍 김씨’다. 내가 평양에 있을 땐 예술인들이 우리 집에 자주 모였다. 2층짜리 양옥에서 음악회도 열고, 시 낭송회도 열었다. 이휘영의 부인 소프라노 역시 우리 집 모임에 자주 왔다. 일제 말기 45년 여름 폴 발레리가 죽었다. 김일성이 들어온 이후 그해 초겨울에 우리 집에서 발레리 추도식을 했다. 사회 체제는 바뀌어도 예술인들의 낭만은 바뀔 수 없었다. 발레리 추도식에서 이휘창은 ‘해변의 묘지’를 불어로 암송했다. ‘바람이 일어선다. 살아야겠다.’”
평양 예술인들의 보금자리 같았던 김병기의 집은 보기 드문 신축 양옥이었다. 그가 유학한 도쿄의 문화학원 교장이었던 니시무라 이사쿠(이삭)는 마침 미국 유학파 건축가였다. 김병기는 41년 니시무라의 건축 책을 참조해서 ‘더치 콜로니얼’ 양식의 집을 직접 설계했다. 원래 그의 본가는 대대로 중성동 사거리에 살았다. 39년 결혼하고 분가를 위해 수옥리 언덕 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더치 콜로니얼 건축은 지붕을 한번 꺾어 멋을 부린 것이었다. 하지만 지붕 길이가 짧아 소나기나 직사광선을 피할 수 없어 한반도 기후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살면서 뒤늦게 알았다. 특히 이 양옥의 벽난로를 낙랑시대 전돌로 장식했다. 골동상에서 낙랑시대 벽돌 100개를 사다 꾸몄는데, 뒤에 생각하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다만 이 양옥이 전란 때 폭격을 면했다면, 낙랑 유물을 보존한 집으로 전화위복됐을지도 모르겠다.”
구술·집필 윤범모/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