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

1923년 10월 5일 안창남 오누이 만남. 조선인으로 서울 상공 최초로 비행한 안창남 비행가 관동대학살 목격담

정종배 2025. 10. 5. 12:12

1923105 안창남 오누이 만남

 

동경 진재 지방 생존 동포 조선총독부출장소조사 제9(130) 조선일보

전호암 23 식민무역어학교 동 장흥면 - 신창범 조인승 등과 진재 참상 증언자

 

본사 특파원 5회 안부 조사(248) 도착, 총독부 학생 조사(99)도 도착 동아일보

유동복 안동 임동면 동경부 하호총정 원병위 241 (중대)(대통령표창, 3·1운동)

1899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60년에 순국한 유동복은 1919321일 경북 안동군 임동면 편항시장에서 유연성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 집행유예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어 2019년 운동계열 3.1운동 대통령표창을 서훈받은 독립유공자이다

전호암 장흥군 장흥면 조선총독부조사

 

이상협 본사(동아일보) 편집국장 기간 본사 급 재외 동포 위문회의 용무를 대하고 일본 동경에 출장 중이든 바 어제 5일 오후 650분 도착 열차로 귀경함.

 

이재지 도항 3일 해제 복교하는 학생에게

진재지로 가는 조선사람의 여행은 절대로 금지하였으나 그 후 질서가 대개 정돈하였으므로 지나간 3일부터 학생으로서 이재지 학교에 복교하는 이는 소관 경찰서의 증명서를 가지고 마음대로 가도록 해금이 되었다더라. - 동아일보 1923. 10. 5

 

환희의 누감격의 누

어젯밤 무사 입경한 안창남 씨 차 중까지 마중 간 매씨의 기쁨

혼란 중의 동경에서 일시 불행한 소식을 전하던 비행가 안창남 씨는 3일 오후 650분 경성에 도착하는 특급열차로 무사히 경성에 돌아왔다. 반가운 소식을 듣고 영등포까지 마중을 나갔던 그의 매씨는 사랑하는 아우의 손목을 잡으려 꿈이 아닌가 하여 아무 말도 없이 다만 눈물만 흘리는 모습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남매간 애정이 얼마나 깊은 것을 짐작하게 하였다. 차가 정거장에 닿으매 다수한 지구의 환영 중에 안씨가 차에 내리어 곧 서대문 미근동 21 자기의 친구집으로 들어갔다더라

- 동아일보 1923. 10. 5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일본 여자의 도움을 받아 군마현으로 피하기까지

안창남 씨 경험담

구사일생으로 위경을 벗어나서 꿈속같이 고향에 돌아온 안창남 씨는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이번 고생한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하며 다시 한번 감개가 무량한 듯 하더라.

4인이 좌이대사坐而待死 지진 중에 병실에서

나는 몸에 병이 있어서 지진이 나기 전 약 3주일 전부터 경교구[京橋區]에 있는 지전병원[池田病院]이라는 곳에 입원하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던 1일에는 나의 친구 한 사람과 이웃방에 있는 환자 한 사람과 간호부 한 사람 도합 4사람이 내방에 모여서 점심밥을 먹으려는데 돌연히 집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차차로 지진이 커져서 방바닥이 들썩들썩하고 방 네 귀가 어긋나기 시작하기로 창밖을 내다본즉 앞에 있는 건축청부 영업하는 3층 벽돌집이 와글와글하며 전찻길로 무너집디다. 이 광경을 본 우리 4사람은 밖으로 나아가도 살길은 없을 것을 짐작하고 방 한가운데에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이고 죽더라도 같이 죽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얼마 아니하여 지진은 그치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아무 연고도 없이 의사와 환자가 모두 거리로 뛰어나갔습니다.

 

선편으로 지포[芝浦]에 바다에서 하룻밤

거리로 나가본즉 벌써 전찻길에는 사람으로 진을 쳤고 앞뒷집 모두 무너졌는데 돌아가는 지진은 정녕 또 있을 것이오 이만큼 지진이 있었으니 의례이 불이 날 것이라는 공론이 분분하여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줄을 몰라할 때 벌써 여기저기서 불이 일어나니 순식간에 우리가 서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이때에 나는 부근 내 속에 빈 배가 있는 것을 보고 두말할 것 없이 그리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이때에 나와 같이 뛰어들어온 환자와 간호부 몇 명이 나의 탄 배로 뛰어들었습니다. 물에서 위험을 피하려 하였으나 화제의 기세가 점점 맹렬하여 도저히 조그마한 하천 속에서는 아니될 줄을 아는 우리는 배를 떼 가지고 달아나기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아니 가서 곧 불보다도 더 무서운 해일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천이 좁으므로 별일이 없었으며 그길로 바로 품천[品川]으로 도망을 하여 그날 밤은 지포 해안에서 불안 중에 지냈습니다

 

호구[虎口]에서 호구에 품천에서 겪은 위경

그 이튿날 2일 정오쯤에 우리는 모두 배가 고픔으로 무엇을 조금 먹으려고 품천에 배를 대고 상륙하였으나 위험은 갈수록 더 심하여졌습니다. 오후 2시가 되었는가 소방대 종소리가 사방에 요란하게 들리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이란 사람은 모두 바닷가로 밀려나옴을 보고 우리는 웬일인가 또 불이 났나 하였으나 나중에 알고 본즉 어떠한 일이 생겼다하여 그와 같이 소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다시 배를 탔더니 청년단인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와서 조사를 너무 심하게 함으로 나는 이제는 그만이다! 하였으나 요행히 위경을 면하고 그 밤은 역시 바다에서 새인 후 그 이튿날 3일에는 다른 환자들과 함께 품천에 있는 품해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찌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안등창남[安藤昌男]이라고 일본 이름으로 행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인으로 변장하고 일본여자의 구제로

그 병원에도 삼사일 있으니까 있지 못할 형편이 있어서 이제는 어디로 갈지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는 데에도 살약이 있다는 셈으로 나의 목숨을 구원해준 사람은 어느 젊은 일본 여자올시다. 그는 나와 같은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이곳까지 같이 온 죽전[竹田]이라는 일본 청년이 아내인데 내가 조선 사람인 것도 알고 살아날 도리가 없는 것을 동정하여

! 안등 씨! 별 수 없으니 나와 같이 갑시다. 저이(자기 남편)는 일본사람이니까 상관없이 나와 같이 부부처럼 차리고 갑시다.

하는 소리를 들은 나는 고맙다 할 것도 없이 그럽시다하고 일본 상인처럼 변장을 한 후 가방을 같이 들고 정거장까지 무사히 걸어가서 품천에서 차를 타고 군마현 천교시에 있는 죽전의 형님 집으로 갔습니다. 그날이 6일 줄로 생각합니다.

 

통신도 부자유하여 죽었다고 소문까지

천교시에 가서는 거의 3주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그 주인에게까지 자기가 조선 사람인 것을 알리지 않고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아무 데도 통신을 할 자유가 없어서 필경 동경에서는 내가 죽었다는 소문을 내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이번 일은 살었어도 살은 듯 싶지도 않고 죽었다고 소문도 무리는 아니외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 24일에야 처음으로 동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급한 마음에는 그날로라도 귀국하고 싶었으나 사정이 허락지 아니하여 이제야 돌아오게 된 것이오. 그동안에 이만 사람을 위하여 많이 근념해 주신 여러분에게는 무엇이라구 감사한 말씀을 여쭐 길이 없습니다. - 동아일보 1923.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