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산남 채동선 작곡가

정종배 2022. 2. 3. 18:18

보성 벌교 부용산 산자락 채동선 묘역

 

망우리공원 인물열전 작곡가 산남 채동선
 
정지용 시 <고향> 김영랑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작곡가 현악4중주단 민요채록
산남(山南) 채동선(蔡東鮮, 1901~1953.2.2.) 69주기
 
채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벌교2리 세망마을에서 만석꾼 부호인 아버지 채중현(蔡重鉉)과 어머니 성주 배씨 배홍심(裵弘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강으로 종교는 기독교(장로교)이다. 채동선은 때로는 등하교를 머슴과 걷거나 업어서 하였다고 소문난 순천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3.1혁명 참가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채동선은 와세다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해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공부했다. 산남은 1924년 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 베를린 슈테르헨 음악학교에서 리하르트 하르체(Richard Harchet)에게서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Wilhelm Klatte)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산남은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4회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 1932년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1933년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였는데 그의 동생인 소프라노 채선엽의 독창회에서 처음 발표되어 도쿄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1937년 작곡발표회를 열고 작곡집도 펴냈다.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발전을 위해 활동을 했다.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창작곡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했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육자배기〉·〈춘향가〉 등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새야새야〉·〈뱃노래〉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1930년대 당시 한국 악단은 홍난파 현제명 피아노의 박경호 성악가 안기영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채동선은 이들과 함께 어울렸다기보다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1940년대에 접어들어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채동선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한 채 농사꾼으로 변신한다. 일제에 대해 협력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국 사람은 농촌을 알아야 한다며 새벽마다 밀짚모자에 고무신을 신고 성북동 집에서 농장이 있는 수유리까지 10여 리를 걸어 다니며 양과 닭을 키우고 튤립 등 고급화초와 관상 묘목을 키우는 등 농사를 짓고 저녁 무렵 귀가했다. 복장도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그 점은 정지용도 비슷했다.
 
산남은 일본의 착취와 폭력은 지속되는 현실에 대하여 매우 분해했고 안타까워했다. 산남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동료 음악가들과 사이가 우호적이지 못하였다. 이는 친일 행위와 연관성이 있다. 채동선이 일제강점기 시절 다른 음악가들과 다르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홍난파 등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노래 가사 및 노래 작곡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과 달리 끝까지 친일 운동을 거부하였던 채동선은 광복까지 창씨개명과 친일 노래 작곡을 거부하였다. 해방 이후에 그는 이념적 성향으로 인해 다시 한번 동료 음악가들과 마찰이 있었다.
 
8·15해방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여 협회장과 작곡가 협회장에 취임했고 문필가협회 부사장, 국립국악원 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으며, 고려합창협회를 조직하여 합창 지휘도 했다.
「고향」은 정지용 시인이 1932년 지은 시에 산남이 1933년에 작곡했다. 정지용 월북으로 1950년대 이후 가곡 <고향>의 가사 사용이 금지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부인 이소란 여사가 피난 갈 때 서울 성북동집 마당에 묻어둔 악보 등을 1963년에 찾아내면서 작곡가 채동선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소란 여사는 악보를 찾아낸 후 『채동선 가곡집』을 출간하고자 했으나 당시 월북작가로 낙인찍힌 정지용의 시로 된 가사는 쓸 수가 없었다. 1953년에 쓴 박화목 시 「망향」과 채동선과 가깝게 지낸 이은상 시 「그리워」를 같은 곡에 붙여 불렀던 까닭에, 한 곡이 세 개 가곡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8년 월북문인 해금에 따라 정지용 문학작품에 대한 규제도 풀리면서, 1980년 출간된 『채동선가곡집』 중 <고향>이 대표작으로 애창되고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8.15해방 후 한때 경기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2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1953년 2월 2일, 6.25한국전쟁의 종전을 알리는 포성이 한창일 무렵, 채동선은 부산 피난 시절 막노동뿐 아니라 통조림을 팔기도 한 생활고로 병을 얻어 부산으로 피난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으나 영양실조에 급성복막염이 겹쳐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47년 먼저 잠든 아버지 채중현 묘지 아래 묻혔다. 묘지번호 204936이었다.
 
노래집으로 『채동선가곡집』(1964)이 있는데, <추억>·<동백꽃>·<그리워> 등 10곡으로 엮어져 있다. 1983년 '채동선기념사업회'가 그의 부인 이소란과 평론가 박용구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고 1984년 '채동선음악상'을 제정했다. 대표작으로 가곡 <고향>·〈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밖에 현악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모음곡, 교성곡 〈한강〉·진혼곡 〈조선〉·〈조국〉 등이 있다.
또한 <개천절> <한글날> <3.1절 노래> 등도 작곡했다
 
그는 순수한 가곡 작곡에 전력하였으나, 민족음악 문화 수립의 기저로서 민요 채보와 한국의 전통 음악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채동선의 작곡하여 발표한 가곡은 12곡이다. 그중 8곡이 정지용 시를 가사로 썼다. <고향>·<압천(鴨川)>·<다른 하늘>·<향수>·<산엣색시 들녘사내>·<또 하나의 다른 태양>·<바다>·<풍랑몽>의 8곡이다. 나머지 네 곡은 <그 창가에>(모윤숙)·<내 마음은>(김동명)·<모란>(김영랑)·<새벽별을 잊고>(김상용)이다.
김상용 김동명 김영랑 시인의 묘지는 망우리공원에 있다가 김동명 김영랑 시인은 이장했다. 올 7월 중랑구청에서 묘지관리권을 서울시에서 옮겨오면 두 시인의 묘지를 재이장하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힘을 쓰고 있다.
 
채동선의 묘지는 2012년 5월 2일 고향 전남 보성 벌교 채동선기념관 뒤 부용산 산자락으로 이장했다. 아버지 채중현 묘지는 먼저 이장했다. 채동선 묘지를 이장하며 음악평론가 한상우가 짓고, 이은상의 시 「그리워」가 가사로 새겨진 묘비까지 옮겨가 채동선음악당 뒤 부용산 자락에 새로 안장된 묘지 앞에 부인 이소란 여사까지 새겨넣어 세웠다. 현재 망우리공원에 남아 있는 채동선 일가의 묘지 터를 알려주는 직사각형 대리석에 새긴 조그마한 ‘채씨지묘’ 묘지 분양과 평수를 알려주는 안내석만 남아 있다. 망우리공원 문화예술인 묘역을 조성하면서 채동선 작곡 망우리 관련 시인들의 작시 노래공연과 상설 기념관에서 듣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채동선의 출생지인 벌교읍 벌교리 태백산맥 문학거리 끝자락에 생가와 그의 이름을 딴 도로인 채동선로, 2007년 12월 14일 세워진 채동선음악당 등이 있다.
채동선실내악단(단장 김정호)은 2021년 11월 23일 보성군 벌교읍 채동선음악당에서 보성 출신 민족음악가 채동선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민족음악제 <전람회의 그림, 무소르그스키를 만나다>를 성황리에 치렀다.
 
2019년 10월 28일 채동선이 1931년부터 말년까지 작곡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서울 성북동 옛집이 재개발하기 위하여 전격 철거되어 학계와 지인들이 “좀 더 빨리 보존조치 했어야”하면서 아쉬워하였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관여하며, 건물 보존 상황을 살펴본 윤인석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한국 근대 음악사의 소중한 산실이 역사적 가치를 살리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고 안타까워 하였다.
 
채동선은 비단 문화계를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족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산업개발을 촉진해야 된다는 이념 아래 계간지인 《민족문화》에 「지하자원개발론」이란 논문을 게재하여 일반인사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선생은 채동선과 교분이 두터워 죽기 전까지 채동선 기일 즈음에 맞춰 추모의 글을 신문에 게재하며 채동선 추모사업을 전개하였다.
 
산남의 여동생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며 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성악가인 채선엽 남편으로 매제인 최규남은 한국 최초 물리학 분야 전공 이학박사로 서울대학교 교수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동생인 채동규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장을 역임한 약학자이다.
 

1930년대 문화주택 채동선이 말년까지 살았던 성북동 가옥

망우리공원 채동선 가족묘지 안내석 분양 평수

2012년 이자하기 전 망우리공원 묘비

2012년 이장한 후 벌교 부용산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