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제4358주년 개천절과 1909년 대종교

정종배 2025. 10. 3. 10:52

제4358주년 개천절과 1909년 대종교

 

제4358주년 개천절과 1909년 대종교

1909년 대종교가 개천절을 기념일로 정했다.

독립전쟁시기 항일투쟁 및 무장투쟁의 선봉에 선 대종교인 30만명에서 10만명이 순국하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 역사에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최초의 독립선언 대한(무오)독립선언 39인 중 35여명이 대종교인

청산리대첩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은 대종교인이 주축이다

임시정부 의정원 요인 29인 중 21명이 대종교인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대종교의 비밀결사인 귀일당 소속이다.

1공화국 국무위원에 대종교인이 주축이다

지금도 홍은동 산 중턱 총본산에서 50여명의 형제자매들이 경건하고 당당하게 경일을 맞아하며 거룩한 뜻을 이어가고 있다.

개천절 노래

 

1절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2절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텄다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3절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 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탐구 및 탐방하며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두 가지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와 대종교인의 독립전쟁 시기 항일무장투쟁사이다.

 

대한(무오)독립선언

 

1918년 음력 11월 또는 1919년 2월 1일 만주·노령을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명이 한국 최초의 독립을 선언한 글로,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되었다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하며, 작성자는 소앙 조용은이다.

필자는 조소앙기념사업회 이사이다. 조소앙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조만제(아사카와 노리타카 다쿠미 형제 추모회 회장)의 제안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념식장에서 남녀 학생들이 낭독하였다. 청담고와 청량고 학생회장과 필자의 학다리중앙초등학교 은사 류방현 선생님 손녀인 류혜원(진선여고) 등이 낭독했다. 독립운동 단체 기념식장에서 학생들이 선언문을 낭독하는 순서는 대한독립선언 기념식이 처음이다.

조만제 회장은 커가는 학생들이 선언서를 읽고 공부해야 그 정신이 이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로 많은 행사에서 학생들이 낭독하게 되었다. 이 독립선언서 전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의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병합 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2,000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 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독립선언서의 특징으로는 먼저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한일병합의 무효를 선포하고, 우리 독립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 무력적 대항을 선포하고 그 선언서의 대표자로는 해외의 저명한 인사가 거의 망라되어 있다는 점 등도 들 수 있다. 대한(무오)독립 선언서의 39명 서명자 가운데 35명이 대종교 간부인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박은식, 박용만, 박찬익, 신채호,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시영, 등이었다.

 

남파 박찬익

1921년 제2회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다.

 

홍암 나철이 독립운동 방편으로 단군교를 창시하여 대종교를 중창하였다. 대종교인 10여만 명이 순국할 정도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대종교 활동의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조선어학회 주요 인물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백포 서일이 독립전쟁의 준비를 하기 위해 조직한 중광단으로부터 시작된 정의단은 북로군정서로 개칭하였습니다.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현천묵, 총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 나중소, 연성대장 이범석, 보병대대장 김규식 등이 참가한 북로군정서의 "청산리 대첩"은 대한 독립군 홍범도의 "봉오동 대첩"과 대한독립군단 지정천의 "대전자령 대첩"과 더불어 독립 투쟁사에 빛나는 3대 업적으로 모두 대종교인이 그 주인공이었다.

 

헤이그밀사 이상설과 임시정부 김규식,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신규식, 신익희, 엄항섭,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조성환, 조완구, 황학수 등이며

 

조선어학회 김두봉, 신명균, 이극로, 이병기, 이은상, 주시경, 정열모 지석영, 최현배 등은 대종교 비밀결사 귀일당 소속이다.

 

독립운동가 김경천,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나중소, 서상일, 서일, 신팔균, 양세봉, 안희제, 윤세복, 이동열, 이동휘, 이범석, 이상룡, 조소앙, 지청천, 현천묵, 홍범도 등이다.

 

민족사학자 박은식, 신채호, 안재홍, 정인보 등이다. 언론인 양기탁, 유근, 장지연 등이다.

이 외도 권태훈, 나운규, 손기정, 신성모, 안재홍, 안창남, 안호상, 홍명희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 간부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은 김구, 안창호, 여운형, 조봉암 등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싸운 초창기 애국지사의 90% 이상이 대종교와 관계가 깊게 있었다.

춘사 나운규

 

망우리공원에 대종교인은 종두법의 송촌 지석영, 20년대 주의자 넘버원 해광 김사국, 민족사학자 호암 문일평, 임시정부 법무부장 남파 박찬익(현충원 이장, 묘역 남음), 그의 아들 박영준, 조선어학회 제2대 간사장으로 일제가 창씨개명을 압박하자 나철 사진을 안고 자결한 주산 신명균 독립운동가(무연고 이장 실전, 묘비 남음), 대한독립선언 39인 외 서명 추정 6인이자 임정요인 별산 나우, 영화 <아리랑>의 나운규 독립운동가(현충원 이장 묘비 묻음), 3.1혁명 고종황제 인산 날 망우리고개 27인 결사대 동우 이탁 독립운동가, 3.1만세운동 후 간도로 가 북로군정서 청산리전투 참가 오산학교 교사 8년 조선어학회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를 역임한 명재 이탁 독립운동가(현충원 이장 묘비 남음), 민요 채록과 고향 작곡가 산남 채동선, 대종교 사상가 역전 최익환, 설태희 묘비 제와 문일평 묘갈을 지은 위당 정인보,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 조사1부장인 현포 이병홍 독립운동가와 묘비를 쓴 해공 신익희, 임시정부 법무장 옛 비문을 쓴 조완구, 계산 김승민 독립운동가 비문을 쓴 이현익 등이다.

 

대한독립선언서 39인 중 30여 명이 대종교인으로 변절자도 이탁(본명 이용화) 한 명밖에 없다.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가운데는 박희도·최린·정춘수가 변절했고 선언문을 쓴 최남선도 친일파로 변신했다. 2·8 독립선언 서명자 11명 중에서도 이광수·서춘 등이 일제에 협력했다.

호암 문일평

 

망우리공원에는 대한독립선언 39인 중 도산 안창호, 남파 박찬익 선생 두 분이 안장됐다.

39인 외에 6인이 더 서명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중에 독립운동가 별산 나우 묘지는 망우리공원 솔밭약수터 북서쪽에 남아 있다. 도산 선생은 1973년 도산공원, 남파 선생은 1993년 11월 19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인 묘역(12)으로 이장하여 안장되었다.

 

망우리공원 묘지 터(묘지번호 204934)에는 1949년에 세운 비석(조완구 글)은 많은 글자가 마모되어 있다. 아버지 남파 선생과 같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받은 3남 박영준(1915~2000)이 1964년에 세운 비석(조지훈 글)은 쓰러져 세 동강 나 다시 붙여 세운 묘비와 봉분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박영준의 부인 신순호(1922~2009) 독립운동가는 광복군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