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고혼(孤魂)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묘 및 합장비 유관순(柳寬順, 1902~1920) 102주기
지금도 망우역사문화공원을 공동묘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망우리, 왠지 으스스하고 음산한 분위기로 밝고 환한 마음으로 다가가기 쉽지 않다. 허나 그곳에 묻힌 유명인사를 알고 나면, 왜 그런 분이 공동묘지에 유택이 있지? 의문과 관심을 갖는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명시되어 있다.
3.1운동 하면 유관순 열사가 상징적 인물이다. 유관순 열사는 기독교 집안으로 부모님, 숙부, 이웃 아저씨들이 국채보상운동과 교육구국운동 등 항일민족운동을 하였다. 그 영향으로 의롭고 심지가 곧은 성격으로 당시 168Cm(5척 6촌)로 대단히 큰 키였다. 인물도 훤칠하며 씩씩하고 활달하며 뚝심도 남달랐다.
이화여자고등학교 발행 『이화백년사』에 - 유관순은 1916년 보통과에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하였다. ‘유관순 열사 어록’에 “나는 학교에서 청소를 해서라도 도움을 받은 것을 갚겠다.”는 말을 싣고 있다. 정동교회 손정도와 이필주 목사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유관순은 아우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일본군 헌병에 체포되어 병천 헌병주재소, 천안헌병대, 공주검사국 및 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갖은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해를 인수하여 수의를 입혔다.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혔다.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위패) 054에 봉안되어 있다.
이태원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지와 주택지 개발로, 3대 11명(독립유공자 서훈 9명)의 독립유공자 가족들이 삶에 쫓겨 관심을 두지 못하는 사이, 유관순 열사의 묘지가 무연고 묘로 소실되어(1935년에 추진하여 1936년 4월에 이장이 끝남) 이곳 망우역사문화공원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묘(묘비는 소화 11년, 1936년 12월) 안에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추석과 설 명절에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비와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앞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오세창, 한용운, 박희도 등 세 분의 유택은 남아있다. 나용환, 박동완, 이종일, 홍병기 등 네 분은 국립서울현충원에 1966년에 이장하여 안장하였다.
망우리공원 이태원묘지분묘무연고 28,000여명의 유해와 함께 이장되었으리라 추정하고 2018년 9월 유관순유족회, 기념사업회, 이화여고동창회 등 관련 단체에서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웠다.
2020년 9월 28일 순국 100주년이었다. 중랑구에서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묘를 새롭게 단장하여 코로라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엄숙한 추모식을 거행했다.
독립운동 명가인 유관순 가(家) 사람들의 독립운동 활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윤기(1845~1919) 유관순의 할아버지, 지령리교회 처음 교인으로 장남 유중권 내외가 일본군에게 학살된 것과 차남 유중무, 손자 유우석과 손녀 유관순이 투옥되는 아픔을 겪고, 두 달 보름 후에 별세하였다.
유빈기(1883~1927) 유관순의 7촌 할아버지(재종조)이자 유윤기의 사촌 동생. 지령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공주읍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됐다.
유중권(1863~1919) 유관순의 아버지. 아내 이소제와 함께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머리와 옆구리에 중상을 입고 지령리 집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 별세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소제(1875~1919) 유관순의 어머니, 4월 1일 당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중 일본군 헌병에게 학살되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유우석(1899~1968) 유관순의 오빠. 4월 1일 공주읍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의 총검에 자상을 당한 채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유중무(1875~1956) 유관순의 숙부. 지령리교회 최초 교인으로 전도사와 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천안헌병대와 공주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에도 끝까지 지령리교회를 지켰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서훈하였다.
유예도(1896~1989) 유관순의 사촌언니,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도피하여 홍성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서훈하였다.
노마리아(1898~1982) 유관순의 사촌 올케, 남편 유경석이 유관순과 유예도를 도피시키고 있는 동안 유중권을 간호했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 유윤기, 어린아들 유제경과 함께 집을 지키면서 일본 헌병의 온갖 횡포를 감수해야 했다. 노마리아는 1947년 경찰간부(경위)로 경찰에 입문했다. 1949년에는 경감으로 승진해 대구여자경찰서장을 맡아 1953년까지 경찰로 재직했다
유제경(1917~2012) 유관순의 5촌 조카이자 유중무의 장손, 1919년 4월 1일 이후 어머니 노마리아와 함께 지령리 집에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시무하던 중 1941년 7월 체포되어 고등법원에서 신사참배 반대와 소위 불경죄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중국 해남도에서 노역으로 형기를 마쳤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서훈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면 / 유관순 누나를 생각 합니다 /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 <유관순 노래> -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하면서 부르는 이 노랫말을 지은 분은 강소천 아동문학가이다. 강소천 유택은 망우리고개를 사이에 두고, 이태원묘지무연분묘 및 합장비와 마주하고 있다.
이화여고 1학년 유점선·노예달·신특실·유관순·서명학·김분옥 등은 3.1운동 전날 6인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중에 한 분인 김분옥 여사 묘역을 망우리공원 안에서 그 소재를 확인했다. 6인 중 유점선·노예달·신특실·유관순 네 분은 국가에서 독립운동가로 인정하여 서훈을 추서했다. 서울특별시 우리 동네 3.1만세운동 참여자 명단에 김분옥(남대문역전 시위, 3월 5일, 독립운동사 2권 1부(편) 1장 2절)이 수록되었다.
유관순 열사의 유해를 찾지 못해 망우리공원 이태원묘지무연고분묘합장비에 함께 있으리라는 추정하여 추모의 열기가 뜨겁다. 이렇게나마 추모하는 분위기도 독립운동에 힘쓴 순국선열들께 조금이나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답사하고 ‘망우인문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도록 힘을 보태겠다.
한편, ‘유관순 영웅화’에 대한 성찰의 계기도 함께 하길 바란다. 유관순은 3.1혁명의 상징이며 ‘한국의 잔 다르크’로 내세우는 인물이다.
그런데 유관순은 정작 3.1혁명 당시와 해방 직후에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미군정하 국정교과서에 수록하며 몇몇 친일 인사와 이화여대 및 기독교의 주도로 기념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일제에 의해 토막 살해당했다는 등의 ‘유관순 신화’도 영화를 촬영하며 만든 이야기이다. 3.1혁명 시위 현장에서 순국한 분이 7,500여 명이다. 유관순의 부모님도 시위하다 순국했다. 유관순은 1년 후 옥사하였다. 옥사한 유관순을 대한민국장 서훈도 ‘유관순 영웅화’ 만들기 일환으로, 오히려 역사적 평가 작업을 가로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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