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30일 동아일보 특파원 이상협 나라시노수용소 방문기

나라시노수용소에 조선인이 3천명에서 3천5백명까지 강제로 9월 3일부터 수용당했다. 그때부터 일주일 동안 약 350여명이 수용소 인근 부락 자경단에게 인계되어 참혹한 제노사이드를 당해 죽었다. 동아일보 특파원이 이제야 방문할 정도로 일제가 통제하였다. 조선인은 죽었는데 한 줄도 쓰지 못하는 특파원과 고국의 편집국 기자의 마음을 새겨보자.

동아일보 1990년 5월 11일
〇수용 중의 3천 동포를 찾아 1일을 눈물의 습지야[習志野]에
설은 눈물, 반가운 눈물, 감격의 눈물, 기막히는 눈물, 형용조차 못할 눈물
본사 동경 특파원 이상협 통신
인원 3천 24명 학생이 약 170명 여자도 약 60명 있다
동경 부근에 있는 조선인을 가장 다수 수용한 곳은 천엽현 하습지야[千葉縣 下習志野]이다. 나(특파원)는 동경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이곳을 방문하고자 관계 관청에 교섭하여 보았으나 뜻대로 성취를 못하고 심중에만 답답히 지냈던 차 19일에야 계엄사령부의 장교와 동반하여 한편으로는 수심도 많고 한편으로는 반가웁기도한 길을 떠나서 자동차로 두 시간 반을 허비하여 신지에 도착하였다. 습지야는 동경에서 약 80리 되는 곳으로 기병여단의 소재지이며 군대의 연습장이 있는데 조선사람을 수용한 곳은 이전 구주대전 때 청도에서 잡아온 독일포병을 두웠던 처소와 동경에서 군대가 연습하려와서 묵던 집으로 지금은 낡아서 비어 두웠던 함석 가의 두 처소인데 이곳에 수용되어 있는 조선사람이 3,024명 중에 학생 약 170명 있고 그 외는 거의 전부가 노동자이고 여자도 약 60명 있고 어린아이들도 적지 않다며 그 곁에는 중국인 노동자도 1,691명이 있다 한다.
일일 식량은 쌀보리 각 두홉
수용소 당이라는 내부소좌[內富少佐]에게 대강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처음에는 일시 다수한 사람이 와서 양식과 기타에 비상이 곤란하였으나 여러 가지로 주선하여 양식도 하루 한 사람에 쌀 두홉 보리 두 홉(일본 되)씩 주게 되고 간신히 밥을 담아줄 그릇도 변통하고 오늘부터는 처음으로 더운물을 통에 담아주어 국으로 퍼먹게 되었다 하며 밥을 짓고 분배하고 청결과 소제 등은 자기들로 하여금 하게 하고 약간은 영문이 열도 식히며 18일부터는 약간 실외에 나와서 운동하는 것도 허락하였다 군대에 있는 날 양탄자도 있는 대로 나누어 주어서 “아무쪼록 편의를 도모하여 준다”는 말을 하였다.

중병인과 같이 피골상접한 형용 진재 이후 혼잡 중에 못 먹고 못 자면서 간장을 태운 까닭
아모兒母의 유액이 고갈되어
그 뒤에 수용소장의 선도로 수용실을 대강 보았다. 수용실의 출입구에 창을 꽂은 총을 멘 병정이 파수를 보고 그 안에는 멍석 한 겹을 깔고 행렬을 지어 꿇어앉은 광경이 전신의 적군 포로를 수용하는 모양이 이러한가도 싶으며 나의 본 경험으로 말하면 새끼 꼬는 감옥공장의 광경과도 흡사하다 첫 번에 그들을 대면하고 반가웁기 전에 먼저 놀란 것은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피골이 상접하도록 수척하였을 뿐아니라 얼굴이 중병인과 같이 혈색을 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기력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일이다 이것은 이곳에 와서 고생을 한 까닭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지진에 놀라고 불에 혼이 난대 다가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동경에서 이곳까지 팔구십리씩 끌려오며 목숨 도모를 하느라고 애가 마르고 간장이 탄 까닭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를 가진 부인은 이때까지 젖이 나지 아니한다는 말을 들어도 얼마나 그들이 풍상이 혹독하였던 것을 가히 알 것이다
혈관까지 떨리는 감격의 악수로 감사한 인사를 하는 한편에 하염없는 눈물만 그렁그렁
어떻게 알았는지 “동아일보사에서 위문을 온다”는 말이 먼저 귀에 들어간 듯하여 나를 보면 제일 먼저 혈색이 없는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띄운다 어린아이들은 고국의 부모나 만난 듯이 맑은 동자에 눈물이 고이며 나의 내여미는 손을 잡은 학생의 손가락은 혈관까지 떨리는 듯하다 이와같은 광경 중에 그들은 나에게 향하여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하셨습니까”하고 감사한 인사를 받을 때에 나는 무엇이라고 그들을 위로하여 좋은지를 “안에 있는 우리의 잘못이라”는 부끄럼에 솟는 눈물조차 억제가 되었다

객지 비상 중에 붕성지통을 당하고 눈물과 한숨에 싸인 참혹
다만 한 사람 태산같이 믿고 바라는 남편과 단둘이 붙들고 이끌고 언어 풍속이 전혀 다르고 산천풍토가 모두 서투른 만리타향에 와서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남편은 비참히 죽는 것을 목전에 보고 붕성지통의 망창한 혈혈단신이 남편의 뒤를 따를 자유도 없이 경관에게 군대에게 이곳까지 끌려서 눈물과 한숨으로 비참한 세월을 보내는 가련한 젊은 여자도 이곳에 있고 형제노동을 하러 왔다가 한 형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란 중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근심 걱정으로 어린 가슴을 태우는 20 미만의 아이들도 적지 아니하고 “심천원강정[深川猿江町]에 있는 유리공장에 우리 열둘이 와서 일을 하다가 열사람은 이렇게 살아 있고 둘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요”하며 비쭉비쭉하는 아이도 잔인하기 짝이 없다.
4백 명은 치료 중 2백 명은 외상 환자이요 많은 것은 위장병의 환자
병으로 치료를 받는 사람이 4백명 가량이나 되는데 그중에 2백명은 외상환자라 한다 그 외에 보통수용실에 기거하는 사람도 얼굴에 반창고 붙인 사람 머리에 붕대를 맨 사람이 드물지 아니한데 이러한 사람은 불문가지 죽은 목숨을 간신히 구한 사람이요 기타에도 이곳에 수용한 사람의 삼분지 일은 거의 사경의 비참한 곤경을 겪은 사람이라 한다 부상한 사람의 다음에는 각기병자와 불에 데인 사람이 매우 신고를 하는 모양이며 제일 많은 것은 위장병자인데 기갈에 견디지 못하여 못 먹을 음식이라도 있으면 먹고 현미 보리 등 졸지에 음식이 변한 까닭이라 한다
실모 일본아 소란 중 천신만고로 보호 하야습지야까지 굴러온 부인
상투를 아직도 앗겨둔 중늙은이도 있고 13세에 지나지 못하는 아이들도 적지 아니한데 아이들은 거의 전부가 유리공장에서 노동을 하였다 한다 “너의 고향이 어디냐” 물어본즉 “대구 부산 밀양” 등을 이르는 아이가 거의 전부인 것을 보아도 경상도 사람이 많이 건너온 것을 가히 짐작하겠다 여자도 6,70명이나 되는데 대개는 남편을 따라온 사람이며 그중에는 일본 여자로서 남편이 조선 사람인 까닭에 부부가 함께 수용되어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도 5,6인이나 있는 것을 보았다. 소란 통에 어머니를 잃은 일본사람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이곳까지 데리고 자기 자식같이 애지중지하는 북청 출신의 부인도 수용소 안의 한 이야기 재료가 되었다

습지야주둔지 버스정류장 2025.8.26
전부가 적수공권 간절한 소원은 고국 구경 그다음은 자유스런 행동이다
그들의 간절히 소원하는 것은 하루라도 바삐 고국에 돌아오는 일인데 “이곳에 있어서는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아있어도 마음에 도무지 산 것같이 않다”하는 것이 그들의 감상이다 그다음에는 마음대로 바깥에를 좀 나가 다니고 담배를 좀 먹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거의 전부는 군대의 손에 매여 있는 몸뚱이밖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였음은 3백여 명씩 수용한 처소에 조그만 버들상자나 봇짐을 가진 사람이 2,3인에 지내지 못하는 것을 보아도 가히 알겠다 그뿐 아니라 신발은 거의 전부가 없고 의복 두 겹 입은 사람에게 간신히 한 겹을 얻어 입은 사람이 적지 아니하여 동경에서 학업이나 노동을 계속하려 해도 당정 걱정이요 고국으로 돌아가게 한다하여도 여비는 둘째 문제이요 몸갈망부터 할 수가 없다 한다
무심한 석양만 비극의 장면을 비추인다
동경의 지진도 본래 추측할 수 없는 일이요 우리의 운명도 본래 알 수가 없지마는 오늘날 이곳에서 이 광경을 볼 줄이야 더욱이 누구나 꿈이나 꾸었으랴 삼천여 명의 불쌍한 형제를 일일이 돌아보지 못하고 동경에 돌아갈 시각이 덜미를 칠 때 무심한 석양만큼 비극의 마당에 빗기었다 – 동아일보 1923. 9. 30
〇본사 동경 특파원 제3회 안부 조사 도착 각처에 산재한 학생과 습지야수용 중 일부
본사 동경특파원의 제3회 안부조사가 도착되었습니다 역시 각처에 흩어져 있는 학생이 대부분이며 또 습지야[習志野]에 수용 중인 동포도 일부를 조사하였으나 역사 조사된 대부분이 학생인 것은 별항 특파원의 통신을 보아도 알려니와 여러 가지로 불여의한 주위의 사정으로 그리된 것임을 양해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며 간혹 이왕 보도된 것과 중복된 이도 있을는지 알 수 없으나 무사한 소식이면 중복됨도 무방하겠기로 우선 도착 되는대로 보도하기로 하였으며 전례에 의하여 아무 기록도 없는 것은 무사한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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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야수용 학생(127명)
〇김동환(시인, 「승천하는 청춘」) 일진영어 경성 오촌면,
〇이상태 비행사
동제2사수용 학생(7명)
〇김동환 경성군 읍내,
동제3사수용(31명)
각처산재학생(87명)
동경시 본향구입동편정 93 고림방
〇함석헌(건국포장, 국내항일) 용천 〇함덕일 장춘 〇함순일 동 귀국
동경부하롱야천서개원 973
〇김문보(음악인) 〇김문집(친일, 문학) 대구
동경부 하오총정 취방 153 영목방
〇최순화 함흥 함흥면, 〇엄상수 고성, 〇이동제 함흥 – 동아일보 1923. 9. 30
〇정읍구재 소인극 정읍청년회에서는 서선동포수재와 일본관동일대진재 구제를 목적으로 음 8월 17일부터 소인극을 흥행하였더라(정읍)
〇선산에서도 청년회 중심으로 구제극을 펼쳤다(선산)
〇장성 정주 함안 등에서도 진재모금 활동이 있었다
〇오기선 목사 가족들도 안전하고 신문에 실림, 인천과 강화 양처 동포 안부 속보
동아일보 1923. 9. 30
〇매일에 백명 씩 동경에서 귀환 학생 30여명과 노동자 70여 명 광제환은 29일에 동경 해안 지포를 출발하였는데 그 배에 조선학생 97명은 부산으로 돌아왔으면 그 외 노동자도 100명이 있었다하며 이후에는 매일 학생 30명과 노동자 70명을 차차로 보내리라더라 – 조선일보 1923. 9. 30

나라시노수용소 옆 고진지역 주택지 202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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