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1923년 9월 7일 초대 주불공사 한승인과 그의 친구 추담 허연

정종배 2023. 9. 6. 08:19

1923년 9월 7일 초대 주불공사 한승인

임정기 허연 한승인 3명은 집안이 가난하여
평양 순안 재림교회가 운영하는 의명학교 기숙사에서 도원결의 이상으로 생활했다

흥사단 단우로서 독립운동가인 초대 주불공사 한승인은
두 학생 생지옥의 실황을 목도한 최신 소식으로 동아일보에 실렸다

〇구사일생으로 동경을 탈출한 두 학생 생지옥의 실황을 목도한 최신 소식
참화의 지옥을 벗어나 2일에 맹화 중의 동경을 떠나 도보와 무료승차로 구사일생의 곤경 중 6일 아침 6시 경성역에 도착하는 급행차로 무사히 귀국한 학생 두 명이 있다 그들은(두 학생 사진 게재)

원적 평남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23 현주소 동경 경교구 남하야정 27 좌등방 명치대학생 한승인,

원적 원산부 두방리 47 현주 동경 경교구 하야치정 27 좌등방 동양대학생 이주성의 양 군인데

그들은 지진이 일어날 당시에 가장 위험한 경교구에 있었음으로 당시 이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였으며 화렴 중에 몸을 피하여 갖은 곤경을 겪고 돌아왔는데 그들은 조선사람으로서 처음 귀국한 사람이라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만한 소식이 많기로 그 대강을 보도하는 바이다 – 동아일보 1923. 9. 7

피난길에서 한승인은 이 지진의 여파로
재일조선인 7천여 명이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승인은 9월 6일 서울에 도착해 이 같은 일본의 만행을
1923년 9월 7일 자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만천하에 폭로하였으나
조선인 대학살의 참상은 기사로 발표되지 못했다

마침 이 기사를 읽었던 인촌 김성수(친일, 교육학술)는
한승인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미국으로 유학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2공화국 주불 공사 역임하였다.
5·16 이후 도미하여 가발사업 성공하고 민주화운동 반유신 운동을 펼쳤다
1973년 《기러기》 10월~11호에 「일본 관동대지진 조난기」란 제목으로
그때 일을 회고하면서 연속 기고하였다
1983년에는 그가 청년 시절에 경험했던 끔찍한 사건을 회고하여
181페이지에 달하는 『동경지진 한인대학살』을 발간했다

동년배의 글로는 최학주의 『나의 일본 학살 현장 탈출기』와
김대업의 『불 속에서 구해주신 주의 종의 고백』 등이 있다

〇동아일보 초대 편집국장인 이상협 특파원을 일본유학생 대회에서 7일 밤 출발했다
〇경성부에서 의연금 모집 취지서를 발표하면서 조선인 대학살을 언급을 하지 않았다

1923년 9월 6일 수 날씨 청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여 새때쯤 하여 玄米밥 한 덩이로 요기를 마치고 終日 해를 넘겼다. 저녁을 요기하고는 우물가에가 沐浴을 하고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 진판옥 일기 중앙대학교 박경하 명예교수 제공

- 정종배 다큐시집 1923 관동대학살 -생존자의 증언

허연 선생은 일제에 의해 1년 2개월 감옥살이와 그 후유증으로 병고에 시달리다 1949년 53세에 운명하여
도산의 발치에 묻어달라 하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잠들어 계신다.
30년만에 다시 신청하였으나
올해도 서훈을 받지 못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독립운동으로  볼 수 없단다.

정부가 독립운동가를 찾아 서훈을 해야지 후손들이 자료를 찾아 입증해야하는 현 시스템을 바꿔야 되지 않을까?

그리고 망우역사문화공원 정춘산 유택으로 인한 얽힌 독립유공자 선정과정과 그 비화가 밝혀져
그동안 서훈 문제가 조금이나마 개선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