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923년 9월 7일 1면
1923년 9월 7일 초대 주불공사 한승인
임정기 허연 한승인 3명은 집안이 가난하여
평양 순안 재림교회가 운영하는 의명학교 기숙사에서 도원결의 이상으로 생활했다
흥사단 단우로서 독립운동가인 초대 주불공사 한승인은
두 학생 생지옥의 실황을 목도한 최신 소식으로 동아일보에 실렸다
〇구사일생으로 동경을 탈출한 두 학생 생지옥의 실황을 목도한 최신 소식
참화의 지옥을 벗어나 2일에 맹화 중의 동경을 떠나 도보와 무료승차로 구사일생의 곤경 중 6일 아침 6시 경성역에 도착하는 급행차로 무사히 귀국한 학생 두 명이 있다 그들은(두 학생 사진 게재)
원적 평남 강서군 수산면 운북리 23 현주소 동경 경교구 남하야정 27 좌등방 명치대학생 한승인,
원적 원산부 두방리 47 현주 동경 경교구 하야치정 27 좌등방 동양대학생 이주성의 양 군인데 그들은 지진이 일어날 당시에 가장 위험한 경교구에 있었음으로 당시 이 참혹한 광경을 목도하였으며 화렴 중에 몸을 피하여 갖은 곤경을 겪고 돌아왔는데 그들은 조선사람으로서 처음 귀국한 사람이라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만한 소식이 많기로 그 대강을 보도하는 바이다 – 동아일보 1923. 9. 7
피난길에서 한승인은 이 지진의 여파로
재일조선인 7천여 명이 무고하게 학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승인은 9월 6일 서울에 도착해 이 같은 일본의 만행을
1923년 9월 7일 자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만천하에 폭로하였으나
조선인 대학살의 참상은 기사로 발표되지 못했다
마침 이 기사를 읽었던 인촌 김성수(친일, 교육학술)는
한승인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미국으로 유학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5·16 이후 도미하여 가발사업 성공하고 민주화운동 반유신 운동을 펼쳤다
1973년 《기러기》 10월~11호에 「일본 관동대지진 조난기」란 제목으로
그때 일을 회고하면서 연속 기고하였다
1983년에는 그가 청년 시절에 경험했던 끔찍한 사건을 회고하여
181페이지에 달하는 『동경지진 한인대학살』을 발간했다
동년배의 글로는 최학주의 『나의 일본 학살 현장 탈출기』와
김대업의 『불 속에서 구해주신 주의 종의 고백』 등이 있다
〇동아일보 초대 편집국장인 이상협 특파원을 일본유학생 대회에서 7일 밤 출발했다
〇경성부에서 의연금 모집 취지서를 발표하면서 조선인 대학살을 언급을 하지 않았다
- 정종배다큐시집 1923관동대학살-생존자의 증언(창조문예사,2023)
한승인은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추담 허연 시인과 나이는 7살 어리지만 막역지우로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시킴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서거한 뒤 흥사단 내부 정리하며 일제에 정책에 협력하겠다는 대표 서명한 분들은 국가보훈부 서훈을 추서받지 못하고 있다. 이때 전영택 차상달 현제명 홍난파 등 13명과 김기승 등 5인의 동우회원은 전향 성서 발표한 뒤 친일단체 대동민우회에 가입하여 흥사단 단우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다.
이광수 주요한 백낙준 김동원 유억겸 등도 전향하여 친일 행적을 남겼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흥사단 단우로서 서훈을 받은 분은 안창호 유상규 김봉성 문명훤 조종완 등이고 서훈을 받지 못한 분은 허연 나우 이영학 등 이다.
시인 윤동주도 연희전문 재학 중 수양동우회가 지향한 ‘자기 수양과 민족 계몽’ 정신은 윤동주의 작품 속에서도 계속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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