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 광복군 《사상계》 발행인 민주주의 투사 의문사 당한 장준하 50주기

독립전쟁 학병으로 외우 『장정』의 김준엽과 임정 찾아 6천리를 걸었던
『돌베개』의 장준하 항일무장투쟁 광복군
1975년 ‘5.16군사쿠데타’ ‘유신독재’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모종의 거사를 준비 도중,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당한 50주기
새벽에 일어나 적는다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산소에 다녀왔다
벌초로 갈라진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벌초로 생긴 이 손바닥의 상처는
사고 난 뒤 경찰에 의해 장준하가 산에서 추락하는 도중
소나무 가지를 붙잡아 생긴 것이라며
그의 추락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왜곡되어 발표되었다

망우리 가족 묘지는 나무숲이 우거져 떼 한 장 살지 않아 2021년 장준하추모 공원으로 이장하였다.
김준엽의 어머니 묘역은 장준하 가족묘지 터 위
구리둘레길 바로 아래 남아 있다.
장준하 죽음으로 문익환 목사와 일초 고은(태) 시인 등은
허물을 벗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장준하 뒤를 이어 투쟁했다.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광복군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죽음과 유택에 관련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 3.1혁명 옥중 투쟁 고문으로 순국하여 이태원공동묘지에 묻혔다
1936년 망우리공동묘지 이태원공동묘지무연분묘 28,000여기 합장묘에 묻혔다.

유관순의 어린 시절
서해 최학송 소설가는 청소년기
만주에서 갖은 고생으로 배창시 쫄쫄 골아 30살에 환장하여 죽었다. 마지막엔 병원에 입원하여 수혈까지 받았다. 시인 신석정의 사촌 매형이자 문우인 소설가 이익상은 35살에
나는 서해에게 헌혈을 많이 해 일찍 죽는다고 하였다.
서해의 사망진단서 서명을 경성의전 유상규 강사 몫이었다.
북한의 평양에 살고 있던 둘째 아들 최택은 1985년 북한 잡지 《조국》에 「생활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제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굶어 쓰러져 죽었다.”고 밝혔다.

조운과 서해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은 ‘만주벌 호랑이’ 일송 김동삼 항일무장투쟁가, 옥사하자 주검을 모셔 와 심우장에서 5일장으로 치렀다.
일송의 유언대로 화장하고 뼛가루를 한강에 뿌렸다.
만해의 생애 중 단 한 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만해가 심우장에서 순국하자 일본인이 운영하여 시설이 나은 홍제동 화장장을 무시하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어른들의 합심으로 망우리에 모셨다.

‘흥사단’ 도산 안창호 선생은 마지막 병석에서 “망우리 상규군 옆에 묻히고 싶다”고 하여 조카사위 김봉성이 아버지 모실 자릴 내줬다.
추담 허연은 김규식 박사 추천으로 미국 유학 경제학 석사로
이기붕 처가 되는 박마리아와 선을 봤다
미군정에 협조 않고 수양동우회 사건 투옥 때 입은 몸 병환으로 '도산의 발치에 묻어달라' 유언으로 망우리에 유택을 자리잡았다.
백범 도산 동우이탁
‘애원서’ 호암 문일평 선생 장례를 치르고 다석 유영모 선생은 아내와 평생 벗으로 살았다.
『씨알의 소리』 함석헌 선생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하에 흔들릴 때마다 도산과 호암과 만해 등의 망우리 유택을 참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며 『근역서화징』 저자이며 간송 전형필 문화재 수집 멘토인 위창 오세창 6.25전쟁 중 대구에서 운명하여 사회장 장례를 치르고 전후에 망우리로 이장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인 월파 김상용 피난 부산
전시대학 이대총장 우월 김활란 박사 생일 초대받아 게장 먹고 식중독 걸렸는데 처방을 잘못 받아 운명했다.
전시 후 우월과 여동생 김오남 시인이 주도하여 망우리로 이장했다.
동요와 동시 240여 편을 남긴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은 1.4후퇴 때 배 안에서 언 찬밥 몇 숟가락으로 버티다 위암 걸려 한국 최초 의료보험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한 장기려 박사가 수술을 하였다. 간암으로 운명했다.

「찔레꽃」 신문연재 대중소설 ‘순수 귀순을 버려라’ 여장부 끝뫼 김말봉 최초 부산출신 신춘문예 소설 당선자, 여성장로, 여성예술원 위원 등이다. 3.15 부정선거 여성계 대표 김활란 김말봉 맹활약 4.19혁명 후 이대총장 출신 빠져나가고 독박을 썼다. 마지막 부산 여행 폐암으로 운명했다. 혼인신고 첫 번째 남편 ‘찔레꽃’을 좋아했던 전상명의 친구인 두 번째 남편 이종하 아나키스트 옆에 묻혔다. 그 외 두 분의 남편이 더 있었다나?
20살 약관의 나이로 <마리서사> 서점을 열어 문단을 휘어잡았다. 「세월이 가면」·「목마와 숙녀」 6.25전후 명동을 쓸고 다닌 버버리 코드 미남 시인 박인환, 해방공간 당시 이만한 문학인은 없었다. 미군의 횡포를 폭로한 「인천항」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한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가 대표작이다. 경기중 2학년 영화관 출입으로 퇴학당한, 영화평론 59편을 남겼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설립을 주도했다. 시인 이상을 흠모해 4월 20일 기일을 3월 20일로 착각하여 추모시 「죽은 아폴론」을 한국일보에 3월 17일 발표하고 3일 연짱 폭음한 뒤 20일 밤 9시 즈음 ‘생명수를 달라’ 외친 후 운명했다. 이정희 여사 시인의 유품을 거의 다 불살라 버렸다. 10년 뒤 시인 김수영이 남자 박인환 여자 전혜린 두 분을 경박한 감상주의자 겉멋만 부리는 모더니스트라 애증 관계로 낙인을 찍었다.
김수영 박인환
국민화가 대향 이중섭은 거식증으로 굶어 죽었다. 무연고 주검으로 3일 동안 적십자병원 영안실에 누웠다. 시인 구상 김광균 화가 김병기 소설가 김이석 등 누가 먼저 대향의 주검을 확인하였는지 얘기가 애매하다. 김이석의 아내 소설가 박순녀 소설가는 화가 황명수라고 귀띔해줬다. 망우리에 환장하여 죽은 대향과 서해 최학송 무덤 앞엔 구황 열매 개암이 지금쯤엔 익어간다. 대향의 유택은 새로 단장했다. 종손녀가 작은할아버지 잘 살았던 과거를 되살려 호화롭게 꾸몄다. 시인 구상과 조카 이영진이 심었다는 소나무도 베어냈다. 그 뒤론 참배 길이 더디다.

소설가 박순녀 친필
대향의 묘비를 제작한 조각가 차근호, 대향의 묘를 쓰며 형님과 함께 죽겠다며 구덩이에 들어가려 하였다.
수유리 4.19혁명 학생기념탑 선정 문제로, 유서를 신문사에 보내고 자진한 차근호 묘지도, 1964년 망우리에 평양출신 이병일 감독이 주도하여 썼다는데 행방이 묘연하다.
<지원의 얼굴> 조각가 권진규 무사시노 예술대학 졸업 80주년 기념 설문에서 졸업생 최고 예술가로 선정되었다. 고려대학교에 조각 작품 몇 점을 판 뒤 동소문동 작업실에 작업 쇠줄에 목을 매 자진했다. 가족묘지 참배 길이 미로였다. 2022년 탄신 100주년 묘지를 단장하며 참배 길도 환해져 수월하다.
조선 최고의 식물분류학자 장형두 서울대학 사범대 부교수. 이종조카 밀수 사건 ‘집안 빽쓸 사람 부라’는 경찰에 까칠한 이모부를 불었다. 독립전쟁 기간 중 항일무장 독립군 잡아다 족친 그 유명한 서울중부경찰서로 붙들려가 3일 후 인천경찰국에서 주검으로 운명했다. 신현모 제헌의원 의제로 채택하여 따졌으나 지금도 좌익사범 낙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승>의 함세덕 극작가 친일 반공극 월북 이승만 비판 6.25남침 인민군 선무반으로 6월 29일 신촌 부근 수류탄 앞으로 던지며 ‘돌격 앞으로’ 외치고 자신만 나섰다. 적십자병원에서 장례식 마치고 망우리 가족묘지에 묻혔다.
88년 해금 뒤 조카딸이 주도한 묘비 제막 뒷면 전사의 '전'자를 지웠다.
육사 합격하고 신원조회 걸려 퇴출된 장조카가 울면서 뭉갰다고 요근자에야 알았다.

묘비 뒷면 전사에 전자를 뭉갰다 장조카 연좌제 트라우마로 묘비 제막실날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인 김영랑 6.25전쟁 신설동 지인 집 지하에 가족과 숨어들었다. 9.28수복 전 피아간 비행기 폭탄이 터지는 상황. 23일 지하실 앞 울고불고 야단인 어린애를 안고 있는 애엄마에게 자리를 내주고 집주인 아들과 얘기하다 파편에 맞았다. 그 어려운 시간 속에 의사한테 진료를 받았으나 9월 28일 운명하여 한남동과 이태원 경계지에 매장했다.
1954년 11월 14일 휘문고 1년 선배 석영 안석주 묘비 제막과 함께 영랑도 이장 묘비를 세웠다.
1990년 부인 안귀련 여사가 묻힌 용인천주교묘원으로 이장. 2024년 8월 19일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재이장하였다.

1950년 2월 망우리 김영랑
<우리의 소원> 작사가 1920년 삽화가 파스큘라 카프 동인 1940년 이후 영화 <지원병> 반민족행위자인 석영 안석주 1950년 2월 망우리 묘지 쓰며, 휘문고 예술인 9명 다음 누구인가? 김영랑이 다음은 나네! 영랑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말대로 9월 파편에 운명했다. 언령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

안석영 묘비 제막식
개신 유학자 설태희와 그 영민한 후손들 설원식 설의식 설정식 설도식 형제 집안의 가족묘지 1970년대 이후 우면산 아래 지금의 예술의 전당에서 망우리로 이장하였다.
한국의 산과 공예를 좋아하고 한국인 마음속에 살다가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는 한국인보다 한국적인 삶을 살다 1931년 40살에 식목일 준비로 과로하여 급성폐렴 홍릉수목원 관사에서 운명했다. 억수로 내리는 봄비 속에 이문동 사람들이 조를 나눠 맨 상여로 이문동공동묘지에 묻혔다. 도로 건설로 1942년 망우리로 이장하였다.

80주기 추모식 일엽스님 아들 일당스님 김종규 이사장 청량고 청담고 학생들
화단의 귀재 아소 이인성 화가
굴레방다리 근방 음식점에서 검문 문제로 시비가,
뭐 환쟁이가 격분해 쫓아온 집에서
초자 순경 권총 오발로 다음날 새벽 운명해 망우리 유택을
아들 이채원 화가 지극 정성 돌보고 있다.

이인성 묘역에 핀 해당화
대종교 비밀결사 귀일당 소속인 조선어학회 2대 간사장 주산 신명균 창씨개명 맞서 자진으로 항일투쟁
망우리 유택. 2003년 무연고처리로 실전됐다. 2017년 박용규 역사학자 노력으로 국가보훈처 서훈을 받았다

박물관 분야 선구자 석남 송석하 48년 쓴 망우리 유택 자리 후학들이
당시 유명 풍수가 정했을 것이다 답산하고프다 궁금해 한다.
자유시란 단어를 처음 쓰고
국내 최초 사회주의필화사건 항일투쟁 백대진
묘비 하나 없이 가난하게 있다는 신문 기사 국가보훈처 서훈받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사국 그의 장례식
1920년대 사회주의 항일투쟁 넘버원 김사국 박원희 부부
외동딸 김사건 노력으로 국가보훈처 서훈받아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셨다
어머니 안국당 유택 양쪽에 아들과 며느리 묘비가 서 있다
이윤옥 시인과 망우역사문화공원 항일투쟁 인물 중에 미서훈 분들의 자료를 찾아 서훈 신청 여부를 묻는 사이다.
8월에도 정용식 김명신 변성옥 세 분은 서훈을 신청해도 될듯 싶다는 의견이다.
그리고 후손이 보훈부에 신청하면 6개월 안에 서훈 여부를 판단하여 연락을 받을 수 있다.
후손이 아닌 분이나 단체 등에서 신청하면 2~3년 뒤에나 심사를 이뤄질 정도로 신청자 많다는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심사 인원을 늘리거나 서훈 조건을 완하하여 가정과 가족을 외면하고 핍박받은 현실 속에 삶을 꾸린 후손들의 피눈물을 조금이나마 국가가 나서서 위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필자와 족보에 같이 실린 정용식 항일투쟁 사실은 손주들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고향인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영산 김씨 일강 김철 항일투쟁 독립장 서훈받은 분의 집안 후손이
소설 김철을 썼다. 내용은 보지 않았으나 이번에 일강김철선생추모회를 만들며 개설한 단톡에
만석군의 집안 재산을 항일투쟁에 써버려 후손들의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일경과 밀정의 눈에
핍박받은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대통령 8.15해방 축사에서 3.1혁명이라 말을 하고
범도 작가 방현석 교수가 독립전쟁 3대 역사 용어 바로잡기 청원운동에 동참해주세요!
핸드폰 단톡에 돌리고 있다.
안중근 의사를 '안중근 장군' 또는 '안중근 참모중장'
독립운동을 '독립전쟁' 또는 '항일투쟁' '항일무장투쟁'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대를 '독립전쟁기' '항일투쟁 시대' '항일무장투쟁 시대'
중교장 정년퇴직한, 김사국 박원희 부부의 외손주인 김영열 선생님과 통화를 하였다.
김사민 항일무장투쟁가는 전기고문으로 정신이상자로 피리를 불고 북촌의 재동 계동 원서동 거리를 쏘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주며 독립운동하다 저렇게 되었다며 안쓰러워 대접하였다.
6.25전쟁 중 북으로가 나름 대접을 받았다는 전언은
여운형 선생 따님 여연구 남북 여성 협의회 북측 대표로 남쪽에 와 말씀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님 김사건 여사의 기억으론 어릴 때라 삼촌의 행동에 무섭기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님은 외가에서 살았는데 친할머니 안국당 여사와 외할머니가 만나면 싸웠는데
그 이유는 김사국 사회주의 항일투쟁하며 당시 천원을 빌며가 사회주의 건물을 사는데 사용하여
그 돈문제 사돈끼리 관계가 나빠져 친할머니가 외갓집에 오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김이석 묘비 제막실 소설가 박순녀 친필
소설가 김이석 평양종로보통학교 이중섭 1년 선배
6.25피난민 신세로 이중섭을 돌봤다
김작가 아홉살 아래인 김수영이 알아보고 4.19 때 1주일을 김이석 박순녀 소설가 집에서 뭉갰다
급환으로 김이석 돌아가자 조선일보 천관우 배려로
장례식과 묘비제막식 사진기자 찍은 사진 자료 가치 드높다

김이석 이중섭 박순녀 친필
인물열전 그 외 이장한 분
<파초> <수선화> <내마음은> 시인 초허 김동명은 2010년 고향인 강릉 사천 문중 납골당으로 모셨다
동요 <우리나라 꽃>을 작곡한 함이영 공원묘지
이기붕 박마리아 가족묘지 고양시 사설묘지
대종교인으로 정지용의 시 <고향>의 작곡가 산남 채동선 고향 보성 벌교 부용산 입구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그 외 항일투쟁
<아리랑> 영화계의 풍운아 나운규 국립대전현충원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나용환 박동완 이종일 홍병기 등 네 분과
임시정부 군무장 남파 박찬익 국립서울현충원
김병진 박승룡 선우훈 유진태 강학린 김정규 김승민 김진성 문명훤 최익환 등 국립대전현충으로 이장 안장됐다
유명인사 작은댁
화가로는 김찬영 문인으로 김유방 문화재 수집가론 김득성의 작은댁 47년 당시 최고가 다이몬드로 소문나 2인조 권총강도 살인사건 정충실
아들인 태경 김병기 화백 3.8선 넘어 월남하여 일 처리했다
여장부 김말봉이 개를 쳐준 이은상 씨앗 아들 낳은 소실댁 대리석 십자가 묘비
정말로 공동묘지 사연과 이유 없는 무덤 없다 옛말 적확합니다
지금도 답사하며 묘비를 뒤져겨 찾아내는
김쌍규 선생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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