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신문 방송 인용

김병기 화백 한겨레 신문 연재 " 100살 생일날의 깨침 "이제 그림을 알 것 같다"

정종배 2017. 3. 13. 19:26

100살 생일날의 깨침 “이제 그림을 알 것 같다”

등록 :2017-01-05 00:27수정 :2017-02-09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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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① 백년 동안 일어나는 바람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0번째 주인공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101살 현역 화가 김병기 화백이다.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일제강점기 도쿄 유학,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 남북한 문화계, 65~86년 미국 뉴욕 칩거, 49년 만의 귀국과 100살 신작 전시회 등등 20세기를 관통하는 예술역정을 걸어왔다. 그는 타고난 체력과 놀라운 기억력으로 국내외를 오가며 체득한 미학과 수많은 예술인들의 비화를 생생히 들려준다.

‘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한세기를 그리다’편 집필은 미술평론가 윤범모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이 맡는다. 1985년 뉴욕에서부터 김 화백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그는 지난 30년간 꾸준히 구술녹취를 해왔다.(제목 ‘한세기를 그리다’는 김병기 화백 친필, 커리커쳐는 박재동 화백 작품이다)

2016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부산시립미술관은 잇따라 이중섭 회고전을 개최했다. 전시 제목은 <백년의 신화>였다. 백년의 신화, 정말 그랬다. 비록 대중적 눈높이에 맞췄다 해도 백년의 신화는 그럴듯한 말이다. 이중섭은 1916년 출생이다. 그러니까 탄생 100돌을 맞이한 해의 기념전시다. 그것도 신화적 존재로 각인된 화가의 추억 만들기 전시였다. 탄생 100돌, 하지만 불행이라는 단어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 바로 사망 60주기다. 이중섭이 이 땅에서 떠난 지 60년. 나는 한가위를 맞아 망우리 공동묘지에 갔다. 입구 부근에 이중섭 무덤이 있다. 누군가 그곳에 펼침막을 걸어 놓았다. ‘이중섭 탄생 100년, 사망 60년’, 가슴이 뭉클했다. 마흔살에 요절한 이중섭은 어느새 우리 곁에서 신화로 각인되어 있다.

2016년 마지막 날인 12월31일 서울 평창동 화실에서 이젤을 마주한 채 작품 구상을 하고 있는 김병기 화백. 101살 나이를 개의치 않는 그는 뜨거운 열정과 놀라운 체력으로 오늘의 삶과 예술을 그리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2016년 마지막 날인 12월31일 서울 평창동 화실에서 이젤을 마주한 채 작품 구상을 하고 있는 김병기 화백. 101살 나이를 개의치 않는 그는 뜨거운 열정과 놀라운 체력으로 오늘의 삶과 예술을 그리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지난해 4월,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는 특이한 전시가 열렸다. <백세청풍>(百世淸風), 백년 동안의 맑은 바람을 모은 회고전이었다. 주인공은 바로 만 100살의 현역 화가 김병기(金秉麒) 화백이었다. 백세청풍이라는 말이 전혀 이색적이지 않고 또 수식어 같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였다. 전시의 부제는 ‘바람이 일어나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에서 알려진 번역 문장은 ‘바람이 분다’이다. 하지만 화백의 고향인 평양식으로 번역하면 ‘바람이 일어나다’이다. 좀더 역동적인 표현이다. 바로 고구려적인 기상이 엿보이는 마음씨이다. 백년 동안의 바람, 그것은 항상 일어서고 있었다. 그나저나 만 100살에 신작으로 개인전을 여는 화가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일찍이 ‘100살 현역 화가’라는 용어조차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친 김찬영 ‘1세대 근대 서양화가’
평양 보통학교 짝꿍 이중섭 평생지기
지난해 신작으로 ‘백세청풍’ 전시
“사전에도 없는 백살현역” 큰 반향

1930년대 일본 문화계 흐름 ‘호흡’
해방 전후 남북 오가며 화단 주역
49살때 교수·명성 접고 미국으로
49년만인 2014년 귀국해 신작 발표

1985년 뉴욕서 필자와 우연히 만나
20년만에 국내 문화계 복귀 ‘인연’
“4~5시간 즉석 강의 노익장 여전”

이상·이쾌대·안막·김환기…비화 ‘생생’
30년간 구술 그대로 ‘문화사 한세기’
“새 문명문화 한국에서 나올 때다”

1929년 평양 종로보통학교 3조 졸업 기념사진. 셋째줄 맨 오른쪽 흰색 원안이 이중섭, 그 왼쪽 옆이 김병기 화백이다. 그는 사진 속에서 담임 최도환 교사를 비롯 몇몇 동기들 이름을 기억해냈다.
1929년 평양 종로보통학교 3조 졸업 기념사진. 셋째줄 맨 오른쪽 흰색 원안이 이중섭, 그 왼쪽 옆이 김병기 화백이다. 그는 사진 속에서 담임 최도환 교사를 비롯 몇몇 동기들 이름을 기억해냈다.

김병기와 이중섭은 모두 1916년생 동갑내기다. 두 화가는 평양 종로보통학교 짝꿍으로 평생지기였다. 6년 내내 같은 반에서 우정과 예술의 꿈을 키웠다. 김 화백의 부친 김찬영은 1910년대에 도쿄미술학교 졸업생으로 ‘근대 서양화가 선구자’ 대열에 올랐다. 그러니까 동시대 평양 출신 유화가 김관호와 더불어 근대 화단에서 혜성처럼 빛났다. 유년 시절의 이중섭은 김병기의 집에 놀러 다니면서 김찬영이 수집해놓은 미술잡지나 미술도구 등을 보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이들은 1930년대 도쿄의 문화학원에서 다시 만나 미술학교 동창생으로 인연을 이었다. 자유분방한 학풍의 문화학원은 두 작가의 예술가적 성격을 자아내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조국의 분단과 전쟁은 이들의 운명을 요동치게 했다. 피난지에서 굶주림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붓을 들어야 했던 이중섭. 그는 끝내 요절로 생애를 마감하고 대신 신화를 얻었다. 반면 김병기는 미술계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다 1965년 홀연히 미국으로 잠적(?)했다. 교수직과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버리고 화업을 위해 단신 도미행을 선택한 것이다. 49살의 국외 이주라는 도전, 그리고 49년 만에 귀국했다.

지난해 4월10일, 김 화백의 100살 생일날 나는 화백에게 물었다. “100살을 맞는 기분이 어떠세요?” 화백의 대답은 의외로, 아니 당연하다는 듯, “100살 먹으니 이제 그림이 뭔지 알 것 같아.” 네? 나는 경악, 바로 경악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100살 현역 화가로는 전례도 없거니와, 거기다 100살에 그림이 뭔지 알겠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화백은 이제부터 더 좋은 그림을 그려 내년에도 전시를 열고 싶다고 의욕을 다졌다. 물론 나는 매년 계속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노익장은 현실이었다.

바람이 일어나다. 2016년. 백세청풍전.
바람이 일어나다. 2016년. 백세청풍전.
하기야 <백세청풍>에 출품한 작품 ‘바람이 일어서다’를 보면, 붉은색 바탕에 검은 흑선이 들고 일어서는 형태 즉 기운생동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어떤 용암 같은 것, 바로 100살 현역 화가의 작품 속에서 살아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그림이 살아 꿈틀거릴 수 있을까. 넘치는 에너지는 바로 고구려 기상의 조형적 발현일 것이다. 그래서 ‘바람이 분다’가 아니라 ‘바람이 일어서다’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바람은 일어서야 보다 역동적이면서 생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세운다.

김 화백의 평창동 처소에는 노령임에도 약봉지 하나가 없다. 청력과 관절에 약간의 불편은 있을지 몰라도 체력은 정정한 편이다. 아침이면 홀로 커피와 토스트를 챙겨 들고, 즐기는 평양냉면 식당에도 종종 다닌다. 이 대목에서 건강 비결 운운은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작가의식이라는 열쇳말 하나만 먼저 던지고 싶다. 작가에게 창작 의욕 이상의 보약이 어디에 있겠는가. 화백과 대좌하면 으레 특강 듣는 자세의 장기전을 각오해야 한다. 한번 말문을 열면 4시간 이상은 기본이다. 우렁찬 목소리의 열변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듬뿍 안게 한다. 장시간 동안 논리 정연한 미술론은 국내 어디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글자 그대로의 ‘특강’이다. 한때 미술비평가 활동도 했지만, 그의 예술론은 동서고금을 넘나들면서 하해와 같은 언변으로 이어진다. 특히 그의 탁월한 기억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반세기도 넘게 지난 일을 마치 엊그제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그만 입을 다물게 한다.

1985년 미국 뉴욕주 새러토가에 있던 자택 거실에서 함께한 김병기(오른쪽) 화백과 필자 윤범모(왼쪽) 평론가. 칩거하고 있던 김 화백을 20년 만에 ‘발견’한 순간이다.
1985년 미국 뉴욕주 새러토가에 있던 자택 거실에서 함께한 김병기(오른쪽) 화백과 필자 윤범모(왼쪽) 평론가. 칩거하고 있던 김 화백을 20년 만에 ‘발견’한 순간이다.
기억력뿐만이 아니다. 김 화백의 과거 활동 내용은 한마디로 점입가경이다. 1930년대 도쿄 유학생 시절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부터 일본 예술계,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평양과 서울 풍경,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 시기의 극적인 활동들은 우리 문화예술사의 공백기를 채워줄 만하다. 해방 직후 평양의 민족지도자 조만식 등의 밀서를 품고 서울을 방문한 일화, 평양에서 북조선미술동맹 서기장을 비롯해 문화예술계의 핵심으로 활동한 사실, 평양 입성 직후의 김일성과 대좌한 경험, 월남 뒤 반공문화 전선에서의 활동, 전쟁 기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종군화가단으로 활약, 장인이자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동원 의원의 기억, 그리고 1950년대 이후 서울대 교수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미술계의 중심부에서 활동…, 김 화백의 증언은 현대 한국 미술사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화백은 우선 1920년대 평양의 미술단체 삭성회와 김관호-김찬영의 활동상을 육성으로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산증인이다. 그뿐만 아니라 도쿄 시절 자신의 하숙집에서 시인 이상을 재워주고 훗날 시인의 장례식까지 거둔 일화, 민족의 대표 시인 백석과의 만남, 소설가 김동인·황순원·김사랑·안막 등과의 추억…, 화백의 증언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미술계 내부로 오면 월남작가와 월북작가 양쪽을 다 헤아리면서 그들과의 우정을 지니고 있다. 6·25 전쟁 속에서도 이데올로기보다 우정을 선택했던 ‘북조선동맹’ 문학수와의 관계, 길진섭·김만형·이쾌대 등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에 대한 추억, 무슨 장편소설처럼 이야기가 끝없이 펼쳐졌다. 김환기·유영국·장욱진 등 서울 화가들과의 우정도 넘치고 넘친다. 특히 김환기와의 ‘특수관계’는 많은 일화를 남겨, 뉴욕에서의 김환기 장례식에서 화백은 추도사를 할 정도였다. 특히 인상적인 증언은 전쟁 때 평양 후퇴 사건이었다. 폭격으로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김 화백의 제안으로 잇게 하고 피난민을 남하시켰다니, 거기에 소설가 선우휘와 시인 이용상도 동참해 이룬 쾌거는 한국전쟁사의 비화이기도 했다.

김 화백의 도미 이전 그림은 추상회화였지만, 도미 이후는 오히려 구상성을 존중하여 다른 화가들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추상을 통과한 이후의 구상성을 지닌 화풍, 그러면서 설화성을 중요시하는 미술세계를 선호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화백의 지향점은 행동적 휴머니스트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나는 김 화백과 1985년 뉴욕주 새러토가 소재의 자택을 방문하면서 가깝게 되었다. 화백의 인생 역정은 살아 있는 역사였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가량을 화백의 집에 머물면서 일대기를 녹음했다. 환희의 순간이었다. 이런 인연은 화백의 20년 미국 칩거 생활에 하나의 전환점을 제공하여 서울 화단 재입성으로 연결되었다. 나의 주선에 의해 20년 만의 귀국 개인전을 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백은 지금도 나를 보고 즐겨 말한다. ‘나를 발견한 범모씨’, 화백은 이국땅에서 잊혀 가던 자신을 ‘발견’하여 서울 화단과 연결시키고, 본격적으로 화필을 들게 했다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발견!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더 지나갔다. 어느덧 노화가는 1세기를 통과한 현역 화가로 세계 예술사에서 보기 드문 창작 생활을 하고 있다. 만 100살에 다시 듣는 생애사, 그것은 살아 있는 우리 문화예술계의 역사였고, 감동의 현장이었다.

화백은 분단조국의 현실을 매우 가슴 아파한다. 실향민으로서 고향 평양에 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남북 대치상황을 너무 아파한다. 그래도 한국의 미래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의 현실 진단은 매섭기도 하고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한국, 중국, 일본. 그 패턴을 우리가 세계화해서 재조명해야 한다. 과거는 문명이 대륙에서 왔다. 중국을 거쳐 왔다. 근래는 바다를 거쳐서 왔다. 그게 일본이다. 오늘의 문명문화는 한국에서 나올 때가 됐다. 한국

이 중심이다. 대륙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바다로 오는 것도 지났다. 하늘에서 오고 있다. 인터넷, 디지털 시대가 아닌가. 한반도의 남북문제가 세계의 중심이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다. 한국 사람들은 잘하고 있다. 특히 여자들이 잘하고 있다. 골프만 잘 치는 게 아니다. 제일 예쁘다. 한국 사람이 세계 누구보다 똑똑하다. 이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된다. 이 패턴을 새로운 각도, 옛날식이 아닌 21세기의 각도에서 비춰야 할 시기에 와 있다. 새로운 미학을 가지고 재조명해야 한다, 우리의 유산을. 이것이 제일 중요한 시대적 과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77424.html#csidx167d3e322a29c8e87ec6dfe2703e83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