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10월 9일 진판옥 일기
1920년대 임실에 거주하였던 진판옥(족보 경옥, 1903~1950)의 10대, 20대의 삶을 ‘진판옥 일기’(1918~1947)를 통해
학교생활, 경제생활, 여가활동, 구직 및 면서기 생활로 재구성하여 살펴볼 수 있다
1923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진학 및 취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조선인에 대한 차별로 엿장사, 우유배달, 신문배달, 건설현장,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가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경찰에 구류되어 10월에 강제송환 된다.
9월 1일(토) “김용선 씨가 업혀서 왔더라. 그래서 몸을 어루만져주고 겨우 정신을 차린 후 조금 있더니 지진이 일어나더라. 그래서 집이 무너질 것 같아 뛰어나오니 집이 무너져버렸다. 한 몇 분쯤 하여 또 한 번 지진이 있었다. 시내로 가자, 죽은 사람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돌아왔는데 형세가 참 위험하더라 그래 이제 피난을 하기 시작하였다. 불이 나서 공중에 가득하였는데 공중을 보다가 눈을 데었다. 눈물을 흘리고 비볐다. 해일도 일었다. 가져온 것 없이 몸 하나만 남았다. 밥 한술씩 먹고 잠을 잤다.”
9월 3일(월) “피난을 떠나기로 하였다. 군부대가 한인들을 해(害)한다기에 죽을 한 그
릇 씩 먹고 주인과 작별하고 품천편[品川便]으로 출발하였다. 전차에다가 광고를 붙였다. 일본인이 머리에 퇴머리를 하고 가라고 했다. 노병춘을 방문하였는데 아직도 안 왔다고 하기에 전차역 쪽으로 막 나가니 일본인이 막아서서 인종 구별을 하더니 조선인이라고 하였더니 경찰서를 가자고 하였다. 가던 중에 보니 거리에서 창을 든 놈, 몽둥이를 든 사람, 여러 가지 연장을 들고 사람에게 겁을 주더라. 경찰서로 가니 나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동포가 있더라. 거기서 동포한테 듣다. 조선인이 이 기회에 활동을 하자고. 술들을 먹고 우물에 약을 타고 불을 지르고 한 일이 있었다 하고 조선사람 2천 명이 총칼을 들고 동경으로 향하고 온다는 말이 있어서 조선인은 경찰서에서 잡아 가둔다고 하였다.”
9월 4일(화) “경찰서에서 점심에 주먹밥 한 덩이를 받아서 먹고 있는데 갑갑하고 분함이 컸지만 참았다. 동포들이 잡혀 오고 있었다. 저녁에도 현미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었다.”
- 「1920년대 한 朝鮮 靑年의 求職 및 日常生活에 대한 일고찰」 - 晉判鈺日記 (1918~1947)를 중심으로 (박경하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2009)
1923년 9월 1일 토 날씨 청晴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여 朝飯을 마치고 한 일 없이 놀면서 主人에게 또 한 번 말을 하였더니 終次 듣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마음만 杳々하였다. 그렁저렁 때는 되어 点心을 마쳤다. 暫間 앉았으니 金容善 氏가 死生에 이르러 업혀 왔더라. 그래 몸을 어루만져주고 겨우 情神을 차린 后 조금 있자니까 地震이 일어나기 始作하더라. 그래 봄에 한 번 겪은 일이 있어 염려치 않고 앉아 있었다. 그래 아주 甚하여 집이 넘어갈 듯하기에 어쩔 줄을 물으려 뛰어가 왔더니 집이 무너지고 煙突이 부러지고 야단이 났더라. 日人들도 生后 처음이라고 하며 놀래 짐들을 내더라. 그래 또 들어가 앉았더니 한 十分쯤 하여 또 크게 한번 하더라. 그래 또 뛰어나와 서 있지도 못하고 앉아서 땅 노는 대로 움직였다. 처음(처번) 할 때 마침 深川區 時計로는 꼭 正午였다. 그래 그 后로는 準備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나 있던 집은 함석집에 가벼워서 넘어가지 않았다. 地震 끝에 起火가 四方에서 되었는데 그때에 마침 昨夜부터 南風이 甚히 불어 불의 形勢가 더욱 甚하였다. 우리 있는 집은 飛行機 工場 곁곁 집도 없고 띄어 있는 집이었다. 한참 있다가 市街로 求景을 나갔다. 過然 벽돌집이고 양옥이고 오히려 木製가 덜 무너졌더라. 안 상한 집이 없이 난리 중 어디 치어 죽은 사람을 여기저기서 끌어내고 길 저쪽도 갈 수 없고 이쪽도 갈 수 없더라. 그 중에라도 먹는 게 第一이더라. 도로 皈來하여 있었는데 그렁저렁 저녁이 되었는데 저녁을 지어 먹고 準備들을 하고 있었는데 불 形勢가 참 위험하더라. 그래 이제는 할 수 없어들 하여 避難을 하기 始作하였다. 나중에는 南風 어리어더니 東에서 불었다 西에서 불었다 北에서 불었다 정처 없이 四方에서 불어오며 소々리 바람이 불어오고 사람도 딸려 나가게 위험하게 불었다. 연기는 온 하늘을 덮어 보이지도 않고 불로 空中을 이루고 가 이 모래비가 오다시피 벽돌 같은 것이 튀며 空中을 볼 수 없었다. 그래 우리도 바닷가까지 避難을 하였는데 한 三里 쯤이나 되었는데 불덩이가 떨어지고 불기운에 얼굴을 내어놓지 못하였다. 나는 마침 空中을 보다가 벽돌가루에 눈알을 데여서 빨리 눈을 비々고 눈물바가지나 흘렸다. 이 불을 무릅쓰고 한참씩 있다가 고개만 좀 내어놓고 진정(전)을 하였는데 또 海溢을 한다고 하여서 더욱 놀랐다. 그곳으로 數百名이 避難을 하였는데 밤새 그 사람 부르는 소리에 처량하여 들을 수 없더라. 그래도 잠밖에 무상한 게 없더라. 그중에라도 쿨々자는 사람도 많더라. 밤새도록 한숨 붙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눈만 비々었다.
1923년 9월 2일 일 날씨 청 기온
날이 밝아 불기운은 어제보단 덜하고 海溢난다 소리는 더욱 々々 甚히 들리는데 이제는 너른 陸地便으로 건너가야만 하게 되었기에 차々 저便으로 가기를 始作하였다. 똘물을 건너 자리 定止하고 앉았으나 눈은 조금도 개이지 않고 情神을 차릴 수 없었다. 사람이라고는 모두 다
걸인 중에도 上걸인이요 눈알들이 뻘게져서 먹을 것을 찾느라고 이리저리 신 한 짝도 신지 못하고 나도 그 形上은 차마 참 사람된 눈으로 볼 수 없더라. 主人은 自己 老親을 찾느라고 이리저리 彷徨하며 情神을 잃고, 여기저기 사람 찾는 소리 귀가 시끄러워 들을 수 없고 난리라니 큰난리더라. 짐하여 같이 있던 사람 둘이 송장 물속에서 싸래기 한 포대를 주워와서 그걸로 밥을 지었으나 되지도 않고 먹을 수 없어 먹지 못하였다. 그래 日本 사람들이 다 갖다 먹었다. 또 짐을 챙기어 먼저 있던 神田으로 찾아가기로 가다가 배가 고파서 또 내려놓고 쌀 한 가마니 가져왔던 걸로 밥을 지어 먹었다. 또 짐을 챙기어 가기를 始作하였다. 불을 피해서 송장 속으로 가는데 송장 타는 냄새에 코를 뜰 수 없고 永代橋를 건너는데 三十分이나 걸렸다. 그렁저렁 먼저 있던 집에 이르렀다. 그 집이라고 남아 있을 理가 없더라.
내 짐은 어디로 날아간지도 알 수 없고 몸 하나만 빠져나온 것이 多幸이었다. 저녁이 되어 밥 한술씩 요기하고 함석 쪽을 주워다 의지하고 밤이슬 맞아가며 한 데서 잘 양으로 하였으나 밤 이 되니 불 형세가 또 위험하더라. 바로 곁에서 불이 뻘겋게 타고 地震은 ○해 하는데 只今도 生命이란 것이 살아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잠밖에는 無상한게 없더라.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하여 九時 頃쯤 하여 누우니 그냥 잠들고 말았다.
1923년 9월 3일 월 날씨 청 기온
四時 頃에 起床하였다. 洗手를 하고 河錫柱 氏하고 오늘부터 避難을 하기로 約束을 하였다. 昨夜에 밖에서 하룻밤 밝히고 온 사람이 兵隊들이 韓人을 取調한다기에 이 時期를 利用하여 무슨 活動을 하는가 한 感이 들더라. 粥 한 그릇씩으로 요기를 하고 主人公을 作別하고 河公과 同伴하여 品川便으로 向하고 出發하였다. 사람이 混雜하여 오고가고 避難하는 中에 兵隊들 온거리 々々 지켜서々 鮮人을 取調하더라. 그中에도 內閣 組織은 하여 電車에다 廣告를 붙였더라. 또 橫濱은 變化라는 廣告가 붙어있었다. 그리되어가는 中 河公은 한번 取調를 當하고 次々로 피하여 品川이란 곳까지 이르렀다. 日本人들이 퇴머리를 하고 가라고 하기에 수건을 내어 퇴머리를 하고 거기서 바로 魯炳春 君을 訪問하였다. 아직껏 오지 않았다고 하기에 또 出하여 河公과 같이 電車 終点에 막 넘어서니 日人들이 막아서々 오는 住所를 묻고 人種 區別을 찾더라. 그래 韓人이라고 하였더니, 대번 그 곁 派出所로 가자고 하여 따라갔다. 대강 取調를 받고 警察署까지 가자고 하여서 따라가는 中 거리々々 창든 놈, 몽둥이든 놈
其外 여러 가지 연장을 들고, 툭々 사람에게 던지더라. 어느 영문인 줄 모르고 警察署까지 이르렀다. 나 혼자만 잡혀왔는 줄 알았더니, 여러 同胞가 있더라. 事實 罪는 없으나 日記冊 하나가 있어서 夛小間 거치않게 생겼더라. 住所 姓名을 알려준 다음에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앉았다. 벌써 点心 때는 겨우고 이제나 내줄까 저제나 내줄까 하였으나 오늘 해가 마치도록 내여놓지를 않았다. 이제까지 아무 영문인 줄 몰랐다가 우리 同胞한테 들어서 알았다. 橫濱에 있는 鮮人 로가隊들이 平素에 日本로가대들과 일을 할 제 意味없이 많이 맞아 죽었음을 원통
케 알고 있다가 마침 이 機會를 타서 活動을 하자고 술들을 먹고, 우물에 다 藥을 풀고, 불을 놓고 한 일이 있었는 貌樣인데, 朝鮮사람이 二千名이 총칼을 들고 東京으로 向하고 온단 말이 있어々 朝鮮人이라고는 경찰서에서 잡아가고 靑年團, 民間自警團들이 나서 鮮人이라고는 搏殺을 시켜 鮮이라고는 依支할 곳 없이 죽게 되었다. 나중에 事實을 調査하여보니 虛言이었어서 平難들을 시키려고 다녔었다. 밥은 먹지 않아서 배는 고픈데 저녁이 되어서 한숨 자고 나니까 玄米밥 주먹보다 작은 걸 한 덩이 갖다주기에 요기하고 또 오그리고 잤다.
1923년 9월 4일 화 날씨 청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였다. 事實 배는 고팠다. 밖이라고는 도무지 出入을 안 시켰다. 東方에 돋는 해는 우리의 情神을 산란케 하고 空中에 떠다니는 飛行機는 우리의 故國 生覚을 더욱 興奮케 하였다. 때는 밝아 새때쯤 되었다. 밥을 지어 한 덩이씩 주기에 죽지않고 살 生覚으로 받아 요기를 하였다. 좁은 곳에서 活動이란 할 수 없이 갑갑하고 솟는 화를 鎭定할 수 없이 앉았다 일어섰다 누웠다의 회를 넘겼다. 밖을 쳐다보니 제대로(올케) 난리였고 내어준들 죽을 성도 싶고 참 어디다 比하여 形言할 수 없더라. 잡혀 들어오는 사람마다, 피로 감투를 쓴 놈, 창을 맞은 사람, 칼을 맞은 사람, 風臺(繃帶)를 감고 꼭 戰爭에 傷者 쏟아지듯이 잡혀 오는데 그 威驗함을 차마 目見할 수 없고, 더욱이 當者의 말을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치며 이맛살이 찌푸려지더라. 그리저리 오늘 해도 다 되어 밤 八時 頃쯤 되어, 또 生命 保存하자는 뜻으로 한 덩이 玄米밥을 얻어먹었다. 이 形上이 된 놈이 자리나마 取할 수 있나. 水道간에다 짚거적을 펴고 눈이나 감는 것이 오히려 나을 줄로 알고 九時 頃에 就寢하였으나 그 난리 중에 잠인들 옳게 잘 수가 있으리오.
1923년 9월 5일 수 날씨 청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였다. 亦是 새때쯤 하여서, 밥 한덩이 요기를 하였다. 사람들을 쳐다보면 벌써 눈이 쑥 들어가고 배들이 고파서 눈이 울며불며 야단들이더라. 어제와 같이 누웠다 앉았다의 해를 마쳤다. 저녁밥 한 덩이를 얻어먹고 八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6일 수 날씨 청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여 새때쯤 하여 玄米밥 한 덩이로 요기를 마치고 終日 해를 넘겼다. 저녁을 요기하고는 우물가에가 沐浴을 하고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7일 목 날씨 청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여 새때쯤 하여 주먹밥 한 덩이로 요기를 마치고 終日 해를 넘겼다. 저녁밥 한 덩이 요기하고는 잘 곳도 없어서 한 데다가 가마니 자락을 깔고 잤다.
1923년 9월 8일 토 날씨 청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여 새때쯤 하여 안남미 밥 한 덩이로 요기하고 終日 해를 마쳤다. 저녁밥 한 덩이 요기를 하고는 卽 九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9일 일 날씨 청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여 밥 한덩이 요기를 하고 終日 해를 넘겼다. 저녁을 마치고 卽 九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10일 월 날씨 청 기온 ~ 9월 14일 금 날씨 우 기온(필자가 임의로 묶어 요약함)
9월 10일 우와 여함 특기사항 무함,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동상 특기사항 무함,
날씨는 10일부터 12일까지는 청, 13일 14일은 우(비)
1923년 9월 15일 토 날씨 우 기온
- 發信: 本弟, 嚴柱完, 文義根, 金轍均
五時 頃에 起床하였다. 주먹밥 한덩이로 요기하고 오늘에야 葉書片紙를 써서 부쳤다. 오늘 해가 마친 后 또 亦是 주먹밥 한 덩이로 요기하고 就寢함이 되었다.
1923년 9월 16일 일 날씨 청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여 한참 있다가 아침 요기를 마쳤다. 終日토록 지내였다가 저녁을 요기한 后에 물가에 가 浴身을 하고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17일 월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힘없는 하얀 안남미 쌀밥 한 덩이로 아침 요기는 마쳤다. 어느덧 点心 때는 다달았다. 속없는 배는 벌써 시장하였다. 그러나 별수 없었다. 해가 이미 서산에 걸려 어두운 밤에 이르렀다. 果然 中心으로 남모르게 고대하였던 눈덩이 같은 밥 한 덩이로 요기하였다. 먼저 때에에는 건너니고 무엇이고 生覚 없더니 이제는 그나마 반찬 生覚까지 났다. 그中에도 무슨 즐거움이 생기어 이야기까지 하다가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18일 화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아침 요기를 마친 后에 또 서로々々 마주 쳐다보아가며 蔭光만 찾아다니며 終日 해를 마쳤다. 저녁밥 한 덩이 요기를 마치고는 잘 곳이 없어 한 데서 가마니만 깔고 밤이슬 맞아가며 지내게 되었다. 해가 오르면 더웠으나 추었다. 万一에 이 至境에 있는 中
病이나 發生되면 다 죽겠더라.
1923년 9월 19일 수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주먹밥 한 덩이로 요기를 마치고 八時 頃에 脚氣 때문에 救護室에 가 診察을 받았다. 오늘은 또 十餘 名이 出하였다. 누웠다 앉았다 하며 終日 해를 마쳤다. 주먹밥 한 덩이로 저녁을 마치고 八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20일 수 날씨 우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七時 頃에 주먹밥 한 덩이로 요기를 마쳤다. 九時 頃에 朝鮮總督府 醫師에게 脚氣 診察을 받았다. 오늘은 十餘 名 出하고 八十名 남았다. 終日토록 그렁저렁 넘기고 또 주먹밥 한 덩이로 夕食을 마쳤다. 한참 놀다가 오늘에야 日記冊을 열어 八月 末日 것과 오늘 日記를 마쳤다.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高濟鳳 氏와 初面 人事
1923년 9월 21일 금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주먹밥 한 덩이로 朝飯 요기를 마쳤다. 九時 頃에 醫師에게 診察을 받고 藥을 타 왔다. 終日토록 누웠다 앉았다 하며 해를 마치고 주먹밥 한 덩이로 夕飯을 마치고 한 것 없이 이야기를 하고 놀다가 日記를 마치고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十二日까지 調査에 東京 橫濱만에 死傷者 十萬餘 名이고 燒失戶數 四十萬餘에 達하고 職業을 잃고 갈 곳 없는 者 百十萬餘에 達하였다더라.
1923년 9월 22일 토 날씨 우 청 기온 한寒
六時頃에 起床하였다. 주먹밥 한 덩이로 요기를 마치고 조금 있다가 警察署에서 말하기를 朝鮮總督府 出張所로 간다고 準備를 하라고 하기에 가기를 나셨다가 비가 와서 가지 못하고 來日 가기로 하고 하루 더 있기로 하였다. 한 것 없이 놀았으나 날이 추워서 午前 同限은 寒氣
를 免치 못 하였다. 오늘 正午에는 밥이 있어서 点心 요기를 하였다. 그렁저렁 한 것 없이 오늘 해가 지고 저녁에 이르러 밥 한 덩이로 주림을 免하였다. 비가 그치고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에 半空中에 걸린 明朗한 달빛은 理想스럽게도 밝았다. 過然 父母兄弟親舊의 生覚도 났으며 시름없는 한숨도 나왔다. 高濟鳳 氏와 暫間 同限 그리저리한 談話가 있었으며 즐기다가 들어와 그리저리 오래된 后 日記를 마치고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23일 일 날씨 담曇 기온
五時頃에 起床하였다. 아침밥을 마치고 朝鮮總督府 出張所로 離居하려고 準備를 하였다. 組를 지어 巡査와 같이 한참동안 걸어가다가 電車를 타고 靑山 總督府 收容所까지 이르렀다. 다 調査를 마친 后에 倉庫같은 幕에 가마니를 깔은 곳으로 자리를 정하여 주더라. 다 각々 자리를 정한 后에 組대로 糧食을 내어주기에 点心을 지어서 오늘에야 처음으로 좋은 쌀밥에 그릇을 받쳐 먹었다. 出外해 바람을 쐬고 勞動할 사람을 뽑아서 내보냈다. 河錫柱 氏를 作別하였다. 또 高濟鳳 氏를 作別하고 섭섭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朝鮮靑年會에서 사람이 와서 朝鮮 가고 싶은 사람은 住所 姓名을 써 오래서 써 주었다. 그리저리 저녁때가 되어서 夕飯을 마쳤다. 조금 있다가 日記 后 八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24일 월 날씨 대우 기온 강풍
- 發信: 魯炳春
五時 頃에 起床하였다. 雨來 故로 朝飯을 짓지 못하고 九時 頃쯤 되어 朝飯代로 軍人들 먹는 빵 一封式으로 요기하였다. 한 것 없이 그렁저렁 점심때가 되어 晝飯을 지어 먹고 또 한 것 없이 저녁때가 되었다. 아침때에 먹던 빵으로 요기하였다. 한 것 없이 쓸데없는 雜談으로
지껄이며 놀다가 日記를 하려 할 즈음에 監督께서 불을 끄고 자라고 하여서 마치지 못하고 九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25일 화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빵으로 요기를 마치고 出外하여 정자 그늘나무 밑에서 놀았다. 비가 와 다 개어서 하늘은 아주 晴明하였다. 그렁저렁 정오가 되어 晝飯을 마쳤다. 또 정자 그늘나무 밑에서 終日 해를 마쳤다. 兵隊에 가서 구루마에 빵을 싣고 왔다. 빵 두 봉으로 夕食을 마치고 事務所에서 集會하여서 注意 演說을 들었다.
1923년 9월 26일 수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室內의 掃除를 하고 朝飯 後 또 出外하여 外場의 掃除를 하였다. 한 것 없이 正午에는 빵으로 요기하고 또 그렁저렁 夕時가 되어 夕飯을 마쳤다. 沐浴을 하고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27일 목 날씨 담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여 室內의 掃除를 하고 朝飯을 빵으로 요기하였다. 午前 十一時 頃에 朝鮮 있는 日本修養團이 朝鮮人 慰問 次로 來往하였는데 各道別로 나뉘어서 住所를 적어주고 新聞에 낸다고 寫眞을 찍었다. 後에 적으나마 同情的으로 한다고 菓子를 돌렸다. 後 晝飯 後에 朝鮮 갈 사람을 불렀는데 나는 이번에 못 가게 되었다. 事實 難이로다. 여기 있어 봐야 일없고 故國을 간다 할지라도 집에 가기가 싫은데 참 난이로다. 그럭저럭 놀다가 衣服을 나누어 주었는데 女服이라 남을 주어버렸다. 夕飯 後 놀고 자려 할 즈음에 한 반에 있는 사람이 脚氣에 곽란이 나서 곧 十分도 못 하여서 死亡하고 말았다. 十一時 頃에 就寢
1923년 9월 28일 금 날씨 우 기온
- 發信: 舍弟, 文義根 金轍均 兩
六時 頃에 起床하여 室內의 掃除를 하고 朝飯 後에 朝鮮 가시는 兄壬에게 片紙를 부치고 作別을 하였다. 晝飯 後 놀다가 또 저녁을 지어먹고 遊하다가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그날 昨夜의 死者의 치상을 하는데 우리도 가서 예를 지내는 데 다 같이 앉았다.
1923년 9월 29일 토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室內의 掃除를 마치고 朝飯을 지어서 먹었다. 한 것 없이 遊하다가 点心을 지어 먹고 午后에 단소를 하나 팠다. 심々한데 祭를 삼고 불고 놀다가 夕飯을 지어 먹고 놀다가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9월 30일 일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여 朝飯을 지어 먹고 朝鮮 가고 싶은 사람은 住所 姓名을 써 오라고 하기에 卓演枸 氏와 같이 나가기는 싫으나 그 경을 치고 또 日本 땅에서는 學業은 틀린 듯싶어서 마지 못하며 써냈다. 나중에 다 檢査를 마쳤다. 晝飯 後 또 놀다가 夕飯 後 遊하다가 十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10월 1일 월 날씨 담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朝飯 後 朝鮮 갈 사람의 姓名을 記錄하여 붙였다고 가 보라고 하더라. 가본 즉 마침 붙었더라. 그래 이제는 별수 없이 皈國하게 되었다. 나중에 注意 말을 다 듣고 證明書 하여 가지고 빵 네 덩이씩을 받아가지고 十五里 쯤 되는 芝浦라는 곳까지 步行으로 갔다. 그곳에서 終日토록 기다렸다. 마침 돈 十五錢 남아 東京燒失地画를 一枚 샀다. 電氣 들어온 后에 배에 오르게 되었다. 商船이라 짐 싣는 곳으로 탔다. 倉庫 속 같은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빵으로 저녁 요기하고 九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10월 2일 화 날씨 담 기온
五時 頃에 起床하였다. 八時에 배는 橫濱으로 向하고 出發하였다. 아침은 빵 남은 걸로 요기하였다. 뱃전에 나와 橫濱에 이르기까지 求景을 하였다. 얼마 안하여 橫濱港에 到着하였다. 橫濱은 대체 다 燒失되고 말았다. 軍艦은 數十 隻이 軍兵을 準備하였더라. 美國 軍艦은 二 隻이 와 있었는데 其中에 第一 巨大하였다. 橫濱港에서도 避難民 한 百五十 名쯤 되었다. 그래 총 한 三百八十 名쯤 실렸다. 그렁저렁 午后를 當하였는데 배가 떠나다가 風浪이 甚하여서 나지 못하고 하루저녁 더 유럼하였다. 夕飯을 지어주어서 요기하고 八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10월 3일 수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朝飯 後 배는 벌써 떠났다. 風浪이 일어나니까 배가 흔들려 어지러워서 누워서 그럭저럭 지내며 나와서 求景도 하여 가면서 終日을 마쳤다. 夕飯을 지어주어서 요기를 면하였다. 또 밤이 돌아와서 八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10월 4일 목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朝飯 後에 亦是 어지러워서 누웠다가 선창가로 나와 놀다가 하며 終日을 지내었다. 今日부터는 点心도 주어서 먹었다. 過然 太平洋 바다는 넓었다. 山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過然 바다는 平々하니 보이지 않고 둥글하게 보였다. 물빛은 아주 검었다. 맛은 염수물 以上으로 짜더라. 夕飯 後 八時 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10월 5일 금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朝飯을 마치고 선창 위에서 놀았다. 富士山 求景을 하였는데 참 높더라. 파도는 쳐서 흰 꽃이 핀 것 같았고, 天氣는 晴㫰하여 以上 없는 景致를 이루었더라. 아- 슬프도다. 成功이나 하고 가면 오죽이나 기쁘리오마는 그일 저 일 다 그릇하고 서 모진 목숨 끊지 않고 살아가게 되어 이 배를 타기는 탔다만은 故國에서 父母 兄弟를 무슨 面目으로 相對하리. 아!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지지리도 못난 물건은 또 어디가 짝이 있을 고. 終日을 虛送타가 밤이 닥쳐 夕飯을 마치고 八時 頃에 就寢하였다. 바닷물로 沐浴을 하였다. 바닷물이 밤에는 물결이 빨긋한 물로 보이더라.
1923년 10월 6일 토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였다. 八時 頃에 배는 下關에 到着하여 停留를 하였다. 배에 짐을 실으려고 그렁저렁 오래 지체를 하여 午后 四時 頃에야 出發하였다. 過然 이제는 日本 땅은 離別하게 되었다. 下關은 차々 멀어지고 날은 차々 어두운 밤이 되었다. 風波가 일기 始作하고 몸은 차々 어지러워지더라. 속으로 들어와서 누워있었다. 차々 더 흔들리고 속에 있는 것이 곧 넘어올 듯하더라. 이때까지 그런 일이 없다가 필경 게우고 말았다. 그렁저렁 七時 頃에 잠들었다.
1923년 10월 7일 날씨 청 기온
五時 頃에 잠을 깨어 準備들을 하라고 하는데 당최 어지러워서 일어날 수 없더라. 누워서 옷을 입고 짐을 챙기며 밥을 가져왔으나 먹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진정하여 뱃전 위에 나와 밥을 좀 먹고 두어 뭉텡이 쌌다. 釜山을 차々 가까워지고 山川에 벼는 누릇々々하여 있고 흰옷 입은 同胞들은 배를 저어 여기저기서 보이고 朝鮮 땅이 분명하더라. 그렁저렁 배가 釜山港에 到着되었다. 警察署에서는 바로 調査가 나왔다. 그렁저렁 끝나고 十一時 頃에야 上陸하게 되었다. 한 배에 실려 오던 한 사람은 脚氣로 모진 목숨 끊어지고 말았다. 釜山 救護所로 따라가서 辨当 한 개씩으로 요기하였다. 后에 車 탈 證書를 하여주며 車 時干이 되어서 停車場으로 往하였다. 午后 一時 車로 釜山驛을 出發하였다. 過然 日本도 볼 때에 센찬하게 보였지만은 本國은 보니 더 멀고 멀었더라. 그렁저렁 가서 大邱를 지나 十二時에 大田에 到着되어 다 下車하였다.
1923년 10월 8일 월 날씨 청 기온
巡査들이 와서 또 調査를 다 마친 后에 待合室에 와서 쉬었다. 數時間을 기다리다가 車 時間이 되어 木浦로 올라탔다. 巡査들이 辨当를 가져와서 나누어주었다. 五時가 되어 車는 出發하였다. 辨当로 요기하였다. 七時에 裡里駅에 到着되어 下車하고 全州行 往便으로 올라탔다. 三
禮駅을 當하여서 刑事 一人이 日本서 오는 사람 調査하더라. 그래 가르쳐준 다음에 九時頃에 全州駅에 到着되었다. 刑事에 따라 全州警察署로 갔다. 高等係로 들어가 仔細한 調査를 다 마친 后 이번에 日本서 한 일을 여기와 말을 하면 新規則에 依하여 處罰한다고 注意를 시키고 나가라고 하더라. 그렁저렁 두 어 시간 지체가 되었더라. 全北日○車部에 책보를 맡기고 高校로 往하여 文君과 金君을 訪問하여 任實 學生을 만나 보았다. 后 全州神社에 올라 求景하다가 책보를 찾아가지고 金君方으로 往하였다. 여러 형님 찾아왔다. 그리저리한 이야기를 하고 밤 돌아온 后 저녁을 마치고 金文君과 이야기를 하고 놀다가 沐浴을 하고 와서 十一時頃에 就寢하였다.
1923년 10월 9일 화 날씨 청 기온
六時 頃에 起床하여 文君 皈去하고 한 것 없이 朝飯 後에 金君과 같이 出하였다. 郵便局 前에서 人事를 하고 八時 半頃에 出發을 하였다. 오다가 任實 사람을 만나 同行하여 오다가 萬馬錐에 와서 갈렸다. 그렁저렁 와서 下午 三時頃에 本家에 當到가 되었다. 다시 여러 말할 것도 없고 부끄러운 生覚 뿐이었다. 집안 사람들은 반겨함은 勿論이고 洞里 사람들까지도 반겨하더라. 當한 나는 그다지 걱정도 안하였는데 집에서는 참 말할 수 없이 근심들 하였더라. 衣服을 갈아입고 父壬께서는 나중에 오셔서 뒤에 뵈었다. 저녁을 마치고 九時 頃에 就寢하였다.
- 「진판옥 일기」, 박경하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소장하여 제공함.
-정종배다큐시집 1923관동대학살-생존자의 증언(창조문예사,2023)
‘진판옥 일기’가 정종배다큐시집 ‘1923 관동대학살-생존자의 증언’에 수록하는,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중앙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정년퇴직한 이명재 교수는 진외가 사촌 이모부이다. 필자의 고등학교 때부터 멘토이다. 앞의 시집 원고가 거의 마무리 정리하는 2023년 7월말, 전화로 박경하 교수 인사동 사무실에서 ‘진판옥 일기’를 봤는데, 소중하게 여겨 내용은 살펴보지 못했다며 아쉬워하였다.
인사동 박경하 교수의 사무실에 찾아갔다. 박경하 교수는 흔쾌히 시집에 일기 전문을 수록하길 허락하였다. 2000년대 초 고서점에서 발견하여 입수했다. 한 권은 식민지역사박물관 또 한 권은 KBS 기자가 대여해 가, 되돌아오는 대로 전문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박경하 교수의 남긴 말이 인상적이었다. “책 수집가의 행복은 어느 누가 제공하였다 그 한 줄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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