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0월 6일 동요 반달 윤극영
동경진재지방생존동포 조선총독부출장소조사 제10보
대삼서관내현주자(201명) 〇김달준 33 광주군 송죽면 송죽리, 동아통합조합 간부 1931. 1. 17 대판조일신문 조간·대판매일신문 조간
각소재주자(79명) 〇이근무 경성부 당주동, 〇김문집 대구 남산정, 〇이규경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 〇주영방 전주군 완전면 대정리,
대총서관내현주자(66명) 〇민석현 32 경성부, 〇이근무 28 경성부, 〇신현철 21 함평군 함평면 내교리
계림장장원(66명) 〇윤극영 경성부 매동(소격동) 학생 〇윤경순 함평 학교면 (여학), 〇윤병선 함평 학교면 학생, 〇이이주 함안 산인면, 〇민석현 32 경성부, 〇이근무 28 경성부 당주동
정전문서 관내 현주자(28명) - 《동아일보》 《조선일보》, 1923. 10. 6
〇외인 사망 정미 4 인도 38 영국 91 미국 48 로국 62 독일 11 중국인 658이라더라
〇재등 총독에게 진리의 발표를 망함.
〇사회적 내면적 생활고찰(7) 재동경 김상규(기) 1. 사회의 개관(속) (3) 사교(속)
〇동경진재 학생 위안.
이재 유학생 구제회에서는 근간 동경으로부터 귀국한 이재 유학생의 위안회를 9월 23일 경신구락부 내에 개최하고 정수영 씨의 “우리는 눈물에 잠긴 미소로 반기자”는 개회사와 유학생 박동기 군의 감상담이 있었고 고륜[高輪]중학교 김종량 군의 동경 진재의 참상에 대한 목격담이 있은 후 다과로써 주객이 환영하는 자리를 끝내 무사폐회하였다더라(군산) - 동아일보 1923. 10. 6
군산우체국 골목에 사옥을 둔 《군산신문》은 김종량이 창설해 초대사장이었다. 김종량은 서울 《한성일보》 사장도 겸한 거물이었으며 동산학원 이사장도 역임했다. 김종량은 도쿄고등공업학교 건축과 특별예과 학생으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을 겪었다.
노창성도 도쿄고등공업학교 전기화학과 4학년에 재학 중으로, 노창성은 경성방송국 방송인 1호로서 부인은 이옥경으로 경성방송국 아나운서 1호이다. 두 분의 유택은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다. 둘째 딸이 패션디자이너 1호인 노라노(본명 노명자)이다. 노라노의 첫 번째 남편은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라는 신응균(친일,군)이다.
1923년 10월 7일 정신병 환자와 젊은 아내 자살
동경진재지방생존동포 조선총독부출장소조사 제11보
직업에 학생 토공 인삼행상 노동 철공 직공 이상(엿장수) 인력부 운송업 고학생 유공(방직공장) 단치공(철근공) 다양한 직종이 적혀 있다
기옥현불이전재주자(98명)
〇김영달 20 용인군 원산면 학생(대통령 표창, 3·1운동) - 조선일보 1923. 10. 7
1901년 경기도 용인군에서 태어나 1967년 순국한 김영달은 1919. 3. 21 경기도 용인군 원산면에서 황경준 등과 같이 주동이 되어 2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하며 원산면사무소 앞에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 후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되어 운동계열 3.1운동 1992년 대통령표창을 서훈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장야현하이전 재주자(8명)
〇동경에 일어난 비극 진재 정신병자 130여 명이다
관동대지진이 휩쓴 뒤 정신병 환자가 동경 각처에 130여 명이나 되는데 그중에 여자가 50명이요 남자가 80명인데 차차로 정신이 안정됨에 따라 쾌유한 사람도 있으나
40세 전후의 사람은 회복되기가 쉽고 20세 전후로 된 사람은 낫기가 어려운 모양인데 원인은 이번 지진으로 혼란 중에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동경전)
- 1923. 10. 7 동아일보
석남 송석하 선생은 경제학을 공부하러 동경상과대학에 유학하였다가
제노사이드 참상을 목격하고 2년 정도 정신적 충격으로 헤매다가
민족의 뿌리가 무엇인가 찾기 위해 민속학을 공부하여 선구자로 활약했다
〇남편 생사 몰라 젊은 여자 자살 동경진재로 생긴 비극
금번 동경 진재가 간접 원인이 되야 꽃다운 목숨을 헛되이 버린 젊은 여자가 있다
경북 달성군 현풍면 하동 리정용의 처 19세 박성녀가 금번 진재가 일어난 후 동경에 유학 중인 자기 남편 리정용과 오라버니 되는 박무덕의 소식을 몰라 애타는 정을 이기지 못하는 중 다른 사람들은 모다 생사의 소식이 있것만은 기다리고 기다리든 자기 남편은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음은 분명히 죽은 일이라고 비관한 결과 지난 1일에 두 살 먹은 어린 아들과 60여 세의 늙은 시모를 두고 무참히 자살하였다
〇창녕에도 유언죄로 벌금 10원. 경남 창녕군 교하리 리대곤(47)은 생활이 곤란하여 자기 딸을 일본에 보내두고 역시 소식을 몰라 이곳저곳 헤매던 중 마침 어떤 노동자가 동경에서 공차를 타고 나와서 동경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어떤 일본인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이 창녕 경찰서의 귀에 들리어 유언비어죄에 걸리어 지난 일일에 벌금 10원에 처하였다 - 동아일보 1923. 10. 7
- 정종배 다큐시집 1923관동대학살-생존자의 증언(창조문예사,2023)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자리매김이 필요하다. 한국문학사에서 사회주의 경향의 파스큘라와 카프 결성에 계기가 되었다.
윤극영 홍난파 정순철 세 분의 음악인도 당시 동경 유학생으로 참상을 목격하였다. 윤극영의 <반달>도 말년에야 관동대학살과 관련이 있다고 고백했다.
1948년 서거한 석남 송석하 선생은 살아생전 자신의 삶에 방향이 달라진 이유는 관동대학살이라고 첫 번째 고백한 분으로 알려졌다.
시인 김소월 이상화 김동환 김영랑 박용철 고한용 소설가 이기영 정우홍 채만식 한설야 장자락 극작가 유치진 등도 관동대학살 현장의 목격자로 작품에 그 참상이 반영되었다.
윤동주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도 당시 동경 유학생으로 참상을 목격했다.
이육사 김동명 염상섭 등은 참상 이후 동경 유학생이었다.
백철 김용제 등은 나프에 활동하며 일본어로 참상에 대한 시를 썼다.
시인 이상도 참상을 알고 난 뒤에 시가 난해시로 변하여 광복을 염원하는 상징과 은유로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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