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1923년 9월 10, 11일 관동대학살 의연금 모집과 부산부두 귀국 동포 및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

정종배 2023. 9. 11. 05:03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 위령의 종루 보수 및 추모문화제를 돕는 사람들

1923년 9월 10·11일 의연금 모집과 부산부두 귀국 동포

동경지방이재동포구제회 발기 구급의 의연 모집에 대해서



〇휴지통. “동경의 참혹한 혹한 진재에 대하여 동정을 표하고 힘자라는 데까지의 원조를 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의미로 좋은 일이겠다
그러나 요전 서선지방에 비참한 수해가 있을 때는 본체도 않던 놈들까지 제가 인정 많은 사람을 대표한다는 듯이 날뛰는 것은 좀 괴이쩍은 걸 월전까지 철이 나지 않았다가 별안간 동경 지방 지진으로 정신이 났다하면 그처럼 경사로운 일은 없겠지
이번 동경지방 지진이 생김으로 우리 조선사람에게 이익이 있다하면 이것 한 가지는 이익이라할까 만일 그자들이 여전히 총독부에 곱게 보이기 위하여 날뛰는 것이라하면
아아 이 세상은 철저히 개벽 되어 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라고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 상황을 알고 있지만 밝히지 못하는 상황을 함축했다

〇일본 신석[新潟]현의 어느 수도공사에 품팔이를 하던 조선인 노동자 31인이 지난 9일 마산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 동아일보 1923. 9. 10

〇본사 특파원 동경에 본사 특파원 재외 동포 위문회 파견원 리상협 씨는 10일 무사히 동경에 도착되었다는 전보가 있었다
〇중국에 전학하려는 은시세에 주의하라 중국 유명학교의 일 년 동안 학비와 기숙사비를 소개하여, 있는 집의 행태는 100년 전에도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〇노동 갔던 사람들이 들어와 부산 부두는 귀국동포로 혼잡하다 더욱이 7일부터는 일본관서 지방에서 노동을 하던 동포들이 당국의 “귀국 명령”으로 인하여 연일 배마다 백여 명씩 무료승차 승선의 편을 조차 부산에 상륙되나 본시 그날 벌어 그날 사는 노동자들이므로 상륙하여부터 즉시 “배고프다”는 타령이 일어나도 도저히 구제할 방법이 없음으로 아직은 각 관공서의 주선으로 밥을 지어 먹이며 한편으로는 만철에 교섭하여 무료승차권을 배부하여 각각 귀향을 시키려하나 만철에서는 아직 쾌락이 없음으로 더욱이 대혼잡을 이루는 중이라더라
〇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동정금모집 사무소는 경운동전도교당내(본사에서도 취급) 기한은 본월 말일까지 금번 구제회의 사무 보는 기한은 9월 말까지로 하였으나 구제는 일시가 바쁜 터이므로 동정하실 이는 늦어도 일주일 안으로 가져오기를 바란다더라
〇이재지 동포의 통신을 어제부터 온다 이재민의 통신을 더 원만하게 교섭할 차로
체신국에서 소도[小島] 부사무관이 그저께 밤에 동경으로 출발하였고 오늘도 이재민의 전보가 많이 올 터이다
〇대판 방면에서 노동하던 우리 동포의 일부분은 요새 동경대지진으로 인하여 생계를 구할 수 없어서 지난 8일 오후 3시 목포에 입항한 궁도환으로 150명이 귀국하였다는데 그중에 유학생도 많이 있다더라 - 동아일보 1923. 9. 11

1923년 9월 10일·11일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일기

1923년 9월 10일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

9월 10일 밤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그러나 왠지 차분한 밤이었다.
7월 23일부터 35일간의 홋카이도, 도호쿠 지방에서부터 고향까지 정신없을 정도로 바쁜 여행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전라북도에 이미 약속된 임업 강습회의 강연을 하러 가고, 9월 2일 전주에서 도쿄 대지진의 뉴스를 보고 놀라서 그날 밤 야간열차로 경성에 돌아왔다. 도쿄에 관해서는 편지도 교통도 단절되었기 때문에 누님댁의 소식도 아직까지 알 수가 없다.
여행 때부터 오늘까지 일기를 쓸 기분이 아니었지만, 오늘 밤은 왠지 차분한 기분이어서 무엇인가 쓰고 싶다.

마사토시 군의 편지에 의하면 “도쿄 대지진의 참화는 실제 재해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지진 때문이 아니라 불량조선인의 방화에 의한 화재 때문이라고 전해져서 도쿄 그 근교에 사는 일본인들이 격양해서 조선인만 보면 다 죽여버린다는 기세여서 선량한 조선인까지 대부분 목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고 쓰여져 있었다. 그 일은 어제 이마무라 씨에게도 들었다. 이마무라 씨는 경무국장과 친한 사이이기도 하고, 정보위원이기도 해서 아직 발표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말했다.
조선인 중에서 누군가는 무분별하게 석유관을 들고 방화하고 돌아다녔다는 것, 피난하는 부녀자를 욕보였다는 것, 일본인의 격양이 극도로 달해서 조선인이라고 하면 그 인간이 범인인지 아니지를 판별할 여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때려죽인다는 것, 일본인 중에서도 조선인과 용모가 닮은 자는 오해받아 살해된 자도 있다는 것, 도쿄 근교의 청년단들은 지금도 불량조선인이 역습한다고 소문을 퍼트려서 준비하고 대처하고 있는 자들도 많다고 한다. 이상의 일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불안하고 씁쓸한 일이다.

아무리 조선인이 일본에 반감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갑작스러운 재해를 틈타서 방화를 하다니 너무 잔인하다. 조선인 중에서 어리석은 자를 선동해서 그렇게 시킨 못된 일본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화재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사상자들은 실제의 10분의 1 이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생각하면, 방화한 놈들의 죄는 가볍지 않다. 시민의 경악도 무리가 아니다. 군중이 흥분했을 때여서 제압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지 조선인이라는 것만으로 조선인을 보면 살려두지 않는다는 것도 난폭한 일이다. 도대체 일본인과 조선인이 융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의 시골 신문에는 조선인 전체가 마치 불량배인 것처럼 쓰여져 있다. 조선인의 신문에서도 또한 이와 같은 재해를 인류의 사건으로서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다소 소홀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사건이 생길 때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따로따로가 되어 버린다면 얼마나 슬픈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악마는 두 민족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나는 믿는다. 조선인만이 이번의 뜻밖의 천변의 기회를 이용해서 방화하려고 계획을 했던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일본인의 사회주의자들이 주모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인이 막벌이 일꾼들을 앞잡이로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일본인은 조선인을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나쁜 습관이 있다. 조선인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조선인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얀 옷만 입고 있으면 모두 똑같은 조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인 중에서 유식자들도 조선옷을 입고 일본인 동네를 걸으면 무시무시한 모욕을 당한다고 한다. 우리 집의 김 군들도 어제 미술관의 짐 정리를 도와주다가 미술관의 수위 마누라에게 모욕을 당해 분개하고 있다. 시시한 일로 시작된 것 같은데 결과는 커졌다. 사실은 이렇다. 김 군이 일을 마치고 손을 씻기 위해 수돗가에 갔다. 거기서 수위 마누라가 있어서 가능한 공손하게 인사하고 세숫대야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 여자는 확실하게 거절하지도 않았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두서너 말만 거만한 태도로 응답했지만, 그 후에는 입을 다문 채였고, 그 태도가 너무나 꼴보기 싫었다고 했다.
김 군은 일본어도 잘 한다. 김 군이 실례되는 말을 할 염려도 없는데, 일본 여성에게 가끔씩 모욕을 당한다고 한다. 대체 여자들이랄 생각이 얕다. 마음이 좁고 깨끗하지도 않으면서 노골적으로 그것을 나타낸다. 우리 어머니도 조선인에 대한 생각에는 좋지 않은 점이 많다. 그리고 일본인끼리라면 내색하지 않을 정도의 일이라도 금방 나타낸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의 생각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어도 그러한데, 하물며 다른 일본 여자들은 더 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성의 혼마치 근처의 상인들은 더 심하다. 나도 조선옷을 입었을 때에는 때때로 모욕을 당해서, 불쾌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이러한 일은 사소한 일 같지만, 등한시할 수 없는 일이다. 평상시의 증오를 유사시에 잊을 수 있는 인간은 적을 것이다. 인류라든지, 신이라든지 하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처음부터 증오 따위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평상시에 인간을 대상으로 해서 증오를 느끼고 있는 자도, 때로는 신이라든지, 인류라든지 하는 큰 문제 앞에 머리를 굴려서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그 어느 쪽도 이러한 점을 고려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우리들은 이러한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한다.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신 앞에서도 증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민족 모두 은총을 받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도쿄에 있는 조선인들 대다수가 곤란에 처한 일본인과 그 집이 타버리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는.
그렇게 조선인이 나쁜 놈이라고 믿고 있는 일본인도 근성이 아주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정말로 저주받은 인간들이다. 나는 그들 앞에 조선인의 변호를 하기 위해서 가고 싶다고 절실히 느낀다.
이번 도쿄의 참해 대부분을 조선인의 방화에 의한 것이라고 역사에 남긴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이 괴로운 일이다. 일본인에게도, 조선인에게도,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다.
그러한 사실이 존재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조선인이 그렇게 어리석은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다.

이러한 사변에 대해서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교회의 태도이다. 얼마 안 되는 기부금을 모으고, 일본과 연락을 취하는 통신에만 몰두하고 있다. 돈은 관청에서도 그 외의 단체에서도 모은다. 통신정보는 요즘 관청이 훨씬 자세하고 신속하고 요령 있게 처리한다. 교회에는 다른 사명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와 같은 천변이 알리고 있는 신의 소리를 듣는 일과 일본과 조선, 두 민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관청이나 다른 세속적인 단체의 흉내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정신적으로 이끌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등대가 되어야만 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궁의 장대함도 아무 흔적 없이 없앨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일본은 대 도쿄를 내세우고, 군비를 뽐내고, 만세일계를 자랑하는 것을 삼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 공통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영원한 세상에서 사는 길인 것을 교회는 세상에 역설해야만 한다.

1923년 9월 11일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

9월 11일 어젯밤부터 계속 내리는 비는 오늘도 하루종일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장장실에서 불러서 가 보니, 장장이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이번 도쿄의 재해에 관해서 어떤 조선인이 취한 태도는 동정의 여지가 절대로 없다. 결코 사소한 동정심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 조선인들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엄격하게 질책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본부에서 각국 고등관을 모아서 국장이 직접 훈시한 이야기라고 한다.

천재를 빙자해서 방화, 살인, 강도, 강간을 서슴지 않게 한다는 이 무서운 일은 인간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악행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소수의 악당 때문에 조선인 전체가 궁지에 빠질 것을 생각하면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주의자나 불량배들은 일본에도 많이 있다. 이번이 악행도 조선인만의 소행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름하에 일괄해서 논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찬성할 수 없다. 일본인은 대체로 배타적인 점에 있어서는 조선인 이상인지도 모른다. 조선인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도 없다. 일본 시골에서는 아기가 울면 “언제까지 울고 있으면 조선인이 온다.”라고 겁주는 말조차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조선인에 대해서 저속하고 기분 나쁘고 잔인한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에 있는 조선인을 보면, 일본의 자연과도, 인정과도, 조화되진 못하고,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된 것은 양쪽에 결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인이 일본에 가서 토목공사장이 막벌이 일꾼 무리에 들어간다. 거의 정다운 말 한마디 들지 못하고, 혹사당하고, 멸시당한다.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사람은 항상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더 야성을 발휘할 뿐이다. 조선에 있었을 때도 한 번도 해 보지 않을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된다.
거기서 조선인은 바보다, 악당이다라는 정평이 나게 되는 것이다.

고슈(甲州, 지금의 야마나시현)에서는 농업화나 현청이 장려해서 조선의 소를 농경에 쓰기 위해서 들여왔다. 처음에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서 전했더니, 아주 평판이 좋았다. 사용해 보아도 과연 성적이 좋았다. 조선의 소는 얌전하고, 힘도 세고, 변변치 않은 사료에도 잘 견딘다. 점점 더 평판도 좋아졌지만, 얼마 안 되어서 악화되어 성질과 행동이 거칠고 난폭해져서 다루기가 어려워졌다고, 최근에는 평판이 땅에 떨어져서 조선의 소를 구입한 자는 손해를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 일에 관해서도 조선에 있어서의 소의 사육, 일을 시키면서 다루는 정신적 의향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가족처럼 인간과 같은 지붕 아래에서 키워지고, 넓은 논밭에서 유유히 일했던 소가 갑자기 성미가 급한 일본인에 의해서 매를 맞고 혹사당하면, 비뚤어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도 소에게는 조심할 여지가 없다. 다루는 입장에 있는 인간에게는 자성의 여유가 주어져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도 많은 점에서 강자인 일본인이 조금 삼간다면 수습은 빨라질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세한 측이 취해야만 하는 태도이다.
이번 사건에 의해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더욱더 사이가 멀어질 뿐이다. 게다가 가까스로 자라기 시작한 조선인의 새싹을 꺾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에 무엇이 주의 뜻에 맞는 가장 올바른 길인지 계시받기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움이 되고 싶다.
조선인에 대해서 ‘도대체 요즘 정부가 약간 응석을 받아주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야말로 원래대로 엄격하게 단속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인은 이번 사건으로 세계의 동정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두 번 다시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탄압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조금 매운 맛을 보여주겠다는.’라는 의견이 많은 것 같지만, 이러한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 아사카와 다쿠미 일기와 서간(다카사키 소지 편저, 김순희·이상진 번역,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2014)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 4. 2.)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 길 약수터인 동락천 가까운 길섶에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묘지 안내판이 서 있다. 한국에 1914년 들어와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임업시험소(장) 고원 및 기사와 조선 공예 연구가로 활동한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인이지만 조선의 수목과 도자기를 사랑하고 연구하며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 한국의 흙이 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친한 행적은 일기·편지·수목과 수목원 관련 논문·보고서·도자기 가마터 답사 및 신문 기사와 추모의 글, 저서 『朝鮮의 膳』·『조선도자명고』 등에 남아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소설 「숭」과 「뇌산소과」 등도 창작하였다고 전해진다.
다쿠미에게 매료된 또 한 사람, 김성진 씨는 1922년~1923년의 다쿠미가 쓴 일기를 1945년 형님 아사카와 노리타카로부터 받아, 1996년 다카네정(다쿠미의 고향)에 기증하는 것을 계기로 2001년 그의 고향에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관(현 관장, 히나타 요시히코[比奈田善彦])’을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아베 요시시게(경성제대 교수, 문부상)는 「아사카와 다쿠미를 애도하다」 발표, 1947년까지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15년 동안 '인간의 가치'로 수록했다.
1994년 에미야 다카유키는 소설 『백자같은 사람』 (일본 고교 필독서 100만 명 독서)을 출간했다.
아사카와 노리타가(淺川伯敎·1884∼1964)·다쿠미(巧·1891∼1931) 형제의 삶을 소개한 만화로 된 평전을 펴낸 '아사카와 노리타가·다쿠미 형제추모회'는 형제의 출생지인 야마나시[山梨]현 후쿠토[北杜]시(시장, 가미우라 에이치[上村英司])가 내년부터 지역 초등학교에서 평전을 부교재로 쓴다고 2021년 12월 31일 밝혔다.
포천시와 후쿠토시 자매결연 20주년 기념 상호방문 차 지난 2월 한국에 온 후쿠토시 시장 일행의 망우역사문화공원 아사카와 다쿠미 묘지 참배할 때 형제추모회 사무국장 히나타 요시히코[比奈田善彦]가 반갑게 인사하며 ‘만화 평전’을 필자에게 증정했다.

정종배 다큐시집 1923 관동대학살 - 생존자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