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정서 일번지 민족시인 김영랑 72주기
영랑 김윤식은 1902년 12월 18일(음력) 강진읍 남성리 탑골 221번지에서 부 김종호와 모 김경무 사이에 2남 3녀 장남으로 태어났다. 5세에 부친 권유로 북산골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시작하였다. 1911년 강진보통학교를 입학해 1915년 4회로 졸업했다. 1916년 모친의 경제적인 배려로 상경하여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또한, 강진읍 도원리 김첨사의 딸로 두 살 위인 김은하와 결혼했다.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해, 문예반 활동하며 안석영·홍사용·박종화·정지용·이선근·이태준·이승만(화가) 등과 사귀었다. 1918년 16세 때 첫째 부인과 사별했다. 영랑의 집안 조카인 김현구 시인이 애도시 「M부인의 추억」과 「M부인에게」 등 두 편을 썼다. 해남군 계곡면 선산 맨 아래 아담한 묘지에 잠들어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기록된 영랑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은 다음과 같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강진면 남성리 자택에서 김현상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을 비롯해 김성수 등과 함께 현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며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 자리에서 각자 2원씩을 갹출하고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24일 이들은 따로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김안식을 만나 함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태극기 제작과 「선언서」 등사 등을 준비했으나 25일 전까지 목표한 태극기 개수를 다 만들지 못하고 등사판 입수도 어려워져서 결국 다음 장날인 3월 30일로 거사 계획을 연기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를 제기하였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를 언도받았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다. 6월 9일 서울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독(毒)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를 발표하여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3.1혁명이 지난 뒤 영랑은 김현구·노안·차부진 등과 동인집 《청구》를 간행했다. 1920년 일본 동경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송정리 출신인 용아 박용철과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1921년 일시 귀국해 성악공부를 하려다가 부친의 완강한 만류로 포기했다. 1922년 청산학원 영문과로 전과했다. 박열과 하숙을 함께하며 민족의식을 북돋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귀국 후 학업을 중단했다.
파인 김동환 시인이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이재민 수용소에서 만난 남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려, 1925년 12월 25일에 출간한 장편 서사시 『승천하는 청춘』을 파인의 딸인 김채원 작가가 인사동 ‘화봉문고’ 전시장에서 낭독했다. 김영랑 시인의 막내딸인 김애란 여사가 영랑의 시 「毒을 차고」를 낭독하는 모습을 오충공 감독이 영상에 담았다. 오감독은 관동대지진 관련 세 번째 작품 <1923년 제노사이드 - 93년의 침묵>을 제작하고 있다. 안동 예안 원촌 육우당 시인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도 인터뷰를 허락받았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간토대진재 혼란에서 우리 민족이 무고하게 당한 참상을 경험하고 한국인들은 대부분 귀국했다. 일본의 경찰과 군인 및 자경단의 제노사이드로 인해, 한국인들의 분노를 수습하기 위해 간토대진재 이후 2년 동안 유학생과 한국인을 전면 일본 입국을 통제하였다. 당시 동경 유학생 400여명은 대부분 희생당하지 않았고, 노동자와 하층민들은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희생자는 임시정부 독립신문 집계 6661명에서 많게는 2만 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묻힌 송석하 선생은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해 경제학에서 민속학, 최신복은 아동문학, 조봉암은 독립운동, 김영랑은 저항시, 김상용은 민족과 허무와 죽음의 시, 유상규는 대중 의료보건, 장형두는 식물분류학에서 일본인 학자와 맞선 거의 유일한 조선 식물학자로, 오기선 당시 동경 한인교회 목사로 목숨건 구조 및 구호 활동을 하였다.
방정환은 조사반원 및 후원금 전달, 나운규는 영화, 계용묵은 소설로.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기 등은 관동대지진 직간접 관련을 맺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공헌했습니다
시와 소설 수필 등으로 간토제노사이드 관련 작품으로 남긴 작가는 김소월, 김동환, 이상화, 김영랑, 박용철, 이육사, 이기영, 염상섭, 유진오, 이상, 설정식, 허남기 등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지식인들은 민족적 참상을 일제 검열로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나마 파인 김동환 「승천하는 청춘」, 이기영 「두만강」·「고난을 뚫고」, 유진오의 「귀향」 등에서 실제 목격한 도쿄 현장 참혹한 상황을 다루었다. 당시 일제 감시와 탄압 때문에, 이를테면 관동대지진 문학으로 꼽을 만한 작품 수효가 많지 않다. 그래도 다수를 점한 것이 시 갈래이다. 이상화 「독백」, 김소월 「車와 船」은 대화체 발화법을 채택함으로써 그 파멸적 사건의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적인 경지를 보였다. 관동대지진 이후 국내로 들어온 유명 문인과 인물은
김소월, 김동환, 이상화, 이육사, 한설야, 이기영, 채만식, 박용철, 양주동, 이장희, 유엽, 함석헌, 안창남, 임영신, 박열, 김소운, 허남기, 한승인, 유치진, 유치환, 유치상, 3형제. 박길룡, 윤극영, 최승만, 변희용, 박사직, 이여성, 박순천, 김약수, 지정선, 황신덕, 한위건, 김영랑, 유상규, 송석하, 오기선, 윤세주, 조봉암, 최신복, 장형두 등이고
참상을 목격하고 본인이 그곳 현장에 있다고 고백하고 드러낸 분은 드물었다. 그만큼 당시 일제가 참상을 폭로하면 안된다는 각서와 매년 요시찰 및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하였다. 함석헌 선생도 말년에야 본인이 그곳에 있었다고 고백했다.
김소월은 지진 이후 한 달 동안 연락이 두절 되어 가족들이 죽었다고 포기했다. 시인 구상의 맏형님도 도쿄 유학 중 지진 이후 행방불명 됐다. 윤동주 시인 아버지도 당시 참상을 목격하고 명동촌에 무사하다는 전보를 보내고 급히 귀국했다. 김상용 시인도 릿쿄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김소월은 귀국 후 허무와 절망에 빠져 있다. 소월은 1924~5년 사이에 「나무리벌 노래」·「옷과 밥과 자유」·「밭고랑 위에서」·「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을 대일 땅이 있었다면」 등 이전과 다른 저항시를 발표했다.
김소월의 「초혼」,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영랑과 이육사의 저항시 뿌리에는 관동대지진 참상을 목격한 민족애가 표출되었다고 주장하며, 전남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였던 고영자 평론가는 2004년 평론집 『바로잡는 국문학』을 탱자출판사에서 간행했다.
영랑은 친구인 최승일 동생인 숙명여중 2학년 최승희(무용가)와 사랑은 양가 어른들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최승희와 사랑에 실패하고, 영랑이 강진 집에 내려와 목을 매 자살소동을 편 동백나무가 안채 옆에 지금도 정정하게 서 있다. 1925년 영랑은 1906년 6월 29일 출생인 개성 호수돈여고를 졸업한 안귀련과 개성에서 결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5남 2녀 얻었다. 또한, 영랑은 시앗을 봐 셋째 아들과 동갑인 딸을 두었다.
1929년 10월 22일 영랑은 용아와 상경했다. 25일 임성빈·이승만과 함께 정지용을 만나 잡지 《시문학》 창간의 동의를 받았다. 1930년 3월 박용철과 함께 《詩文學》지를 창간하며 시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등 13편을 발표했다. 1931년 12월 9일 《中央日報》에 용아 박용철이 영랑의 작품을 최초로 평하였다. 1932년 11월 5일 용아 박용철에 의해 초간본 『永郎詩集』(詩文學社) 발간했다. 1936년 5월 12일 오후 6시 서울 명월관에서 약 20명 친우들이 모여 『永郎詩集』출판기념회를 가졌다. 1938년 5월 12일 친우 용아 박용철이 사망했다.
임종국은 1966년 『친일문학론』에서 일제강점기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 ‘《폐허》파’에서 번영로·오상순·황석우, 조선어학회에 관계하면서 시와 수필을 쓴 이병기·이희승, 젊은 층으로 조지훈·박목월·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과 박남수·이한직 등 《문장》 출신, 제일 먼저 붓을 꺾었다는 홍로작과 김영랑·이육사·한흑구 이들은 친일 문장을 현재 조사한 범위 내에서 단 한편도 발견하지 못했다.
1945년 8.15 해방되어 대한독립촉성회 강진군 단장을 역임했다. 1946년 4월 4일 하오 1시부터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청년문학가’ 결성대회에서 박종화·변영로·정지용·김광섭 등과 함께 <추재>로 뽑혔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출마자 4명 중 7,405표를 얻어 최하위로 낙선했다. 자가용을 타고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민심을 잃었다고 알려졌다. 9월말 외손이 되는 양병일(강진 국회의원 2,5대 역임)의 모친에게 생가를 물려 준 뒤, 가족이 서울 성동구 신당동 290의 74호 양식 단층집으로 이사하였다.
10월 20일 영랑은 박종화·이헌구·정비석·김송·고영환·사진기자 2명 등 10여명과 함께 여·순항쟁 문인조사반으로 현지답사에 참여했다. 영랑은 「새벽의 처형장」·「절망」 등 두 편의 시를 《동아일보》에 실었다. 1949년 8월부터 1950년 4월까지 약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 재임하였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책상을 뒤집고 그만두었다고 알려졌다. 10월 25일 미당 서정주에 의해 『永郎詩選』(중앙문화사) 발간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시 제목이 없이 시집이 발간되었다. 11월 17일 하오 1시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식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초대됐다.
영랑이 이사한 신당동 집 가까이에 석영 안석주 작가가 살고 있었다. 석영과의 인연은 사후에도 끈끈하게 이어졌다. 석영이 1950년 2월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장례식 장소에서 휘문의숙 동창들이 모여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물었다. 영랑이 불쑥 “나네” 라고 대답했다.
6.25전쟁 6월 26일 평론가 이헌구와 약속이 어긋나 집을 나섰다. 인민군들이 27일 집을 덮쳐 식구들을 감시했지만, 소홀한 틈을 이용해 도망쳤다. 명륜동 친척 집 지하 방공호에 숨어 있다. 9.28수복 전날 아이를 안은 아주머니한테 자리를 양보하고 나와 잠시 쉬는 사이 파편을 맞고, 수복 다음 날인 9월 29일 오전 1시 사망했다. 장충사 뒤 군사도로 아래에 가매장을 하였다. 4년 후 문예총 김광섭 시인 주도하여 망우리공동묘지 석영 유택 옆에 이장했다.
1954년 11월 14일 경향신문에 김광섭 시인이 ‘영랑 김윤식 형을 추모함 – 그의 이장에 제하여’란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다. “(생략) 오는 십사일 시외 망우리 고 석영 안석주 형이 누운 옆에 영랑 형이 자리를 잡게 되어 모란의 시인 비석 뒷면에 모란 시 한 절을 새겨지게 되었다. 이와 별도로 과거 30년간 화단으로부터 연극영화 소설 각 방면에 공헌하여 이채를 날린 고 석영 안석주 형의 묘전에 친지 몇 분의 정성으로 평소에 즐기던 「바다로 가자」의 시 일절을 뒷면에 새긴 비가 서게 된 것을 이날 또한 뜻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경건한 형성을 사랑하는 인간의 지순한 노력에 의하여 다시 형성된 것이 문화라면 그것을 이루어 인류의 마음에 새기는 사람 그가 가는 것을 산천과 세월에 맡긴다하더라도 그를 지키고 그에게 하나의 표석을 세워줌이 또한 문화의 마음일진대 앞으로 이 나라의 저명한 문인 학자 예술가의 공동한 묘지가 설정되기를 바라며 이번 문인 제씨의 노력으로 빈한에 휩쓸려 자녀취학의 난에 처한 영랑 유가에 일등의 도움이라도 있게 된 것을 유명을 위로 삼아 끝으로 이에 부기해 두고자 한다.”
연합신문 1945년 11월 21일자 영랑 시인 이장 특집으로 영랑의 유시 「북」과 김광섭·박진·설창수씨의 추모사, 영랑묘 이장 경과보고 등을 집중적으로 싣고 있다. 11월 14일 상오 11시 시내 장충사에서 고 영랑 김윤식 묘지 이장식을 거행한 후 망우리 묘지로 이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영량묘 이장식 순서 (사회 이하윤) 묵념, 식사 이헌구, 경과보고 양기량, 유시 「모란이 피기까지」 낭독 이한직, 애사 김광섭, 추모사 모윤숙·오종식·안종화·설창수, 유시 「북」 낭독 조애실, 영창 김소희, 참석자 분향, 유가족 인사.
1970년 광주 공원에 박용철과 함께 시비가 세워졌다. 1975년 7월 12일 강진 군립도서관 내에 시비를 세웠다. 1979년 4월 11 강진군 군동면 호계리 영남 로타리에 영남 동상건립 착공하고, 10월 20일 완공하여 11월 29일 제막식 거행했다. 1985년 12월 21일 영랑의 생가를 강진군에서 도비 지원으로 3천5백 5십만원에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1986년 2월 7일 영랑생가를 전남도 지정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9호로 지정했다.
망우리 영랑의 묘지는 부인 김귀련 여사가 사망하며 1990년 천주교 용인묘원으로 이장 합장했다. 묘비명에 김귀련에서 안귀련으로 새겼다. 어머니가 김씨와 재혼하며 안씨에서 김씨로 바뀌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지 터에 묘비를 묻고 갔다. 그 묘비를 찾기 위해 자료를 뒤적였다. 김애란 여사와 연락이 닿아 2015년 망우리공원 영랑 시인의 묘지 터를 찾기로 나섰다. 은사인 시인 함동선 선생님도 함께했다. 함동선 시인은 박인환 시인 묘지 학생들과 답사 때, 영랑 시인 묘지를 찾아 참배한 기억을 되짚었다. 박인환 시인 묘지를 기준하여 13시 방향 50m 근처를 찍어 주었다.
국가보훈처에서 영랑을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겠다고 하여 유족들이 서명을 마쳤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 살고 있는 셋째 아들 김현철 칼럼리스트가 필자한테 장문의 메일이 왔다. 메일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ㅡ옛 묘비는 묻힌 것을 발굴해 세우면 되지만 유가족들은 국내 항일시 중 최고의 항일시로 꼽히는 「독을 차고」 중 맨 끝단 두 줄 “...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마금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를 새긴 독립된 시비 하나를 추가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ㅡ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다시 모실 수 있다면 현충원에 가는 걸 포기하겠다고 하여 중랑구청 관계들과 협의하였다. 서울시 망우역사문화공원 관련 조례를 바꾸어 다시 모실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유족들이 현충원에 모실 것을 포기하고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모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결정했다. 초허 김동명 시인 후손들도 다시 오실 수 있다고 말씀했다.
이태원공동묘지에서 미아리공동묘지로 이장한 뒤 실전된 시인 이상, 소설가 나도향도 초혼장으로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모셨으면 좋겠다. 파주 청아공원에 계시는 <우리의 소원>의 작사한 안석영 선생의 재 이장과 그곳의 꽃밭에 옮겨놓은 석영의 묘비(뒷면에 영랑의 시 「바다로 가자」의 한 행이 새겨져 있음)를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다시 세우길 빌어본다. 이중섭 화백 유택 옆에 시인 구상과 조각가 차근호 유택을 이장하거나 이중섭의 그림 <구상네 가족>·<황소>·그림엽서·은지화 등의 기념물을 설치하여 명실공히 문화예술인들의 묘역으로 거듭나, 세계적인 명소로 낙이망우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 길이 되길 기도한다.
2023년 9월 1일 간토대진재 100주기를 맞이하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표지비를 세워 구천을 떠도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주길 빌어본다
1954.11.14 석영 안석주 묘비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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