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간도 훈춘현 3.1혁명을 주도한 애국지사
송계(松溪) 김정규(金貞奎, 1883~1960.9.14)65주기

독립운동가 송계 김정규는 1883년 6월 10일에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남도 함흥시 성내동 96번지이다. 호는 송계이다.
1913년 간도 용정촌에서 북장로파 계열의 영국인 목사 박걸이 혼춘지회를 조직할 때 참여하여 박태항·한수현과 함께 선교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중국 길림성 혼춘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에 있어서 주동자인 황병길의 뒤를 이어 연설하고, 시위에 모인 군중 800여명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은 손마다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큰소리로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9월 11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회장인 문창범으로부터 "국제연맹회의에서 한민족의 독립 문제를 논의할 때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군중들에 의한 시위를 거사하여야 한다."는 밀서를 받고 고일섭·안태국·김한익 등과 함께 협의하여 대한국민의회 본부에 시위운동 후원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시위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1921년 9월에는 전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의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협력 활동하는 등 2년 6월간에 걸친 사실이 확인되었다.
1960년 9월 14일 서울에서 서거하여 망우리공동묘지에 9월 16일 묻혔다.
비석의 앞면,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 고송계 김정규지묘 부활의 소망(第七日 安息日 예수再臨敎人 故松溪 金貞奎之墓 復㓉의 所望)'이라고 새겨져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1년 3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345로 이장했다. 묘비는 세워두었다.
2019년 3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운동가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내겠다.”며 해외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청와대 영빈관에 초대해 오찬을 가졌다. 일제강점기 3·1혁명을 계기로 항일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전선에 뛰어든 독립유공자 64명을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소개하며 평가를 했다. 특히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김정규·이경재 독립운동가 등도 일일이 거론하며 재평가를 해 감동을 주었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 삼거리 일방통행 오른쪽 길을 걷다 시인 박인환의 연보비를 지나고 송석하 선생의 묘지 터를 지나 서동일 연보비를 지나 오재영 연보비 맞은편 11시 방향 100미터 올라가면 수풀이 우거진 곳에 이장지(묘지번호 206177)가 남아 있다. 또한, 2010년 9월 초 태풍 곤파스 때 일어난 산사태로 새로 물길을 내고 석축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묘지를 이장하고 비석을 그대로 세워두었다. 이곳은 바위가 곳곳에 솟아있다. 수맥은 흐르지 않아 쾌적하다. 향은 북향으로 높이는 7부 능선이다. 안산은 송곡여고 뒷산인 봉황산이다. 조산은 불암산 수락산 저 멀리 도봉산까지 서울 동북부 노원 강북 도봉구 등으로 시계가 막힌 데 없이 드넓다.

재림교회 교인 송계 김정규 독립운동가 선종 62주기를 맞이하여 / 정종배
시 낭송가 홍성례
북간도 훈춘현 3월 20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송계 김정규 선생은
1883년 함경도 함흥군 성내동에서 태어났다
1900년대 초 연해주에 터를 잡은 치과 의료인으로
봄이 오면 심심산골 진달래가 붉게 피고
마을마다 열사비가 없는 동네가 없을 정도로
아직도 어느 한 심심 산 산골에
이름 없이 누워 있는 열사들을 헬 수 없는 곳곳에
독립자금을 보냈으며
1913년 북간도 용정촌 북장로파
영국인 목사 박걸朴傑이 훈춘琿春지회를 조직할 때 참여했다
박태항 한수현 등과 함께 선교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북돋우며 계몽활동을 펼치었다
1927년부터 송계 김정규 선생의 재림신앙은 홀로 성경을 봉독하다 찾아왔다.
성경에 쓰인 제칠일 안식일이란 표현을 보고서
자신이 지키던 주일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가족들은 장로교회를 다녔지만
1929년 전 가족이 안식일을 지키다
한반도에서 연해주로 파견된 선교사에게
1934년 현 시조사의 기반을 닦은 김규혁 목사님에 의해 침례를 받은 뒤
5대에 이르는 재림교회 명문가로 거듭났다.
6·25전쟁 후 삼육치과병원에서 잠시 근무하며
선종할 때까지 이문동교회에 출석하였다.
송계 김정규 독립운동가는
1919년 3월 20일 북간도 훈춘지역
3·1 독립선언 축하 민중대회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안중근 의사와 1909년에 결성한 단지회 11인 중 한 명인
주동자 황병길의 뒤를 이어
송계 김정규 선생이 연설하고
시위에 모인 군중 800여 명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워
군중들은 손마다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를
목구멍이 찢어져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2022.9.15.

1919년 9월 11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회장인 문창범으로부터
"국제연맹회의에서 한민족의 독립 문제를 논의할 때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군중들에 의한 시위를 거사하여야 한다."는 밀서를 받고
고일섭·안태국·김한익 등과 함께 협의하여
대한국민의회 본부에 시위운동 후원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시위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1년 9월에는 전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의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협력 활동하는 등
2년 6월간에 걸친 사실이 확인되었다.
1960년 9월 14일 서울 이문동에서 소천하시어
망우리공동묘지에 9월 16일 안장됐다.
진산인 망우산 정상인 제3보루 7부 능선 북향으로
안산은 구릉산 조산은 불암산 수락산으로 회룡고조형국이다
비석의 앞면에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 고 송계 김정규지 묘
부활의 소망'이라고 새기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 묘지 터는 2010년 곤파스 태풍에 옆 계곡은 큰물에 휩쓸려 갔어도
이곳은 무너지지 않을 만큼 명당이다
2011년 3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345로 이장했다.
묘비는 세워두었으나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흙 속에 묻혔다.
한국연합회 재림성도 독립기념회에서 2021년 9월 다시 찾아 일으켜 세운 후
2021년 9월 14일 기일에 처음으로 61주기 추모식을 치렀다.
앞으로도 매년 김 선생의 소천 일에 맞춰 추모식을 진행하고
교회와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아
소나무 숲에 계곡물이 흐르는 늘 푸른 역사를 쌓겠습니다.
송계 김정규 선생이시여 부디 천상 영복을 누리시길 빕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의 독립운동사
김정규(金貞奎)편
- 훈춘과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
김 홍 주 저
김정규 편
김정규 씨는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883년 6월 10일에서 1960년 9월 14일까지 생존하였다. 김정규 씨는 1913년에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북장로파 계열의 영국인 목사 박걸(朴傑)이 혼춘(琿春)지회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박태항(朴兌恒)·한수현(韓秀鉉)과 함께 선교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2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혼춘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에 있어서 주동자인 황병길(黃炳吉)의 뒤를 이어 연설하고, 시위에 모인 군중 800여명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은 손마다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9월 11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회장인 문창범(文昌範)으로부터 "국제연맹회의에서 한민족의 독립 문제를 논의할 때에, 김정규 씨는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군중들에 의한 시위를 거사하여야 한다"는 밀서를 받고 고일섭(高日燮)·안태국(安泰國)·김한익(金漢益) 등과 함께 협의하여 대한국민의회 본부에 시위운동 후원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시위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 국가공훈록에서 밝히고 있다.
김 유공자의 독립운동의 활동지역은 혼춘현 지방으로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그곳이 다소 낯선 지역이나 국가보훈처에서 발간된 독립운동사 제 3권에서 중국 방면의 운동에 대한 북간도 지방에서의 혼춘현 지방에서의 활동상황에 대하여 기록한 것에서 당시의 모든 정황과 분위기를 파악하고자 한다.
훈춘은 동으로 시베리아, 남으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온성, 경원, 경흥과 인접해 있어서 삼국 국경을 넘나드는 인접지역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는 시베리아니 만주니 하여 국경이 그어져 있으나. 실제로 당시 우리 민족사회에 있어서는 한 지방과도 같은 생활권에 있어서 일상생활 중에서도 서로 관련이 밀접하였다.
특히 혼춘 지방은 한인이 많이 체류하고 있는 연해주의 포세트 연추가 가깝고 또 강 하나만 건너면 함경도의 온성, 경원, 경흥 등이 있으므로 서로 접촉이 빈번하여 사회활동에도 공동보조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러한 경향은 3. 1 운동이 발발하면서부터 더욱 짙어졌다. 이 지방의 3. 1 독립운동 행사는 시간적으로 용정보다 1주일 늦게 거행되었으나 실제로 그 준비과정에 있어서나 직접 행동에 있어서는 주밀한 계획이 짜여져 있었다.
훈춘지방에는 황별길 등 많은 항일 애국투사들이 있어서 재류 한인사회에 영향을 크게 미칠 뿐 아니라 국경을 넘어 연해주 지방과 국내 인접 지방의 인사들과도 광복운동 선상에서 항상 공동보조를 취해 왔었다.
서울에서 3. 1 운동 독립선언이 발표될 때에도 황병길은 솔선해서 국내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여 왔었는데, 특히 온성군 참사 임도준과 연락을 취하며 거사할 모의를 거듭하여 다만 만세를 부르는 형식적인 시위운동에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서둘러서 수백 자루의 장총과 권총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황병길은 3월 16일 혼춘 시가로 잠입하여 거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 영사관원에게 매수된 토관, 토민이 황씨를 해하려고 하자 그들의 눈을 현혹시켜 가면서 활동하였다. 한편 황병길, 노종환, 양하구 등은 3. 1 독립선언 축하 민중대회를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거행하도록 결정하였다. 집합 시일은 1919년 3월 20일 오전 8시, 집합 장소로는 혼춘 시가 동문과 서문 사이, 동원 인원은 5,000명 이상이며 해산 시간은 동일 오전 10시로 잡았다.
이때에 지도자는 황병길, 노종한 외에 연동뢰자 광동학교 교사 3명, 남별리 이명순, 나정화, 황구 양하구, 항구 북일중학교 교원 3명, 오종환 외 7명이다. 혼춘 시가 및 근촌 박근영, 오주현, 최능완, 문병호 등 이었으며, 황구 북일 중학교의 학생 일동, 동구 영생학교 학생 일동, 연동뢰자 광동학교의 학생 일동, 혼춘 서문 밖 김병겸의 자부 및 김명호, 한두찬, 정용하의 부인 등 부인들도 함께 참가했다.
20일 오전 6시 반부터 시가의 거주 동포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정신무장을 하고 있었다. 8시 경 혼춘 동쪽 5리 거리에 위치한 차대인구에 집결한 동구, 황구, 영동뢰자 지방의 동포 3백 50여명은 대한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들고 2열 종대로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동문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먼저 와서 대기하던 황병길 등 지도자들은 군중을 맞이하여 성안으로 들어가 연도에 도열한 우리 동포와 중국인에게 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서문 밖 광장으로 나가서 원형의 진을 형성하자, 전날 집결해 있던 군중과 혼춘 시가의 동포들이 합세하여 그 수는 5천명 이상에 달하였다.
이때에 황병길은 단상에 서서 연설을 하였다. 연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10년 전에 일제에게 병탄된 이래 위로는 태황제로부터 밑으로 동포 만민이 비참한 세월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셔서 이번의 강화화의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우리 민족은 일치단결해서 설혹 가는 길에 험산지수가 가로 막혀 있더라도, 아니 강적의 뿌리 앞에 맨주먹을 휘두르지 아니치 못할 장면에 이를지라도 신명을 아끼지 말고 다년간의 숙지를 관철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대의를 위해서 능히 신명을 버릴만한 결심을 가진 분이 있으면 손을 드시오.” 라고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은 모자를 벗어 두 손을 높이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찬성하는 뜻을 표하였다.
노종환, 최병문, 김정규 등 3인도 황병길의 뒤를 이어 연설을 하였다. 군중들은 다시 동문을 향해 행진하고, 또 시가 변두리에서 수 마장쯤 되는 혼춘강 기슭에 이르러 황병길은 시민들과 작별하는 것을 애석히 여겨서 다시 원형진을 형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군중은 거듭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몇 바퀴 돌아가면서 황병길의 작별연설을 들었다. 연설의 내용은 “오늘 아무 지장도 없이 여러분과 같이 예정한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유쾌한 일입니다. 그러나 시내에 계신 여러분은 이 뒤로 더 한층 일제 관헌의 압박이 극심해질 것을 각오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참으로 동정을 금치 못하나 바라옵건데 희망을 갖고 만일 무슨 일이 발생하면 동지에게 의논하셔서 근심과 걱정을 나누어 갖게 하여 주시오.”
황병길은 말을 마치고 학생 이하 3백 여 명의 일대를 거느리고 동포대 방면으로 향하고 군중은 해산하였다. 당일 중국인은 폐점하는 일이 없이 호기심으로 우리 동포의 행동을 관망하는 태도였으나, 재류 동포는 각종 영업을 전부 휴업하고, 시내를 내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시위 군중이 해산한 뒤에도 상점을 열지 않았다. 이것은 조국을 광복하려는 배달민족의 지상염원의 표현이며, 또 이 혼춘 지방 재류 동포의 지도자인 황병길 둥의 올바른 지도력과 대중에게서 지지되는 신망이 두터운 것을 증명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일 군중 가운데에는 감격에 넘쳐 눈물을 흘리는 동포가 많았으며, 가정에 남아 있던 노유남녀들도 이것이 하늘의 명이라 하며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경비를 맡은 중국 순경들도 우리 동포의 활동에 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10일이 지난 3월 30일에도 황병길은 다시 혼춘현 한덕자에서 우리 동포들을 모아 놓고 독립운동에 관한 열변을 토하여 모인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해산하였다.
4월 1일에는 제 2회 혼춘 군중시위라고도 볼 수 있는 혼춘 북쪽에서 1백 50리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탑도구에서 역시 황병길의 주최로 약 2천명이 모여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사타진구에서도 같은 행사를 전개하였는데 군중 가운데에는 “두만강을 건너서 국내까지 밀고 들어가자”고 외치는 이도 있었으므로, 침략자 일제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하였다.
일제는 황병길 등 젊은 혁명자들을 체포하려고 온갖 음모와 외교적 수단을 다했으며, 놈들의 수단과 위협에 말려든 중국 관헌은 4월 29일 황병길을 체포하였다. 일본 영사관은 중국 관헌에게 갖은 외교적 교섭을 벌여 황병길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중국 관헌은 일제의 요구를 거절하고 황병길을 곧 석방하였다.
황병길 씨에 대해서는 국가공훈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20년 1월에 혼춘에서 의용군 1,300여명을 무장시켜 군무장(軍務長)으로서 국내공격을 지휘하였으며, 혼춘의 연통랍자(煙筒笠子)에 조선애국부인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통합하여 모연대장(募捐隊長)으로 활약하였으며, 이후 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20년 2월부터는 의용군 1,300여명을 무장시켜 경원(慶源)·온성(穩城) 등 국경지방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1920년 3월에는 합마당 상촌(蛤 塘上村)에서 홍범도(洪範圖)·구춘선(具春先)·이범윤(李範允) 등 독립군대표들과 만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방안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국민의회지부를 개칭한 혼춘 한민회(韓民會)의 경호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년 4월 과로로 인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으며, 1920년 6월 1일 이역 땅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1919년 8월 1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는 혼춘지방 한교민 회장 이명순으로부터 그 지방 독립 시위운동에 관한 보고를 받았는데, 그에 의하면 지금까지 시위운동을 일으킨 대소 장소는 합계 47개소, 운동에 참가한 인원은 약 1만 5천 87명이며 부상자 및 체포된 수가 10여 명이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는 바대로 고국을 떠나 일제의 핍박을 피하여 조국의 앞날을 바라보며 남의 나라에서 일시적으로 망명의 고달픈 생애를 살아가던 중에 지도자인 황병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취지를 동포들의 의식 속에 심어주었던 일이야 말로 지도자들이 하여야 할 일이었다. 이 일에 호응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어 내는 데에 한 몫을 담당하던 분이 김정규 씨이었다.
지사들의 조직 활동에 대해서도 독립운동사에서는 길게 부언하고 있다. 혼춘 지방은 황병길 등 독립투사들의 활약으로 동포들의 애국심이 앙양되어 각계각층에서 결성하는 애국단체가 다른 어느 곳보다 많았다. 그 대표로 혼춘현을 근거로 활약하는 대한국민회와 대한신민단을 들 수 있다. 대한국민회는 용정촌에 감독자를 둔 카나다 장로파의 기독교 신자를 중견 회원으로 하여 주로 육도구, 동구, 혼춘 평야 및 황구 부근에 근거를 두었고, 대한신민단을 대한 기독교원이 단결한 곳인데, 김규면을 단장으로 하여 주로 흑정자 일대 대반암의 동방 부락, 나자구 및 초모정자 부근에 세력을 굳히고 있었다. 이 두 단체의 계통 및 저명한 인사로는 대한국민회는 회장 이명순과 부회장 박관일 씨가, 대한신민단은 회장으로 김규면 씨, 총무로는 이존수 씨가 있었다.
이 두 단체는 니코리스크 대한국 의정부의 지휘를 받아왔는데, 독립운동을 위해서 활동하는 등의 목적은 같으나 종파가 다르기 때문에 분리된 것이다. 혼춘 시내에 이 두 단체와 유대를 맺고 항일 독립운동에 정진하는 애국투사는 약 20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문변호 및 김명호 등이 대표적 지도자였다.
혼춘 재류 청년 투사들의 활동이 치열한 반면에, 왜적의 모략도 단말마적이어서 만주 관헌을 위협, 회유, 매수하여 그들 토관을 앞세우고 우리 동포를 탄압하니, 우리 애국전선은 자연 수세를 취하고 혹은 유동적으로 활동지반을 전전 이동하면서 그 수집한 자금을 시베리아 추풍 방면에 보내어 서서히 앞일을 도모하였다.
이와 같이 간도 혼춘 방면에서 활동하는 항일투사는 직접 행동을 주로 하는 무단파로서 미국, 상해, 불리디보스톡, 니토리스크 및 국내의 문치파 즉 외국의 동정과 여론을 환기해서 독립을 도모하려는 인사들과 제휴하며, 목적을 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사양치 않는다는 결심을 가졌다.
세계 각국의 여론과 동정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각처에서 민족의 위기를 표시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대한국민회의 블라디보스톡의 요청도 있고 해서 9월 11일 밤 혼춘 북문 밖 중국인이 경영하는 사진관에서 고일섭. 김정규, 김한익, 이용인, 안태국, 조익형 등의 애국투사들이 비밀리에 회합하였다. 그들은 회합 결과 국민회의 본부에 시위운동 후원자를 파견하여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14일에는 혼춘 동쪽에서 1백 40리 떨어져 있는 사도구 요지구에서 황병길, 이명순이 비밀히 모여서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는데, 결사대에 가입한 자는 8백 명에 달하였고, 총기 4백 정은 상해로부터 블리디보스톡을 경유해서 수입할 계획이었다. 대한독립군 간부 황병길은 9월 19일에 25만 루불로 연해주에 재류하는 귀화 한국인으로부터 총기를 구입하기 위해 이명순, 나정화를 러시아로 파견하는 일과 혼춘 소성자 부근에 감추어 두었던 소총 2백정을 배당하는 방법을 협의하였다.
한편 9월 19일 혼춘현 노자구에서는 혼춘 대한국민 지회 총회를 개최하고 향후 행동방침을 심의하였다. 이곳에서도 일제는 중국 관헌에게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억제하고 애국자들을 체포해서 넘겨 달라고 책동을 하였으며, 일제의 술책에 말려든 土官은 우리의 독립운동을 제지하기 위해 군경을 엄중하게 독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독립투사들은 이중 삼중으로 장애물의 구애를 받으면서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명순, 박영호, 나정화, 오종범, 황병길, 나봉남 및 훈춘 수남 대표자 김문익, 예수교 신자 흑정 오윤연 등은 대육도구에 있는 최경천의 방에 집합하여 간략한 회합을 가졌다. 본 회의에서는 러시아 방면 독립전선의 지도자가 참석하기로 되었는데, 마침 블라디보스톡에 콜레라가 만연하여 참석하지 못하였다. 회의의 결정에 따라 9월 3일 이명순, 박영호, 나정화 삼 인은 총기 매입을 위해 15만 루불을 갖고 니코리스크 방면에 가게 되었다. 한편 나봉남은 결사대의 지원자로서 9월 10일 소추풍을 떠난 홍범도, 이용, 채영 등 일행 30명과 합류한 백 30명이 봉천성 탕현을 경유하여 국내로 진입하였다.
군정사 후원회는 혼춘현에서의 국민의회 지부장인 이명순이 담당하고, 간도에서는 동간도 지부장 구춘선이 담당하였다. 그런데 혼춘 동구 방면은 종래 마적이 창궐하여 중국 관헌은 방위상 토민들의 총기 구입을 장려한 관계로 우리 동포 중에는 소총을 소유한 자가 비교적 많아서 그 총의 수효가 7, 8백 정이 되었다. 이명순, 오종범, 나정화 등 지도급 투사들이 거주하는 촌락에서 보유한 무기의 수는 1백 50~60정 내외였으며, 그들 부하 청년들은 평온리에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춘에는 또 이주 동포 단체로서 공민회가 있었는데, 이는 일본 영사관이 감독하므로 친일단체로서 색채를 발휘하여 항일 애국단체와 겨누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회장 조익형, 부회장 고일섭은 치열한 항일의식을 품고 있어 항상 일반 재류 동포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이것은 혼춘이 간도지방보다도 항일감정이 더 한층 치열한 것을 말하여 주는 일이라고 하겠다.
1919년 9월 29일 혼춘 각지에 거주하는 한국 여성들 2백 여 명은 또 혼춘 동문 내에 있는 박봉식 집에 모여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회의 목적은 여성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독립을 후원하고 여성의 교육과 여권확장을 기도하며, 전쟁 중에는 부상병을 구호함에 있었는데, 이날 선출된 임원은 회장에 주신덕, 부회장에 김숙경, 총무에 권정숙, 회계에 오신애, 서기에 김순희, 서기에 황영은이었다.
그 중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한 몇몇 여성은 손가락을 잘라서 ‘단지 동맹’까지 하여 그들의 불타는 애국심을 나타냈다. 그들 여성들은 독립운동 의연금의 모금운동을 크게 벌려 6천여 루불을 모금하였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머리를 베어 월자를 만들어 팔고, 몸에 지녔던 반지 등 패물이며 장롱 속 깊이 저장한 옷감까지 팔아 의로운 광복운동에 바쳐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할 줄 모르고 물거품과도 같은 제 향락, 제 욕심만 채우려고 그날그날의 삶을 지속하는 일부 남성들의 얼굴을 무색케 하였다.
특히 김정규 유공자에 대한 문헌상에 나타난 각종 자료들을 대층 정리한 것 중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데이터로 입력한 각종 일본의 문서 중에 나타난 것들로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김정규 씨 문서 정리
1925년 8월 8일자 불령단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재서비리아(15) 책명에 문서 제목으로 노령 연해도 극동혁명위원회의 고려위원회의 소집에 대한 보고 중에 기밀 2 - 240호로 재간도총영사 금목요태랑이 외무대신 폐원희중랑에게 보낸 문서 중에 대정 14년(1925년) 7월 2일 오전 8시에서 동 12시까지 가졌던 회의임, 포조 당구락부 제 1호 회의실에서 해삼부고려위원회 자격으로 참석하고 있는바 도합 24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1919년 10월 3일자로 혼춘부영사인 추주도삼랑이 외무대신 내전강재에게 보낸 불령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 재만주의 부(12) 공신 제 215호의 공리회에 관한 건 중에 한족공교발전이란 제하에, 이단, 서춘삼, 김시화, 이윤서 등 근 82명의 명단이 함께 거명된다. 이때에 사건명은 훈춘 공교회의 독립군과의 접촉이며 지명으로는 혼춘현 동구와 동녕현이며 참석자는 공교회 각 교구 임원들로 되어 있다.
1919년 3월 28일자로 혼춘부 영사 추주유삼랑이 외무대신 내전강재에게 보낸 기밀 공신 제 40호의 불령단관계 잡건 조선인의 부 - 재만주의 부(9)의 문서 제목 한국독립 시위운동에 관한 건 중에 김정규 씨는 황병길의 간도 독립만세운동 이후에 연추행, 일경의 혼춘 한인독립 만세시위에 대한 경계, 대한국민회의의 독립선언서의 포고, 혼춘 한인의 한족중앙회와 민족자결 문제 협의, 혼춘 대한민국의회의 독립선언서 반입 배포, 배일한인의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조선독립 승인 노력 등에 개입한 인물이다.
1921년 7월 13일자 秘受 8634호 機密公信 제 36호의 불령단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 재만주의 부(28)에서의 불령선인 명부 송부의 건으로 훈춘부영사 추주유삼랑이 외무대신 내전강재에게 보낸 문서 중에 혼춘한민회 중에 김정규 씨가 들어 있다. 이곳에서는 384명의 이름이 실려 있다. 이때에 김정규 씨는 대정 팔년(1919년)에 독립시위운동에 관여한 분으로 기입이 되어 있다.
1919년 5월 21일자 혼추부 영사 추주유삼랑이 외무대신 내전강재에게 기밀공신 제 66호인 불령단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 재만주의 부(11) 혼춘현 내에 있어서 한조자결운동결사에 관한 건 중에서 김정규 씨는 대한국민회의 평의원으로 혼춘 한인의 자결운동에 참여한 분이다.
1919년 5월 8일자로 혼춘부 영사 추주유삼랑이 외무대신 내전강재에게 기밀공신 제 57호인 불령단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 재만주의 부(10)에서 자결운동단 및 운동자의 건 중에 대한국민의회의 평의원으로 혼춘 춘화향 남별리에 대한국민의회 지부를 설치하고, 춘화향 초모정자에 대한신민단 설치에 관여하고 있었다.
1919년 9월 27일자로 불령단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 재만주의 부(12)의 국외정보로 고경 제 27534호로 총리대신 등에게 보낸 것 중에 혼춘 지방에 있는 한족독립계획에 있어서 최근 포조 대한국민의회 회장 문창법이 혼춘에 거하는 동지들과 함께 국제 여론에 저들의 독립운동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고일섭. 김한 씨와 함께 열거된다.
1914년 10월 9일자 불령단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 재만주의 부(4)의 재간도 배일선인 동제회에 관한 건으로 朝憲機 제 663호로 조선주차헌병사령부에서 조선총독 寺內正毅 등에게 보낸 문서 중에 김정규 씨는 銅佛寺지회장으로 거론된다. 이곳의 열거된 많은 단체들이 있는바 이들 모두는 靑年親睦會의 雜誌 靑年 發行, 靑年親睦會의 會員募集, 靑年親睦會 臨時總會 開催, 大同協新會와 靑年親睦會를 合同하여 同濟會로 改稱, 墾民會 解散, 勸業會 解散以後 露領韓人의 間島移居, 日本 同濟會의 解散 위해 中國官憲과 交涉, 日本의 排日韓人 逮捕를 위해 中國과 協議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1914년 10월 23일자로 불령단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 재만주의 부(4)에서 간도총영사 대리가 외무대신 가등고명에게 기밀 제 69호로 보낸 배일적 선인단체 동제회에 관한 건에서 헌병측의 통보, 동제회에 관한 취조방법의 건 회담(기밀 제 48호, 1914. 10.22)에서 아래와 같이 내용을 담고 있다. 子街에 靑年秘密團 組織, 局子街 靑年秘密團을 靑年團으로 改稱, 局子街 靑年團을 靑年親睦會로 改稱, 墾民會員을 靑年親睦會員으로 入會, 局子街 靑年親睦會를 同濟會로 改稱, 墾民會 解散 後 靑年親睦會 혹은 獎業會 設立公認, 同濟會 支會 設立하였다. 이곳에서 김정규 씨는 동불사의 지회장으로 되어 있다.
1919년 6월 9일자 불령단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 재만주의 부(11)의 시내 조선인의 민정에 관한 건 기밀공신 제 75호로, 혼춘부 영사 추주도삼랑이 외무대신 내전강재에게 1919년 5, 17일자 혼춘 한인이 혼춘 영사에게 보낸 원서란 첨부 문건에서 김정규 씨는 혼춘 한인 수뇌급으로 배일사상을 가지고 일경에 체포되고 취조차 인도되는 수난을 받고 있었다.
1919년 8월 23일 자로 조선총독관방외사과장이 외무성정무국장에게 불령단관계 잡건 - 조선인의 부 - 재서비리아(8)의 재노 지방 방면의 선인의 상황 송부의 건 관비 제 290호에서 재외 선인 일반의 상황 및 그에 대한 대응책(재노지방면, 1919, 8, 1)에서 김정규 씨는 북간도 혼춘에서 황병길 씨와 함께 1919년 7월 26일에 경원헌병대로 인도되었다. 그는 자금 모집과 결사대를 모집하여 일경을 괴롭히다가 체포된 배일 세력 중의 김명호, 조익령, 문병호씨와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김정규 씨는 혼춘 지방에서 삼일운동,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무기구입, 독립시위 운동에는 늘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김정규 씨에 대한 국가유공자 공훈록에는 그가 속하여 있던 단체를 결사대로 분류하여 기록하였고, 만주 훈춘 지역의 독립운동을 관장한 자로 수록하였다.
혼춘 지방의 기독교의 상황에 대한 보고 중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포교되었는지에 대한 상황에서 1902년 음력 8월 영국인 선교사와 조선인 김운열 씨가 등장하며, 1913년 간도 용정촌에 영국인 목사 바카(한국명 朴傑) 씨가 북장로파 교회를 창설하여 같은 해 조선인 전도사 김관식을 파견하여 혼춘지회를 만들어 기독교 관할 하에 넣고, 이후 박태항. 한수현, 김정규 씨 등이 이주하여 열성적인 선교에 의한 노력으로 교세를 이루게 되었다고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 혼춘 지방에서 발생된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지도자 역할을 한 김 유공자가 있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잊을 길이 없다. 또한 그러한 지도자들의 역량으로 인하여 여인들의 숭고한 행위가 역사에 그대로 보존하게 됨이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었던가! 그러한 열정과 불타는 헌신의 노력으로 인하여 조국광복이 되기까지는 그때로부터도 많은 세월이 요하여 한 세대가 지난 때였다. 저들 중에는 고국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타계하였을 것이고, 저들 후손들의 많은 이들이 영영 조국의 품에 안겨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과 소련에 남아 있게 될 수밖에 없었던 민족의 고난사에 대하여 실로 마음 아프기 한이 없다.
김 유공자께서는 한참 독립운동으로 모든 힘을 소진하고 있던 시기가 끝날 무렵에는 평소에 지녔던 장로교회의 신앙에서 새로운 기별인 안식일과 재림에 대한 사상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단에서 목사들을 훈춘지방에 파송하였을 때에 저들의 사역을 통하여 개종하신 분이다. 김정규 씨의 아들되시는 김중정 선생께서는 자신의 선친에 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와 관련된 행적 중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여준바 있어 실리고자 한다.
김정규 씨는 자신이 18세의 청년의 시기에 일찍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여 장로교회 신자의 신앙을 하다가 1927년에 본인이 27년간 신앙을 하던 중에 성경을 스스로 연구한 결과 안식일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참다운 진리임을 깨닫고, 만주 동북 길림성 동불사란 곳에서 가족을 이끌고 장로교회에서 개종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먼저 진리를 마음에 새긴 다음에는 가족에게 장로교회로의 출입을 금하게 한 다음, 가정에서 안식일을 지키다가 1930년경에 문서전도자인 김완식 씨를 만나 안식일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후 수년이 지나 1934년경 김규혁 목사에게서 부인 최정희와 함께 침례를 받고 모친과 함께 입교하여 조양천교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김정규 씨는 일경의 추적으로 흑룡강성으로 도피하여 수년 후에 간도로 돌아와서 연길교회에 참석하여 장로의 안수를 받았다. 당시 그곳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로는 차용준, 이면득, 김규혁, 정동심 목사 등이 있었다. 그러던 중 김정규 씨는 원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혼춘으로 1941년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되던 해에 이사하여 김창수 목사의 누이 동생인 김선숙 씨 가정에서 함께 안식일학교를 갖다가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15일까지 신앙생활을 신실히 유지하고 광복 이후에는 남한으로 이주하여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셨으며, 김 유공자께서는 1960년 9월 14일 79세를 일기로 서울 이문동에서 타계하였다.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 몇 년 후에 국가로부터 독립운동가의 추서를 위한 국가정책의 발표문을 듣고 바로 선친의 추서를 위한 신청을 올렸으나 그간 추서되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미궁에 빠져 있던 김 유공자의 추서가 1990년 국가정책에 따라 추서에 봉하여지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김정규 씨는 독립운동가이면서 철투철미한 신앙인으로 자손들 5대에 이르기까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의 생활을 하도록 다리를 놓으신 훌륭한 신앙의 가문을 잇게 하였다.
후손 두 분이 현재 삼육대학에서 교수로 있고 (김현희 생명과학과, 김은경 음악과) 한 분은 동중한합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다가 중국 상해 지역에 해외선교사로 파송되어 갔다가 중국 정부에서 모든 선교사 철수 정책에 따라 다시 호주로 선교사로 가 있다. (이한길 목사, 외손)
김 유공자는 국내에서 사망하여 망우리 묘역에 안장되어 중랑구청에서 특별히 독립운동가 묘역으로 관리되어 오다가 대전 국립묘지로 안장되어 가셨다. 그 분에 대한 공덕비는 용문산 입구에 독립운동가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곳에 함경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한 13인 중에 한 분으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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