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26일 전북 부안 영월신씨 부원군파 시인 신석정 집안
- 소설가 정우홍 이익상 신석상 가수 신형원

1985년 일본 지바현 야오치시 고진 관음사 보화종루 위령의 종 2025년 8월 26일 개수 준공식
지난 3월 중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100년 자료를 찾아 신문을 뒤지다 부안 출신 도쿄 유학생 소식을 찾았다. 부안 시인 신석정 영월신씨 부원군파 집안과 관동대지진 관련된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〇동경 유학생 소식. 전북 부안군 읍내 거주자로서 동경에 유학하는 학생들은 진재 후 소식이 적연하야 부형들은 우려가 극심하던 차 5,6일 전부터 전보 혹은 서찰로써 각자 부형에게 통지가 내도하였다는데 5명 중 4명만 통지가 유하고 신영연이란 학생만이 아직 통지가 무함으로 그 부형은 초조불기하며 소식이 내도한 씨명은 여좌하더라. 신기형, 이익상(친일, 언론), 신석갑, 정우홍 - 조선일보 1923. 9. 26
다음날 어렵게 통화가 이뤄졌으나 자료가 없다는 ‘신석정문학관’의 담당자가 소개하여 연락한 ‘부안문화원’ 김경현 국장과 연결되어, 자료를 찾아 다음날 보내주었다.
신석갑(1904(광무 8)~1975) 한의사. 호는 호민이며 본관은 영월이다. 간재 전우 선생의 제자인 유산 신기온의 아들로 부안읍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유학자인 조부 소암 신제하와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동생인 시인 신석정, 석우와 더불어 신학문도 익혀 높은 학식과 고매한 인품을 갖추었으며 문필 또한 훌륭하였다. (중략)
일제강점기에는 철저한 배일사상으로 불복종하며 살면서 창씨를 거부하고 자녀질도 모두 공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929년에 조선 민족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목적으로 조직된 이상재(대통령장, 계몽운동)·안재홍(대통령장, 계몽운동)·홍명희·조병옥(독립장, 국내항일) 등이 조직한 신간회 부안지회 조직에 적극 참여하여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혼란한 해방공간에도 조용히 살았다.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 있다 하여 좌경적인 인물로 지목되어 한때 핍박을 받기도 하였지만 끝내 독재정권에 굽힘 없이 일생을 살았다.
향토사학 연구가 빛의 속도로 닿았다. 신석정 시인의 형님과 사촌 매부 두 분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다.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에도 올곧은 신석정 시인의 삶과 문학, 그 뿌리를 추정하면 은밀하게 얘기하는 참상의 내용을 듣고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신석정 시인의 사촌 매형인 정우홍은 간도에서 독립운동 연락 활동을 하다가 1917년 7월에 일시 귀국하여 부안 갑부 신기량의 장녀인 신세정과 결혼했다 정우홍 소설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활동가로 식민지 시대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의 겪은 참상을 소설 「진재전후」로 고발했다.
신세정의 쌍둥이 동생인 신계정은 서울에서 언론인 전주 출생 이익상과 결혼했다. 이익상 소설가는 신석정 시인의 은사이며 사촌 매부로서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편집부장으로 활동했고(《학지광》, 1921. 6) 파스큘라·카프 등 프롤레타리아 문학 단체활동을 하였다. 1935년 40살에 운명하며 내 일찍 죽은 이유는 소설가 서해 최학송한테 헌혈을 많이 한 이유라 하였다.
뒤이어 신석상 소설가의 아버지가 관동대지진 참상을 목격한 신기형 선생임을 확인하는 청첩장과 관련된 《부안인터넷신문》 기사인 「49년 전, 부안을 찾아온 청첩장」을 저녁 10시쯤에 찾았다.
곧바로 신석정 시인의 당질인 신이영 유라시아문화연대 이사장께 전화를 드렸다. 신기형은 신석정 선생과 같은 항렬로서 같은 집안의 친척이라며 본인이 편저한 『영월 신씨 일옹공파 33년사』 책을 4월 15일 무명산악회 회원들의 망우역사문화공원을 답사할 때 선물하겠다며 필자의 노고와 열정을 칭찬하였다.
소식 없던 신영연 유학생도 족보를 보고 확인하겠다고 자다 일어나 전화 받았지만 100년 전 일을 이렇게 주변에서 확인하는 일이 뭔가 인연의 끈이 있다는 걸 믿게 되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 위령의 종 보화종루 보수 및 추모문화제를 돕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기금마련 주최 단체가 유라시아문화연대로, 그 단체 이사장이 신이영 선생이다.
1971년 12월 18일 토요일 오후 1시 서울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신기형의 둘째 아들인 소설가 신석상의 결혼식 주례를 선 ‘(김)동리 영감님’ 주례사가 궁금하다. 청첩인은 신석정·김용진·유기수·이동주·강인섭·정을병 등이었다.
6월 3일 삼경에 신이영 이사장이 카톡으로, 《조선일보》 1923년 9월 26일 자 기사에 관동대지진 당시 부안 출신 유학생 5명 중, 아직 통지가 무했던 신영연 씨에 대한 신상을 족보를 찍은 사진과 함께 보내왔다.
1903년에 태어나 1971년 5월 21일 사망하여 부안읍 망기산 선영에 잠들어 있는 신영연의 맏손녀가 <불씨>·<유리벽> 등으로 데뷔하여 <터>·<개똥벌레>·<서울에서 평양까지> 노래를 부른 가수 신형원이다.
신형원 가객이 주도하여 위령의 종 보수 및 추도문화제 기금마련 콘서트와 일본 현지 추모문화제가 열리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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