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8일 오늘이 소설가 김이석(1914.7.16-1964.9.18) 61주기이다.
2022년 '창조문예' 8월호 제307호에 연재한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망우리공원 문인열전(13)
북과 남을 경험한 부부 소설가 김이석과 박순녀 / 정종배
소설가 박순녀는 1928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박정현과 어머니 김진혜 사이에서 2남 5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박순녀는 올해 95세다. 필자가 박 작가에게 건강 비결을 묻자 그는 “죽을 고비를 굽이굽이 넘겼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고향 함흥 반룡산을 휘도는 성천강 만세교 가까운 강둑에 문학비를 세우고, 눈 내리는 밤이면 한 바퀴 돌아보는 일’이 소원이라는 박순녀 작가. 요즘엔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부쩍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아 젖니 빼듯 시인들의 시를 손수 적어 책상의 서랍장 모서리에 붙여놓고 나직나직 읊조린다.
최근엔 두만강을 건너서 북간도로 간 <전라도 가시내>를 노래한 시인 이용악의 시 「그리움」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 백무선 철길 위에 /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 연달린 산과 산 사이 / 너를 남기고 온 /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1947, 《협동》)를 읊조리며 망우리공원 남향받이에 잠들어 있는 지아비 김이석을 그리며 밤을 지샜다고…….
필자는 2020년 6월에 소설가 박순녀 작가로부터 몇 장의 사진을 포함한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어느 모임’이라고 밝힌 사진에는 ‘왼쪽 두 번째부터 원응서·박남수·이명성(백수사 주인)·황염수·박연희·천관우·구상·김진수·석영학·김수영, 사진 아래 왼쪽 세 번째 박순녀·김이석·마해송·최정희’ 등을 손글씨로 써 놓았다. 이 사진 한 장으로 박순녀와 그의 남편 김이석의 문화예술계 교류의 폭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소설가 김이석의 생애와 작품
소설가 김이석은 1914년 7월 16일 평양 출생이다. 본관은 연안으로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아버지 김치화와 어머니 이득화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평양 종로통에 빌딩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이었다. 김이석은 1927년 평양종로보통학교와 1933년 평양광성고보를 거쳐,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가 1938년 중퇴하였다. 중퇴 사유는 ‘배울 게 없다’고 알려질 정도로 실력파였다. 실제로는 형님의 급서로 평양에서 가업인 사업체를 이어받아 운영할 만큼 이재에도 밝았다. 그 뒤 조선곡산주식회사에 다니다가, 평양 명륜여상 교사로 근무했다.
김 작가는 6·25전쟁 때 가족을 두고 혼자 월남하여 대구에서 생활하였다. 이 무렵 중부전선에서 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였다. 1953년 환도 후 《문학예술》 편집위원과 성동고등학교 강사직을 맡았다. 1957년부터는 집필에만 전념하는 한편, 1958년 방송작가 1호인 소설가 박순녀와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그의 문학적 재질은 일찍부터 드러나, 보통학교 때에 동요 「돌배나무」(1925)를 발표하고, 연희전문 재학 당시 단편소설 「환등」(1938)을 발표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38년 단편소설 「부어」가 《동아일보》에 입선되면서부터이다. 그 당시 평양에서 구연묵·김조규·유항림·양운한·이휘창·김성집·김화청·황순원 등과 함께 ‘단층’ 동인을 결성하여 동인지 《단층》을 발간하면서 「감정세포의 전복」(1937) 등을 발표했다. ‘단층’ 동인 모임에 윤동주 시인이 몇 번 참가하였다고 김병기 화백이 증언하였다.
월남 후 1954년에 「실비명」을 발표한 데 이어 「외뿔소」·「달과 더불어」·「소녀 태숙의 이야기」·「광풍속에서」·「뻐꾸기」 등을 발표했는데, 「실비명」은 「동면」(1958)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단편소설 외에 1962년 역사장편소설 「난세비화」를 《한국일보》에 연재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1964년 9월 18일 역사장편물 「신홍길동전」을 쓰던 중 고혈압으로 향년 49세에 별세하였다. 친지 주선으로 9월 21일 망우리공동묘지 호암 문일평 묘지에서 오른쪽 30미터 지점에 유택이 마련되었다. 서거 1주기 때에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에 시암 배길기 초대 서예가협회장의 글씨를 새겼다. 묘지번호는 203693이다.
김이석의 장례식과 묘비 제막식에 박화목·원응서·마해송·이원수·장수철·양명문·김진수·김요섭·김영일·박경종·김수영·김수명·이휘영·백철·안수길·오영진·박영근·이봉구·석영학·조병화·박경종·황염수·최정희·홍윤숙·이근배(과학자) 등 많은 작가와 지인들이 첨석하였다. 《조선일보》의 선우휘 편집국장은 사진기자한테 부탁하여 김이석의 장례식과 1주기 때 묘비 제막식의 사진으로 남겼고, 박순녀는 사진 속 인물들의 이름을 손수 손글씨로 쓰고 사진첩을 만들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시인 구상은 당시 폐 수술로 일본에서 투병하고 있다가 귀국 후에 식사를 대접하며 문상을 대신했다고 한다.
김이석의 작품 세계는 「실비명」·「외뿔소」·「학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인공의 꿈의 상실에 대한 좌절과 상심을 통해 인생의 비애를 기록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관앞골 기억」·「교련과 나」 등의 1920년대 식민지사회의 단면을 제시한 소년시절의 회상이나, 「뻐꾸기」·「동면」·「지게부대」·「허민선생」·「재회」 등의 사소설적 접근으로, 월남한 지식인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기록과도 같이 사적 체험으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들 작품에는 식민지 시대로부터 6·25전쟁 전후까지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의 한국 지식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의 문체는 치밀한 구성과 간결한 표현,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관조하는 담담한 심경으로 그려져 있어 독자에게 짙은 호소력을 가진다.
대표 작품집에는 『실비명』(1956)·『동면』(1964)과 아동장편소설 『해와 달은 누구를 위해』(1964) 등이 있으며, 그 밖의 저서로 『문장작법』(1961)이 있다. 단편집 『실비명』으로 1957년 제4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고, 1964년 제14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김이석이 만나 사람들
김이석은 내성적이고 말수는 적으나 호불호는 분명하였다. 지난해 2021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던 김수영 시인과는 서로 다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잘 어울렸다. 박순녀는 그 당시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으나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만난 건 휴전 후 서울에서였다. 김수영은 원응서와 함께 있는 김이석을 보고 “첫눈에, 저치도 나만큼 가난하고 나만큼 고독하고 나만큼 울분이 많고 나만큼 땡깡이 심한 치겠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실은 김수영으로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전쟁 피해자였다. 6·25전쟁으로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했을 때 그는 선배, 동년배 문인들과 함께 한청빌딩 조선문학가동맹 사무실에서 인민군 노래를 배우며 사상교육을 받았고, 또 가두행진을 해야 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김수영은 함께 교육을 받던 유정·김용호·박계주·박영준 등과 북으로 끌려가 훈련을 받고 인민군에 배치됐다. 이때 김수영은 조병화에게 ‘나 포로수용소에 와 있다. 한번 와다오.’ 하는 엽서를 보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할 때 김수영은 배치돼 있던 인민군 부대에서 탈출했다가 다시 인민군에게 붙들려 총살 위기에 몰렸다. 여기서도 탈출해 서울에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집 앞에서 경찰서로 연행돼 무자비한 고문을 받고 인민군 포로 신세가 되어서 수용소로 이감되고 말았다.
김수영은 월남한 이후 후배 여성작가 박순녀와 재혼한 김이석에게 퉁명스럽게 묻곤 했다. “형은 무엇이 좋아, 여기로 왔소?” 그러면 김이석은 “김사랑 그 자식이 우리가 써내는 글을 샅샅이 다 읽고 점수를 매기는데, 글쎄 내 소설은 밤낮 60점 미만이야. 주제가 어떻다는 둥 주인공의 사상성이 투철하지 못하고 미흡하다는 둥 말이야. 난 단지 아니꼬워서 무작정 남하한 거야.” 라고 말했다.
김이석이 월남할 때 동행한 양명문의 증언에 따르면 “김이석은 꾀가 없어 문학동맹에 충성을 바칠 줄 몰랐고, 원래 글을 빨리 써내는 재주를 못 가졌다. 평론가 안함광에게 불려가 ‘동무는 너무 안일하고 태만하니 앞으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훈시까지 들었다.”고 한다. 역시 함께 월남한 수필가 원응서는 김이석이 딱 한 번 농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 「소」를 써서 공연하게 됐는데 ‘이데올로기가 약하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공연 금지되었다고 증언했다. 김이석은 자기식대로 작품을 쓰지 못하게 된 북한 체제를 지긋지긋해하며 투덜거렸다.
북한에서 첫 번째 필화 사건은 원산문학가동맹(위원장 박경수)이 8·15해방 1주년 기념시화집으로 발행한 『응향』사건이었다. 『응향』에는 구상·강홍운·서창훈·이종민·노양근 등을 비롯한 여러 시인의 시가 실렸고, 구상의 부탁으로 이중섭이 표지화를 그렸다. 1946년 12월 20일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상무위원회에서 이 시집을 퇴폐적·반인민적·반동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평양에서 온 응향사건조사위원단 김이석·김사량·송영·최명익 등 검열원들이 자리한 가운데 1947년 2월 원산의 영화관 ‘원산관’에서 『응향』 성토대회가 열렸다. 구상은 휴식 시간에 급히 짐을 싸 들고 월남해 버렸다. 김이석은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 화백의 전시회 및 돈과 그림에 대한 관리와 생활을 돌봐주었다. 이중섭 화백의 적십자병원 무연고 주검을 첫 번째로 확인한 이가 김이석·김병기·김광균·구상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박순녀는 황염수 화가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김병기 화백은 김이석에 대해 “저항적 성격이 강한 반일 성향의 소유자였다”며, “그는 광성고보 시절 조선인이면서 일본 육사 출신인 교련 교사를 가장 싫어했다. 나는 그와 바둑을 두곤 했는데, 언젠가는 자꾸 물려달라고 요구해 내가 바둑판을 뒤집어엎은 적도 있다. 나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고 했다.
김수영은 이렇게 주장했다. “월남 후 14년 동안 내내 고생만 하다가 죽은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를 기를 만한 자격이 없다. 이중섭·차근호·김이석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나 보아라. 나는 김이석의 죽음을 목도하고 친구로서보다도, 이남 태생의 한 주민으로서 부끄러움과 슬픔이 더 크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이중섭·차근호는 3·8따라지라며 은연중에 반공이란 이데올로기의 잘못된 만행이 뛰어난 예술가의 혼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박순녀와 카톡 친구로 2020년 12월 30일부터 올 7월 초까지 일곱 번을 찾아가 뵈었다. 박 작가에게 전해 들은 김이석의 삶과 작품, 그가 만난 사람들과의 후일담을 소개해 본다.
김이석은 6·25전쟁으로 남하하여 궁색하였지만 예술지상주의자로, 오롯이 작가는 작품으로 일관된 삶을 지향해야 한다며 소설가로 일관하며, 정치 쪽으로 가버린 천관우·장준하 등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김이석의 작품 중 망우리 묘지 뒷면에 새겨진 「실비명」이 대표작으로 알려졌으나, 김 작가는 「동면」을 아꼈다. 「동면」은 연극 공연을 고려해 구성한 소설이었다.
김 작가는 살아생전 박연희 소설가와 제일 친했고 소설가 김동리 손소희 부부와도 가까이 지냈다. 홍제동 문화촌 국민주택 단지 월세를 밀려 퇴거 위기 때 서영호 기자의 후원으로 위기를 넘겼다. 세간에는 김 작가가 이중섭 그림을 상당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하여 관계자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지만, 그가 소장한 이중섭 유화 세 점 중 한 점은 석영학 선생한테 빌린 돈 대신 선물하고, 한 점은 내 작품을 좋아하는 젊은 평론가 몇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내가 좋아하는 한 분에게 술 먹은 김에(서영호 기자에게 방값 대신) 선물하고, 한 점은 팔아서 살림에 보탰다고 한다. 팔린 그림은 이건희 컬렉션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후문이다. 실제 이중섭 그림을 소장하지 않고 있다.
김이석은 가장으로서 다정다감하였으나 구상·김수영·박연희 등과 자주 술자리를 가졌고, 술을 마시면 악동이 되어, 박순녀는 김이석이 살아 있을 때 그게 보기 싫어서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았다. 글쓰기 보름 전부터는 절주하고 신문 연재 때는 주말에만 음주를 하였다. 그는 집에서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 취미가 있어 식당 주방장에게 배운 요리를 집에서 만들어 식구들과 함께 식사하기도 하였다.
박순녀·강민·구인환·구혜영·권용태·남구봉·남정현·김여정·박용숙·박정희·송문정·송병수·신동한·신봉승·안영·유금호·윤병로·이국자·이명재·이성교·이정호·이준영·정명숙·정인영·최미나 등 원로문인들이 인사동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밥 한 끼 먹으며 안부를 묻고 서로를 위로하던 ‘인우회’가 4년 전에 해체할 정도로 주변 작가들이 세상을 떠났다.
1978년 결성된 원로 및 중진문화예술인 9인이 장르의 구분 없이 함께하는 이색 문학동인 ‘갈숲’ 동인인 박순녀는 소설가 향파 이주홍·송원희, 서예가 청남 오제봉, 시인 박노석·조순, 아동문학가 임신행, 수필가 빈남수·서인숙 등과 활동했다. 운성 구상·우인 송지영 등도 동인에 참가하였다. 아동문학가 이주홍 선생의 주도로 동인지 『갈숲』은 창간 이후 꾸준히 이어져 24호까지는 향파 선생이 편집하고 향파 선생의 타계 이후에는 시인 조순에 의해 2011년 41호까지 이어오다가 종간되었다.
‘갈숲’ 동인들은 모임 시작 전 청남 오제봉 작업실에서 몇 점씩 붓글씨를 남겼다. 시인 구상 선생은 술만 들어가면 짓궂은 악동으로 박순녀는 술자리에서만큼은 거리를 두었는데, 구상 시인의 친필 유묵 한 점은 간직하고 있다. 구상 시인이 아침에 일어나 돌려달라는데 주지 않았다. 그것은 ‘明暗不二’이라고 한자로 쓴 유묵으로 구상의 친필 중 한자로 쓰인 드문 유묵이다. 구상 시인의 딸 구자명 소설가에게 카톡으로 유묵 사진을 보냈더니, 그는 ‘아버지 유품 중 한자로 쓴 유묵은 거의 없는데 귀한 자료’라며 직접 보면 좋겠다고 반가워했다. 시인 구상은 1959년 5월 ‘레이더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및 시설 제공 이적죄로 구속·수감 옥고를 치르면서 구상한 희곡 「수치」를 집필했다. 출옥한 뒤 신당동 구상의 집에서 합평하는데 박순녀는 김이석과 합석하였다. 대여섯 명이 하나같이 작품에 대해 혹평하며 인신공격에 이르렀으나 시인 구상은 허허 만면에 웃음으로 일관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박순녀의 삶과 작품
박순녀의 아버지 박정현은 일찍 개화한 사람으로 함흥고보 1회, 함흥사범학교 1회로 졸업하고, 함경도 한국인 최초 보통학교 교장(함주군 덕산보통학교)으로 부임한 함경도 교육계의 선구자이다. 일흥상업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을 역임하고 함흥의전 이사로 활동했다.
박순녀는 함남 고등여학교(1944), 원산여자사범학교 강습과(1945)를 수료하고 해방 후 월남하여 1950년 서울대 사대 영어과를 졸업했다. 1960년 단편 「케이스 워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64년 단편 「외인촌 입구」로 《사상계》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떤 파리」·「시간의 기둥」· 「난蘭」·「아이 러브 유」·「기쁜 우리 젊은 날」 등이 있다.
「어떤 파리巴里」는 1970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단편소설로, 이 작품으로 1971년 제16회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김정현은 「동백림 사건과 김수영, 전쟁체험과 레드 콤플렉스란 ‘공백空白’-박순녀의 「어떤 파리」에 나타난 김수영의 면모를 중심中心으로-」(한국어문교육연구회 《어문연구》 제49권 제3호) 논문 초록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본고는 1960년대 말 김수영의 내면적 상태와 행적을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어떤 파리」를 검토했다. 박순녀의 1970년작 「어떤 파리」는 인간 김수영의 상당히 구체적인 면모를 제시하는 자료로 독해될 필요가 있다. 「어떤 파리」 속 ‘홍재’이자 인간 김수영의 모습은 ‘벌레’와 ‘회복할 수 없는 자기불신’으로 대변된다. 이 ‘말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전쟁의 트라우마 그리고 레드 콤플렉스(반공 이데올로기)에 시달리는 김수영의 면모는 그의 시에 나타나는 관념성 그리고 생활의 문제를 해석하는데 유의미한 시각을 제시해 줄 수 있다. 특히 소설의 말미에 제시되는 검은색과 빛의 대립은 김수영이 추구하고자 했던 자유의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인식되어야 한다.”
또한, 「어떤 파리」는 1971년 《아사히 아시아 레뷰》 여름호(제6호)에 일본어로 수록되기도 했다(번역 장장길長璋吉).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수상(1972년)한 재일한국인 이회성 작가가 1998년 5월 《동아일보》와 한림대학교가 주최하는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이호철 소설가와 가진 특별 대담 기사 「이젠 조국의 모든 것이 따뜻이 다가와요」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회성 씨는 방한 기간 중 하루의 자유시간을 달라고 정부 당국에 요청하여 이호철 소설가에게 「어떤 파리」의 작가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한탄강 인근에서 만났고 삶과 문학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제주도에서 집필 중인 박순녀는 이회성과 2박 3일 동안 만남을 진행하고자 했으나 정부 당국이 만남을 중단시켰다. 이회성은 호텔에 있는 동안에 도청과 감시가 끊이지 않았다고 박순녀 작가에게 말한 바 있다. 이회성 작가가 일본으로 돌아가 박순녀 작가와의 만남을 《문예춘추》에 게재하며 ‘그가 작가로서 우뚝 솟을 것’이라는 상찬한 글을 썼다. 박 작가는 남자였다면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라는, 주변의 후문이다.
박순녀는 1960~1970년대에 주옥같은 단편을 많이 썼다. 그녀의 소설엔 전통적 가족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 의지를 갖고 생활하는 학생이나 인텔리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녀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어쩌면 단편 「아이 러브 유」(1962)와 「난蘭」(1968)을 떠올릴지 모른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일본인 스승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소설 「아이 러브 유」는 전시동원령으로 숨 막혔던 일제 말 여학교가 배경이다. 일본인 교장 네로는 조선 여학생에게 참전을 노골적으로 강요한다. 양심적인 일본인 야마끼 선생은 조선인 여학생에게 적십자 간호원 지원을 거부하도록 충고한다. 야마끼는 학생들 사이에서 ‘육발 선생’으로 알려졌다. ‘나’는 교장실로 끌려가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고문을 당한다. 야마끼 선생은 교장 네로와 싸우며 “학생을 수사당국에 넘긴다는 건 언어도단”이라 반발한다. 결국 퇴학으로 결정이 났고 때마침 8·15해방을 맞았다. 본국으로 송환되는 일본인 무리 속에 ‘나’는 스승을 발견하고 허리 굽혀 인사한다. 야마끼 선생은 손을 흔들어 보이며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며 싱긋 웃는다. 소설 속 야마끼 선생은 박순녀가 학창 시절 만났던 실제 스승으로 본명은 야마모토[山本]다.
한편, 소설 「난」에서도 일본인 체육 선생 이누오[犬尾]가 등장하는데 원산사범 기숙사를 무대로 소설이 펼쳐진다. 이누오 선생은 민족적 편견을 갖지 않고 조선인 여학생들의 독립정신을 동정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소설 「난」이 출간되고, 이누오의 실제 인물인 이나다 주조[稻田十三] 선생이 내한해 사제가 재회하기도 했다. 다음은 《조선일보》 1968년 3월 3일자 기사 중 일부다.
“해방이 되고 서로 헤어져 소식조차 모르는 25년이 지났지만 박순녀 여사는 그때의 이나다[稲田](59)선생을 못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朴 여사에게 의외의 국제편지가 날아왔다. ‘그리운 내 제자弟子가 한국에서 여류작가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해 마지않았소. 작품 속에 그려진 나를 보고 다만 조그마한 신념으로 살아온 내 인생의 보람을 얻은 것 같소. 문학과 교육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소. 새삼 서울의 하늘이 보구 싶구려. 나는 이 책을 내 인생의 기념품으로 간직할 생각이오.’ 바로 이나다 선생님으로부터 온 편지였다.”(하략)
이나다 주조 선생의 딸 나가하마 가쓰코[長浜和子]와의 2대에 걸친 인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소설 「난」은 많이 팔렸다. 여학생들이 가방 속에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애초에 3부작으로 시작했는데 1부만 내고 못 냈다. 「난」에 등장한 이나다 선생의 딸이 수소문해서 박 작가를 찾아왔다. 그는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정년퇴직한 후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하기 위해 한국외대 외국어학당에서 반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일본에 돌아가서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자기는 한국말을 배울 정도로 아주 똑똑한 여성이었다. 해마다 봄, 가을이면 한국을 찾아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에서 한 달씩 봉사하고 돌아갔다.
나가하마 씨가 소설 「난」을 일본어로 번역해 박 작가에게 보내주면 박 작가가 손질해 다시 보내주는 식으로 전문全文 검토를 세 번이나 했다. 한 번을 하는데, 약 1년쯤 걸렸다. 본문은 일본어로 해도 박 작가의 표현과 비슷한데, 소설 속 대화는 옛날식 대화였기 때문에 나가하마 씨가 대화를 손질하여 현대식으로 바뀌어졌다. 그 작품을 출간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지난 4년 전 200권을 인쇄했다. ‘왜 이렇게 하느냐’고 박 작가가 물으니, ‘자기 가족들이 읽겠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생전 아버지가 이다음에 120% 행복하거든 20%를 사회에 환원하라고 하셨는데 20%를 환원하는 마음으로 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봉사도 그렇게 해왔다’는 것이다. 나가하마 씨는 ‘해외 여행은 아무 데도 간 적 없고, 오직 한국에 와서 매년 두 차례 봉사하고 간다’는 것이다. 지금도 박작가와 나가하마 씨는 연락이 닿는다.
나가하마 씨의 지인이 화가인데 소설 「난」의 주인공에 반해 그림 4점을 그렸다. 박작가는 2점을 선물 받았다. 한 점은 8년 전 경기도 산본도서관에 도서와 함께 기증하고, 한 점은 박작가의 거실 벽에 걸려 있다. 지금도 나가하마 씨가 1년에 한두 번씩 소포를 보내오고 있다.” 이나다 주조 선생님과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소설 「난」이 《조선일보》를 통해 알려지면서 박 작가 또래의 남성 8명이 찾아왔다. 바로 이나다 선생님 제자들이었다. 박 작가의 고향 함흥 출신도 있었다. 그분들 중 한 분이 일본을 상대로 무역상을 하여서 이나다 선생님이 사시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 내외가 한국에 오셨다. 박 작가는 원산사범 동기 대여섯 명과 마중을 나갔다.
소설 「아이 러브 유」에 나오는 ‘육발 선생님’과도 인연이 이어졌다. 그분 실제 성함은 야마모토 선생님이었다. 당시 여학생들 사이에서 ‘육발’로 알려졌다. 학생들이 육발을 보려고 맨날 쫓아다녔다.
박 작가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한일우호협회 초청으로 일본에 갔을 때 부인을 만났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야마모토 선생은 총각이었다.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가 결혼했다. 그 부인과는 여러 번 편지 왕래가 있었다. 야마모토 선생은 “난 한국에 교육자로 왔지, 다른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고 부인이 전했다. 박순녀는 “소설에는 육발을 확인한 것처럼 썼지만 확인은 못 했거든요. 선생님 부인 말씀이 ‘육발은 아닌데 조금 기형’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나다 선생님은 체육, 야마모토는 국어 선생이었다.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원산에서 귀국하는데 참 비참했다. 양말, 신발조차 신지 않은 분들이 많았다. 아이들 발바닥에 돌멩이가 박혔다. 이나다 선생님이 일본으로 귀국하는 일본인 무리에 섞여 어디를 갔다고 하면 그곳에 사는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주먹밥을 드리곤 했다. 이나다 선생님 딸인 나가하마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국에서 제자들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참 괜찮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유골을 한강에 띄웠다.

박순녀의 후일담
박순녀는 월남 1세대 여성작가다. 해방 직후 학업의 열정으로 단신 월남했다. 월남 체험은 그녀의 작품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외상적 체험으로 자리한다. 소설 「어떤 파리」·「잘못 온 청년」 등 많은 작품 속에 남과 북을 오가는 지식인의 고뇌와 갈등이 담겨있다.
박순녀는 그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배경에는 항상 누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고종사촌 오빠가 한 분 있었는데, 그는 엘리트였다. 그 오빠에게 여동생 허법(춘애)이 있었는데 오빠는 나를 더 예뻐했다. 이 오빠가 여자는 배워야 한다고 해서 나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유학 가려 했지만 패전국이 되어 갈 수 없었고 평양에는 대학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로 왔다. 서울에 오니까 오빠와 일본에서 대학을 같이 다녔던 청년이 날 찾아왔다. 내가 사촌 오빠에게 자주 편지를 썼는데 오빠는 그 편지를 기숙사 친구들이랑 다 돌려 읽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기숙사에서 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청년은 서울대에서 강사를 했는데, 계속 있었으면 서울대 교수도 될 수 있었겠지만, 한국에 스승이 없고 자신에게도 무슨 밑천이 있겠냐며 더 배우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간다고 했다. 나더러 같이 가자는데 배를 타려면 돈이 있어야 했고…. 그 후로 소식이 끊어졌다.”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고종사촌 오빠 이름은 허준許準이었다. 그는 ‘만경봉호’를 타고 북으로 가서 북한의 청소년부 장관을 역임했다고 알려졌다. “허준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모진 역경을 이겨내면서 보기 드문 친화력으로 자신을 키워 일본의 일고一高를 거쳐서 센다이 대학을 나온 사람이다. 그는 무엇을 기대했던지 어렸을 적부터 내게 열정과 꿈을 가질 수 있게 부단히 도와주었다. 말로, 글로, 행동으로 그는 나에게 주문했다. 공부를 하라고, 글을 읽으라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하리라고 마음먹은 것은 전적으로 그 오빠의 영향이었다. 해방이 남북을 갈라놓은 뒤 나는 남으로 왔지만 그는 조총련계여서 그를 찾을 수가 없었고 그는 나를 찾지 않았다.”(『이중섭을 찾아서』, p.345.)
고종사촌의 여동생 허법(춘애)은 절세미인이었다. 간도에서 공산당 간부와 결혼하였는데, 신랑은 결혼식 3일 후 신행길을 나서는 말 위 앉아서 암살당하였다. 그의 신랑은 김두봉의 애제자로 알려져 있었고, 김두봉은 허춘애를 평양으로 불러 함흥도립병원 간호부장으로 보냈다. 허춘애의 배경으로 월남하지 않은 박 작가의 식구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박순녀의 가족들 중에서 아버지와 두 오빠 등 3부자만 월남하였고, 어머니와 두 언니와 두 여동생은 월남하지 못했다. 월남한 사촌 동생이 전한 말로는, 영생여고와 공주사범을 졸업한 둘째 언니 박경순은 김일성 앞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성악에 뛰어났다고 한다.
월남에 대해 박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도망쳐서 오니까, 사흘 만에 엄마하고 오빠가 나를 잡으러 서울에 왔어요. 아무리 해도 내가 안 가겠다니까 타협안을 내셨지요. ‘일단 가자. 집에서 허락을 받아 짐을 꾸려 보내주겠다’. 그때 서울에 오려면 조선은행권이 있어야 하는데, ‘집 안에 모아둔 조선은행권을 다 줄 테니 일단 가자’는 겁니다. 그걸 믿고 도로 함흥에 돌아갔지만 막상 집에 가니까 보낼 생각을 안 해서 단식투쟁을 했어요. 나는 2남 5녀 중 셋째 딸이었는데 딱 가운데인 딸 하나를 잃을까 봐, 정식으로 보내줘서 다시 서울로 왔어요.”
하지만 월남한 박순녀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나를 다시 생각했다. 좌우의 이념 논쟁도 시들해지고, 다시 공부하고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청춘의 덫에 빠졌다. 남자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아름답지만 이어가기 쉽지 않은 청춘의 꿈. 박순녀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두 번째 아이를 가질 무렵 6·25전쟁이 터졌고, 남편은 시댁 가족들과 먼저 피난을 가고 임신 때문에 그녀는 서울에 머물렀다. 뒤늦게야 피난지 제주도에서 합류했는데 그 사이 남편에게 다른 여자와의 염문이 있었다.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단호하게 갈라섰다.
박순녀는 1950년대 당시 고료가 괜찮은 방송작가 1호로 활동했었다. 당시 김이석 작가는 수줍은 성격이었지만, 14세 연하의 박순녀가 그의 소설 「실비명」을 읽고 반하여 1958년 그와 결혼했다. 박순녀는 동명여고 교사생활을 그만두었고 김이석에게 받은 3년 사숙 기간을 생애 최고 배움으로 좋은 시간이었다고 기억한다.
“내가 방송국에 있으면서 드라마를 썼었다. 이를테면 잡문 같은 것을 많이 썼다. 방송국 원고는 굉장히 쓰기 쉬웠다. 원고지를 다 메꾸는 게 아니고 대화가 몇 줄, 거기다 뮤직 넣고 하면 200자 원고지에 글은 3분의 1이 들어갈까 말까 하였다. 하룻밤에 100장도 넘게 막 썼는데, 하지만 쓰고 싶은 것은 소설이었다. 방송국에 오는 문인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의 원고 심부름을 하거나 고료를 전하곤 하였다. 어느 분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소설 쓰고 싶다’고 하니, ‘진짜 쓰고 싶으면 방송국 원고를 접으라’는 것이다. 소설은 막 써 내려가는 게 아니니까. 내가 그 충고를 따라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아이고, 힘들어…….”
박순녀는 소설을 습작하면서 그 기준을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초기 작품으로 잡고 그의 모든 소설을 읽고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먼저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종이에 쓰고 그것을 원고지에 옮긴 뒤 두세 번 퇴고 과정을 거쳐 작품을 마무리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국 작가 중에서는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한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타고난 글솜씨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난바다 윤슬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외 작품은 이청준 소설과 같이 노력하고 공부하면 쓸 수 있는 작품으로 느꼈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한 지 6년 만에 졸지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신문 부음기사 제목은 ‘청빈淸貧 속에서 숨진 작가 김이석 씨. 51세로 사망. 「실비명」 등의 작품 남기고’(《조선일보》 5면, 1964. 9. 20. 5면)였다.
박순녀는 남편 김이석 작가의 죽음과 장례식 뒤 후일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땐 문단이 좁아서 다 알았다. 신문에 크게 났었다. 게다가 두어 시간 만에 가버리니까 너무 충격이었다. 제가 동명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었다. 제자가 스승의 날에 찾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자기가 대학에 다닐 때 영화관에 갔던 이야기를 하였다. 〈대한뉴스〉를 보는데 선생님이 막 우는 게 나오더라는 것이다. 박순녀 작가가 그 시절 뉴스에, 뉴스거리가 없어 〈대한뉴스〉에 나온 사람이었다고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김 작가를 황망하게 여의고 살림을 꾸리며 글쓰기에 정진했다.
박순녀가 2014년 펴낸 소설집 『이중섭을 찾아서』(동서문화사)는 제51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세종도서’로도 선정됐다.

망우리 이중섭 묘비 제막식
그 소설에는 ‘황소’와 ‘은박지’의 화가 이중섭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중섭의 상대역이 남편 김이석이다. 이중섭은 캔버스나 화첩이 없으니 합판이나 종이, 담뱃갑 은박지에도 그림을 그렸다.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김병기 화백은 이중섭은 돈이 없어 큰 그림을 남길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이중섭은 김광균의 시 「설야」의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시구를 좋아했다. 이중섭의 아내인 마사코가 김광균 앞으로 남편에게 쓴 편지를 보내면, 이중섭은 자기가 가지 않고, 김이석이 갖다주기를 바랄 정도였다. 이중섭과 김이석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 이중섭의 아내 ‘남덕’의 본명은 ‘야마모토 마사코’이다. 이중섭은 그녀를 ‘남쪽에서 얻었다’고 해서 ‘남득南得’이라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인’이라는 뜻으로 ‘남덕南德’이 되었다.
박순녀는 소설의 결말에 김이석에 대한 자신의 믿음, 변치 않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실었다. “김이석 작가는 내가 어떤 땅에 어떤 척박한 조건으로 태어난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노력뿐이라는 것도 알게 해주었다. 그는 내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어서 나는 3년 남짓 맹렬하게 책만 읽을 수 있었다. 길을 잃어도 제자리로 돌아올 지표를 마련해준 것이다. 겉돌면서 산 나에게 스스로를 올바로 알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그가 내 곁을 떠나버렸다. 그는 내게 예술을 심었는데 나는 생업으로 붓을 들었다. 고통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필자가 ‘소설가 김이석은 어떤 사람인가’ 물었다.
“김 선생은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다. 이북에서 ‘단층’ 동인으로 활동했는데, 동인의 남매가 아버지 없이 할머니랑 이남에 내려와 수소문해서 김 작가를 찾아왔다. 김 작가는 피란민 시절부터 남매를 돌보기 시작했는데 사실, 김 작가도 재력이 없었다. 남자아이는 어느 평양 출신 부자에게 맡겼는데 여자아이는 맡길 데가 없어 고료가 나오면 얼마를 보태주곤 했다. 나와 결혼할 무렵 고료를 1만원인가를 받으면 내게 5,000원, 그 여자아이에게 5,000원을 주며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아저씨가 가정을 가져서 이제 도와줄 수 없다. 마지막이라고.’ 그 말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이중섭을 돌본 것도 이를테면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이중섭은 돈 관리를 못 하는 인물이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거지처럼 살고. 돈이 들어오면 쓰지 않고는 못 배겨서 다 써버렸다. 쓰지 못했을 때의 그 처참함!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쓸 때의 그 우월감! 이중섭이 제대로 돈과 그림을 관리할 수 있었다면 김 작가가 그 옆에서 얼쩡거리지 않았겠지. 혼자서 못 하니까, 보통 사람은 피하니까, 피하는 상황에서 이중섭을 도와준 겁니다.”
박 작가는 시인 김동환과 소설가 최정희의 딸인 김채원 소설가와 연락하고 지낸다. 필자는 내년이면 100주기인 관동대진재에 관련하여 다큐를 제작하는 재일한국인 오충공 감독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인사동 화봉문고에서 아버지 파인 김동환의 『승천하는 청춘』(1925)을 따님인 김채원 작가가 낭독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고 박순녀 소설가와 담소한 내용을 김채원 작가에게 보냈더니 김채원 작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말한다. 박 작가와 교류하던 이정호·임옥인·최정희·최현식 등 이제는 거의 다 돌아가시고 몇 분만 남아 계신다며 자주 찾아가 귀한 시간 보내라며 격려한다.
박순녀는 해방 전이나 후에도 북한에서는 거지·접대부·첩 등을 볼 수 없는 3무였다며 6·25전쟁 후 월남한 분들의 자식 교육에 대한 자존감에 대해 말하며, 북쪽에 고향을 둔 예술인들의 소외감을 드러내며 문학관과 추모제 등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또한 김이석의 유품과 본인의 자료를 공공 기관에 기증 의사를 밝혔다. 중랑구청과 망우리공원 관리와 유지 등을 이야기하며 정상 궤도에 오르면 기증 의사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박순녀는 공부하며 자서전을 쓰고 싶어 한다. 체력이 되는 한 몇 번을 시도하다 그만두었다. 동서문화사의 고정일 사장이 박 작가에게 구술 채록을 권장하여 녹음까지 하였다. 고정일 사장이 2021년 3월 급작스레 사망했다. 박 작가는 필자에게 전화로 ‘정 선생이 책임지고 망우리 김 작가 옆에 묻어달라’며, 지금도 김 작가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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