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8.15광복 80주년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독립전쟁 항일무장투쟁가

정종배 2025. 9. 8. 06:46

8.15광복 80주년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 독립전쟁 항일무장투쟁가

도마 안중근 독립

 

광복 80주년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독립전쟁 시기 항일투쟁 및 항일무장투쟁가 400여 분이 넘는다.

만해 한용운 유관순 방정환 오세창 문일평 김영랑 오기만 김중석 서광조 오재영 서동일 유상규 등은 서훈 받고 유택이 남아 있다.

김춘배 항일무장투쟁가는 정춘산 이름의 묘비로 추정하고 있다.

안창호 김사국 박원희 서병호 박찬익 신명균 나용환 박동완 이종일 송진우 나운규 명재이탁 백대진 선우훈 최익환 유진태 이태건 김승민 김병진 박승룡 강학린 김봉성 김정규 문명훤 조종완 김진성 등은 서훈 받고 국립서울,대전현충원 등으로 이장하였다.

주산 신명균 선생은 2003년 무연고처리자로 묘비만 남아 있다.

조봉암 장덕수 나우 김기만 허연 변성옥 이병홍 김명신 박희도 임용하 김찬두 오기선 김분옥 이정애 최백근 이영학 등은 친일 관련 등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망우리 및 망우리고개 관련 항일무장투쟁가

1908년 1월 13도 창의군 이인영 관동창의대장 왕산 허위 군사장 등 서울 탈환 진공작전 총지휘 및 선봉대 300명

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사형이 집행될 때 “국가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 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라는 유시(遺詩)를 남겼다.

이후 시신은 제자 박상진이 반장(返葬)하여 지천(芝川) 방암산(肪巖山)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당시 수많은 유생들이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어 추앙하였다. 그 중 안중근(安重根)은 ‘고관 중의 충신(忠臣)’으로 평하였다.

1919년 3월 광무황제 반우제 매국 7적 척살 동우 이탁 27결사대 대장,

이탁(독립장,임시정부,1963), 안경식(애족장,만주방면,1990), 차병제(독립장,만주방면,1963), 손창준(독립장,만주방면,1963), 주병웅(독립장,만주방면,1963), 이종욱(친일,불교), 박기제(독립장,만주방면,1963), 송동호(애족장,만주방면,1990), 박진태(애국장,만주방면,1991), 박기한(독립장,만주방면,1963), 김용우(애족장,만주방면,1990), 최병인(애족장,만주방면,1990), 이해삼, 이인식(애족장,임시정부,1990), 나경호(애족장,만주방면,1990), 한선옥(애족장,만주방면,1990), 강성곤(애족장,만주방면,1990), 오덕연(애족장,만주방면,1990), 한국보(애족장,만주방면,1990), 이연작(애족장,만주방면,1990), 황집(애족장,만주방면,1990), 홍순범(애족장,만주방면,1990), 김병수(애족장,만주방면,1990), 임석도(애족장,만주방면,1990), 이종원(애족장,만주방면,1990), 이동우(애족장,만주방면,1990) 성모(成某) 등이다.

1929년 4월 공명단원의 망우리 우편수송차 습격 의거 최양옥(독립장,중국방면,1962) 김정련(독립장,중국방면,1962) 이선구(애국장,국내항일,1991) 등 등이다.

중랑구 출신 및 거주 항일투쟁 및 항일무장투쟁가

면목동 고윤원 손명근 안영기 안흥기, 상봉동 최승환 장준하, 신내동 이정, 중화동 김광섭 등이다.

13도창의군탑은 1991년 동아일보사에서 세워 기리고 있다.

27결사대와 우편수송차 습격 중랑구 거주 항일투쟁 및 항일무장투쟁가를 기리는 시설물을 국가보훈처에서 세우길 바란다.

독립전쟁 항이투쟁 및 항일무장투쟁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민족대표 33인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3.1운동)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민족대표 33인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3.1운동)

 

김중석(金仲錫, 1883~1966)

함흥 장날인 3월 3일 독립만세시위를 주도 1992년에 건국포장(3.1운동)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이태원묘지무연합장분묘 및 합장비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3.1운동)

 

경아 서광조(徐光朝, 1897~1972)

1917년 3월 23일 평양에서 장일환·강석봉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전라도 지역 책임자로 선임되어 항일활동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국내항일)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1901~1950)

3.1혁명에 참여하여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백범 김구선생의 임시정부 광복군 군자금 등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99년 만에야 건국포장(국내항일)을 서훈받음

 

준영(晙泳) 오재영(吳哉泳, 1897~1948)

안중근 의사와 1920년 9월 14일 의열단 최초 무장 독립투쟁 부산경찰서 박재혁 의거 숨은 조력자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83년 대통령표창(의열투쟁)

 

오기만(吳基萬, 1905~1937)

독립운동 명가 사회주의운동 독립운동가 1931년 6월 상해에서 김단야로부터 국내의 김형선과 협력하여 적색노동조합과 조선공산당 재건명령을 받고 귀국하여 동년 7월 경성에서 김형선을 만나 협의한 결과 함남 진남포에서 활동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1932년 1월 진남포로 간 그는 한국형, 심인택 등과 적색노동조합 결성을 기도하여 동년 10월 적색노동조합부두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진남포상공학교 적색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평양에서는 면옥노동자총파업을 선동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 9월 상해로 도항하여 코민테른 원동부에 상황을 보고하였다.

1934년 4월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경에 의해 붙잡혀 국내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되었다. 동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중병으로 인해 1936년 6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으나 옥고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중국방면)

 

춘파(春波) 서동일(徐東日, 1893~1965)

1923년 1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남형우·배천택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민당 뒤에 다물단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재정부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중국방면)

 

 

호암(湖巖, 虎巖) 문일평(文一平, 1888~1939)

1919년 3월 12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조선 13도 대표자 명의로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 「애원서」라는 제목의 글을 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중국방면)

 

태허(太虛) 유상규(劉相奎, 1897~1937)

경성의전 3.1 만세운동의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을 1년 앞둔 3학년을 다 끝마친 때였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학교는 퇴교를 당하였다. 1919년 11월 중국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내에 있는 유력 재산가, 학교 및 종교계 등을 조사하여 독립운동의 자료로 삼기 위해 조직한 임정조사원의 평북 강계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 1920년 2월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비서로 활약.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병상에서 망우리 상규 군 옆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하여 조카사위 김봉성이 자기 아버지 묫자리를 내줘 도산의 유택을 마련했다. 1973년 강남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현 도산공원으로 이장하였다. 현 강남은 세계적인 부촌으로 민족의 어른 유언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199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중국방면)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931)

1919년 3·1혁명 때에는 손병희의 사위로서 그의 지도하에 천도교청년회의 회원으로 3·1혁명 준비에 협력하고, 또한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던 중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문화운동)

 

김춘배(金春培, 1904~1946) 정춘산 묘비명 추정

1927년 정의부에서 활동하던 때로 1934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다음 시기는 1934년의 의열투쟁인데, 이로 인해 광복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보내었다. 김춘배 의거를 김일성 일대기 초판에 ‘만보산 사건’의 모델이라 하여 남쪽 후손들 연좌제로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만주방면)

 

 

무연고처리로 묘지가 사라짐

 

주산(珠汕) 신명균(申明均, 1889~1941)

1921년 장지영·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동인지 《한글》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권덕규·이병기·최현배·정열모 등과 함께 《한글》(1927.2.∼1928.12.)을 펴내어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진력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가 신명균은 조선어학회에서 한글의 통일과 보급에 중추적인 활동을 하였다. 조선어학회의 핵심인물로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그리고 신명균을 들 수 있다. 1대 간사장 이극로의 뒤를 이어 2대 간사장을 그가 맡았다. 일제에 맞선 그의 언어독립투쟁은 조선어학회사건 예심종결결정문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신명균은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으로서, 이의 완성을 위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관여하였다. 1931년부터 조선어연구회를 모체로 하여 조선어학회가 발족되자 그 기간회원으로서 활약하였으며, 기관지인 《한글》(1932년 재창간) 등을 통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사업에 앞장을 섰다. 국어연구 및 맞춤법통일안 제정사업과 관련된 일부 업적은 「한자음 문제에 대하여」(한글, 2∼6호)·「된시옷이란 무엇이냐?」(한글 7호, 1927.11.)·「조선글 철자법」(1928)·「맞춤법의 합리화」(한글 3호, 1932) 등이며, 또한 『한글』(1권 8호, 1933)에서는 된소리는 각자병서 ㄲ, ㄸ, ㅃ 등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것을 학구적으로 논술하고 있다. 이는 맞춤법통일안의 된소리 표기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기도 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인 박용규 역사학자가 한글학회 연구위원 때 두 번에 걸쳐 보훈처에 신청하여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국내항일)을 서훈받았다. 묘지는 무연고처리로 2003년 용미리시립공원묘지로 합장 이장하였다. 그런데 누구도 그 장소를 몰라 안타까운 현실이다.

도마 안중근 유믁

 

미서훈 독립전쟁 항일투쟁 및 항일무장투쟁가

 

별산(鱉山) 나우(羅愚, 1885~1960)

대한민국 최초 독립선언인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 39인 외 나우·정안립·정신·서상용·서일·신팔균 등 6명은 선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정으로 선언서에 누락되었거나 가명으로 연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시정부에서 국장급 이하의 보안책임자 직위를 가지고 근무한 흥사단 단우, 대종교인

 

 

추담(秋潭) 허연(許然, 1896~1948)

1919년 3월 6일 의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순안 만세운동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경찰의 체포를 피해 스승 김창세의 추천장을 들고 상해로 망명했으며, 그해 상해 삼육대학(중학부)에 입학했다. 역시 의명학교 출신인 김창세 박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서이자 주치의였다. 이즈음, 일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어릴 때 이름이던 용성 대신 허연으로 개명했다. 1937년 6월 10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누하동 자택에서 긴급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며 1년 2개월을 복역한 후 출소했다. 흥사단 단우.

 

변성옥(邊成玉, 1892~1950)

변성옥은 외국선교비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인 선교정신은 민족독립운동에 연결되어,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1943년 길림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해방될 때까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898~1959)

죽산을 개인적인 삶에서 사회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3.1혁명이었다. 강화에서 3.1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했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죽산 조봉암이 1957년 《희망》 2·3·5월호에 실린 「내가 걸어온 길」에 밝힌 내용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서대문형무소로 갈 때의 나와는 전연 딴사람이었다. 나는 나라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1948년 5·10선거 때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당시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직을 맡았다. 매일신보 광고와 해군장병 위로금 150원 후원 등에 노동조합 조합장 이름으로 올려 서훈을 받지 못함.

 

김분옥(金芬玉, 1903~1966)

3.1혁명 유점선(3.1운동,대통령표장,2014)·노예달(3.1운동,대통령표장,2014)·신특실(3.1운동,건국포장,2014)·유관순·서명학·김분옥 6인 결사대

 

현포(玄圃) 이병홍(李炳洪, 1891~1955)

독립운동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1부장, 2,3대 민의원 진주에서도 3월 18일부터 5월까지 대소 20여 회에 가까운 시위에 3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다. 진양군 내에서 발생한 주요한 만세 시위운동은 정촌면과 미천면을 들 수 있다. 단성면 배양리에 거주하던 이병홍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정촌면 관봉리 강재순에게 서울의 3.1혁명을 목격하고 숨겨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넘겨주고 동지 이종언과 수백장의 선언서를 찍어내어 인근 동지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여 다 같이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등 조국 광복에 힘썼다.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1947)

1918년 말 여운형은 상하이에서 서병호, 조동호, 장덕수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고 김규식을 초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또한 김규식의 독립청원 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그는 장덕수를 일본에 보내 일본 유학생들에게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의 참석을 알리게 하고, 기타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국내 각처로 보내 이 사실을 국내에 알리도록 했다. 그 무렵 북경에 있던 이광수는 이 소식을 가지고 동경에 돌아가 2.8독립 선언을 기초하기도 했다. (이는 1919년 3월 1일, 삼일만세운동으로 이어진다) 일본정부는 3.1운동의 열기를 자치운동으로 회유하기 위해 여운형을 초청했다. 이에 임시정부 쪽에서는 반대했으나 몽양은 안창호, 쑨원, 미국 기자들과 상의한 뒤 일본에 건너갔다. 이 기회를 역으로 이용하여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고위층을 만나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독립의지는 그를 초청한 주무장관이었던 고가 척식장관이 크게 감탄할 정도였다. 그의 활약상은 일본 영자신문과 상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에 자세히 보도되었다. 장덕수는 여운형의 '동경회담'에 통역으로 선정되어 거주제한에서 풀려났다. 친일인명사전 등재

 

김명신(金明信, 1899~1974)

1919년의 3·1혁명 직전 서울에서 만세시위 유인물과 태극기를 인쇄하여 해주군으로 비밀리 이송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해주군 해주읍내에서 최성모, 박희도, 오현경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

 

김기만(金基萬, 1892~1956)

중국 상해에 멀리 유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과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항상 도모

 

오봉(五峰) 박현식(朴顯植, 1894~1954)

1934년 8월 ‘조선어 표준말 사정 위원회’가 구성되고 사정위원으로 앞서 공표한 한 맞춤법 제정 위원들 이외에 각 도별 인구비례로 위원을 포함한 선정하니, 오봉선생은 백낙준 방종현 제씨와 함께 평안도를 대표했다. 망우리에 오봉 박현식·주산 신명균·명재 이탁 등 세 분이 활동했다.

 

박희도(朴熙道, 1889~1952)

3.1혁명 33인 민족대표. 친일인명사전 <동양지광사> 사장 등재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鎔, 1902~1951)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혁명과 관련하여 제적당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친일인명사전 교육/학술 등재

 

임용하(林容夏, ?~1949)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4월 16일 오현경 김명신 등 해주의 지역 유지들과 더불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경에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녀 8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35년 그는 해주 청룡면 면협의원에 당선되었다.

 

김찬두(金瓚斗, 1897~1948), 학년 및 나이 세브란스의전 1학년 22세, 출신지 평양, 주소지 경성 화천정 126번 오한영 집, 판결내용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미결 90일) 서흥 지경의 검시관으로 활동했다.

 

소설가 계용묵 일본 천황을 욕하여 2개월 구류를 살았다는 풍문이 있다.

 

 

이장하신 분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 1884~1949)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 법무부장, 국무위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임시정부)

 

봉암(浲菴) 나용환(羅龍煥, 1864~1936)

3.1혁명 민족대표 33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3.1운동)

 

근곡(槿谷) 박동완(朴東完, 1885~1941)

3.1혁명 민족대표 33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3.1운동)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 1858~1925)

3.1혁명 민족대표 33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3.1운동)

 

인암(仁菴) 홍병기(洪秉箕, 1869~1949)

3.1혁명 민족대표 33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3.1운동)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90~1945)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을 초기에 기획한 48인 1963년에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문화운동)

 

김병진(金秉軫, 1895~1964)

1919년 3월 18일 오후 4시 경북 안동군 안동읍내 시장 시위 주도 2006년에 대통령표창(3.1운동)

 

박승룡(朴承龍, 1892~1957)

1919년 3월 10일 아침 700여 군중이 이원읍 읍내 장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3.1운동)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 1902~1937)

1919년 4월 나운규는 회령교회 최경재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3·1 독립선언문 수천 장을 비밀리에 등사했고 시위행진용 태극기도 수천 장 만들었다. 시위를 벌이기 직전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기습 시위를 감행.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만주방면)

 

강학린(姜鶴麟, 1885~1937)

1919년 3월 7일 당시 성진군 성진읍 욱정기독교회 목사로 재직하던 중 김상필·강희원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인근 각처에 연락을 취하는 등 준비를 갖췄다. 3월 10일 캐나다 선교사 구예선이 운영하는 제동병원 광장에 모인 5천여 명의 군중들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궐기사를 하여 군중들의 기세를 높였다. 그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벌여 일본인 상가, 경찰서, 우체국 앞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경이 무력으로 이들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오히려 군중의 분노를 사서 투석전이 벌어졌다. 이날의 시위로 인하여 그는 안성윤 등과 함께 주동 인물로 붙잡혔다. 그는 소위 소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청진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불복 공소하여 같은 해 9월 2일 경성복심법원과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 4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3.1운동)을 추서하였다.

 

김봉성(金鳳性, 1901~1945)

1919년 3월 1일 평북 선천군 선천읍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포장(3.1운동)

 

송계(松溪) 김정규(金貞奎, 1883~1960)

1919년 3월 20일 중국 길림성 훈춘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에 있어서 주동자인 황병길의 뒤를 이어 연설하고, 시위에 모인 군중 800여명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은 손마다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큰소리로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만주방면)

 

지기(知期) 문명훤(文明煊, 1892~1958)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평남 맹산에서 시위를 주동한 후 다시 상해로 건너갔다. 1920년 4월 1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의 서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68년 대통령표창(국내항일)

 

송암(松嵒) 서병호(徐丙浩, 1885~1972)

3·1혁명의 기반을 조성한 후 상해로 귀환.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80년 건국포장(임시정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정부에서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직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1921년 임시정부 안에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했습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임시정부)

 

조종완(趙鍾完, 1891~1945)

1920년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지원을 위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이후 일경에 붙잡혀 1921년 6월 9일에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평양에서 이윤재·오경숙·김찬종·김항복 등이 중심이 된 동우구락부에 가입하였다. 동우구락부가 수양동맹회와 통합하여 결성된 수양동우회 1926년 1월경 가입하여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5년경 일경에 붙잡혀 예심에서 면소판결을 받았으나 다시 기소되어 1936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68년 대통령표창(국내항일)을 추서하였다.

 

명재(命齋) 이탁(李鐸, 1898~1967)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사관연성소 특무반장에 임명되었으며, 청산리독립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21년 9월에는 길림에서 교성대를 편성하게 되자, 대장에 나중소, 부관에 최준형, 중대장 이범석, 그리고 소대장에는 그와 이민화·김훈·남익 등이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3년에는 길림성 거주 교포들의 교육기관인 화림의숙에서 교사를 지냈으며, 1924년 체포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6년 12월 15일 가출옥하였다.

1929년부터 오산고등보통학교 교사로서 한글발음 표기방법과 조선문의 맞춤법 등을 연구 발표하였고 조선어학회원으로 철자위원 및 조선어통일제정위원 등에 위촉되어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우리민족 고유의 한글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68년 대통령표창(만주방면)을 추서하였다.

 

해광(解光) 김사국(金思國,1895~1926)

박원희(朴元熙,1898~1928) 부부

김사국 1919년 국민대회사건으로 2년간 옥고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국내항일). 박원희 1927년 4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망라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으며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서 계몽강연에 힘쓰는 등 활발한 활동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국내항일)

 

소아(素我) 김진성(金振聲, 1892~1968)

임시정부와도 연락을 취하였는데 이때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되었으나 유동열·양기탁 등의 석방운동으로 2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그 후 전남 광양지방의 지주들로부터 군자금 7천원을 모금하여 양기탁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의원단이 내한했을 때에는 격문 천여 매를 만들어 배포하고자 하였다. 1920년 9월에는 김교우·김한규 등과 함께 고산의 부호 고갑준을 설득하여 현금 9,600원을 받아 상경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한 뒤에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건국포장(국내항일)

 

백대진(애족장,국내항일,1990)

서울 사람이다.

1920년 8월 매일신문(每日新聞)의 특파원으로 동삼성(東三省) 심양(瀋陽)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美國) 국회의원 시찰단과의 신문기자 회견을 한 기사가 배일(排日)적이였다는 이유로 일경에 의하여 신문사를 강제로 사직당하였다고 한다.

1922년 11월 월간지인 ≪신천지(新天地)≫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 조선의 일본통치가 폭력에 의한 강압정치라고 규탄하면서 독립사상을 선전하여 고취시키는 항일운동을 하였다.

즉 1922년 11월호에서 '일본위정자(日本爲政者)에게 여(與)함'이란 제목하에 친일단체에 대한 소위 '참정권 문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주장하였으며, '민족의식 발달(民族意識發達)'의 장에서는 4천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서 국내외에 자랑할 만한 민족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역설하다가 1922년 11월 6일 일경에 붙잡혔으며 동 잡지의 판매가 금지당하였다.

동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신문지법(新聞紙法)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으며 1923년 1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형이 확정됨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4년에는 월간잡지로 ≪농민(農民)≫을 발간하였으나 내용이 비친일적이라 하여 폐간처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선우훈(애족장,임시정부,1990)

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

1911년 9월 평북 선천(宣川)의 신성(信聖)학교 재학 중 일제가 신민회(新民會) 회원을 탄압하기 위해서 조작한 소위 사내(寺內)총독 암살모의사건(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 석방될 때까지 일경의 악랄한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15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으며, 학문을 닦았다. 1921년 11월에는 이곳 3 1당에서 대한적십자사 총회가 개최되어 안창호(安昌浩)를 회장에 추대하였으며, 그는 양 헌(梁 ) 한진교(韓鎭敎) 이유필(李裕弼) 김 구(金九) 등과 함께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한편 그는 친형인 임시정부 교통차장 선우 혁(鮮于爀)의 밀명을 받고 독립자금 조달을 위하여 국내에 파견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33년 이후에는 고향인 정주(定州)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있으면서 군자금 조달 및 민족사상 고취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익환(애국장,국내항일,1990)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05년 서울의 광무일어학교(光武日語學校)에 들어가 2년간 수학한 뒤 1907년 가을에 종사도량형사무국(從事度量衡事務局) 통영관을 거쳐 탁지부(度支部) 세무주사(稅務主事)와 충남 서천군(徐川郡) 재무주사(財務主事)를 지냈다.

1909년 서천군 재무주사 재직중, 그는 한때 일진회(一進會)에 관계했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국외 망명을 결심하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금 3천여원을 사취했다가 이일이 발각됨으로써 징역 7년형을 받았다.

1915년 출옥한 이후 만주 봉천(奉天) 등지를 왕래하던 그는 1917년경부터 세계정세가 급변되면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자 독립 달성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1918년 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 동지 전 협(全協)과 결합하여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은 독립달성을 위해서, '조선 민족의 정신 통일과 실력 양성'이 급선무라는데 뜻을 모으고 그의 실천 방안으로서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전국적 조직을 목표로 하고 활발한 조직 및 선전활동을 펴나갔다. 이때 최익환은 동단의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동단 발행의 각종 인쇄물 등을 작성·배포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그가 자금 모집을 위해 관여했던 거간(居間) 중매가 금품 사취로 되어 동년 5월 23일 일경에 붙잡혔다. 일제도 처음에 이들이 대동단과 관련된 것을 몰랐으나 조사 과정에서 대동단원으로 밝혀짐에 따라 최익환을 비롯해 선전물의 작성, 인쇄 배포에 참여했던 권태석(權泰錫)·나경섭(羅景燮)·김영철(金永喆) 등도 붙잡혔는데, 이를 보통 대동단사건이라 부른다.

이일로 그는 소위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出版法) 위반죄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5년에 대동단의 동지였던 권태석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폈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될 때에는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유진태(애국장, 국내항일, 1993)

 

충북 괴산(槐山) 사람이다.

1897년경 대한제국(大韓帝國) 무관학교(武官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19년 3월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할 유림단(儒林團)의 독립청원 장서(長書)가 비밀리에 작성될 때에 평안남북도 지역의 서명자 확보를 책임지면서 적극 참여하였고, 김창숙이 장서를 휴대하고 중국으로 떠날 때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등 먼저 망명해 있던 인사들에게 소재장을 써 줌과 동시에 장서 및 자금의 안전한 반출 방법에 관해 조언하고 박돈서(朴敦緖)를 동행인으로 소개해 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나중에 일경의 취조를 받게 되고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어 1921년 6월 26일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의 설립을 주도하여 순회강사와 순회문고 운영 등의 방법에 의한 청소년 계몽을 계획하였고, 동년 12월에 미국의 워싱턴에서 개최될 예정인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제출하고자 이승만 등이 주도하여 동년 9월에 작성된 진정서, 즉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에 조선교육회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 3월 23일 이상재와 함께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창립을 주도하고 이사(理事)로 선임되어 전국순회 강연회 및 한글강습회 개최 등을 통한 청년계몽과 인재양성 등 장학활동에 주력하였고, 1930년대에는 이사장에 선임되어 1938년 4월 2일 일제의 이른바 신교육령(新敎育令)에 의해 협회가 해산될 때까지 계속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9일 서울에서 20여 개 단체 관계자 30여 명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발기준비회가 구성될 때에 10인 준비위원 중의 1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23년 3월 30일 서울에서 발기총회를 가진 조선민립대학(朝鮮民立大學) 기성준비회(期成準備會)의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민립대학 설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후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될 때에 그 운영기금으로 1만 원을 희사했다고 전해지는 그는 동년 12월 10일 신간회 경성지회 제2회 정기대회 석상에서 경성지회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12월 13일 신간회 중앙본부가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보고하고 대대적인 항일시위를 촉발하기 위해 개최코자 한 민중대회(民衆大會) 활동과 관련해서 일경에 검속되어 취조를 당하였다.

1930년 11월 9일 신간회 전체대회를 대신해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22일 조선일보(朝鮮日報) 제7대 사장에 취임하였고, 동년 5월 10일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처럼 그는 독립운동자 후원 활동, 청년계몽 및 인재의 발굴과 양성을 통한 민족교육운동, 물산장려운동, 신간회운동 등 다방면으로 민족독립운동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월파(月波) 이태건(李泰建, 1885~1958)

1907년 4월 양기탁 안창호 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77년 대통령표창(계몽운동)

 

계산(桂山) 김승민(金升旼, 1872~1931)

1931년 11월 20일 중국 안도현에서 서거했다. 1906년 최익현 등과 함께 의병운동에 관여하였으며 1906년 5월 18일에는 오적토벌관계로 일본군 감옥에서 1년 반 옥고를 치렀다.

1909년에는 해아밀사사건으로 서울 경무청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중국을 망명하여 1920년에는 봉천성 안도현에서 홍두식과 함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광복단을 조직하여 300명의 단원을 무장시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렸으며, 1923년 가을에는 흥업단·군비단의 3개 단체를 통합하여 광정단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에는 만주 봉천성 안도현에서 대동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약하다가 간도 일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다시 1년간 옥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건국포장(만주방면)

 

미서훈 항일투쟁 및 항일무장투쟁가

 

오기선(吳基善, 1877∼1946)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박희도·오화영·정춘수와 함께 감리교 지도자와 YMCA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데 참여하였고 특히 천도교와의 연합운동에도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함. 서훈 준비

 

초허(超虛) 김동명(金東鳴, 1900~1968)

남들이 14세에 들어가는 중학교를 17세에 입학하고 두 학년을 건너뛰어 3년 만에 영생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서 1년간 놀다가 간신히 근처에 있는 동진소학교 선생이 되었지만 기구한 일생은 그때부터였다. 취직한 지 겨우 한 학기만에 학교를 쫓겨났다. 3·1혁명 두 해 후면 아직 살벌한 분위기인데 모친을 닮아서 입이 촉바른 그가 그만 3·1혁명 찬양 발언을 학생들 앞에서 해 버렸다.

 

산남(山南) 채동선(蔡東鮮, 1901~1953)

3.1혁명 참가로 인해 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해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공부했으며 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 슈테른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4회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

 

향산(香山) 이영학(李榮學, 1904~1955)

수양동우회에서, 오정은은 다시 이영학·박춘근·차균상 등과 함께 흥사단 일반회원인 주현칙을 반장으로 하는 제1반에 속하였다. 1931년 봄 무렵, 오랫동안 정간되고 있었던 동우회의 기관지 『동광(東光)』의 속간 비용으로 금 1백 원을 지출하였다. 1936년 10월 17일 선천군 선천읍 천북동(川北洞)의 오순애(吳順愛)의 거처에서 안창호(安昌浩)·이영학·장이욱·주현칙·이광수(李光洙) 등과 회합하고 안창호에게서 동지 획득을 통한 동우회의 확대와 강화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수암 최백근(崔百根, 1914~1961)

1932년 4월 27일 출판법 위반혐의로 부산지법, 진주지원에서 금고 6월 선고(항일운동 관련)받고 투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