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이야기

이경록 시인

정종배 2018. 10. 3. 16:11

 

경주 불국사에 오면

대학 신입생 때

복학한 두 분의 선배

이경록 표성흠

 

이경록 선배님

과 가을 문학의 밤 시를 보고

지하 냄새 난다고 격려하셨다

 

그 해 겨울 백혈병으로 29세 요절

성모병원 문병 가 뵈올 때

펑펑 내린 함박눈을 보고

왜 저 눈발은 힘이 없이 내리느냐

맑은 눈빛 향기가 그립다

 

불국사 입구

경주고 동기들이 세운 시비

수학여행 올 때에

혼자 찾아 추모하며

선배를 기렸는데

 

지금은 황성공원으로 옮겼다

 

▶ 이경록

1948년 경북 월성군 강동면 다산2리 父이환익 母김순연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60년 경주 황남국교 졸업

1963년 경주 중학교 졸업. 경주고 입학

1965년 충남대 전국 고교생 백일장 시 장원

건국대 고교생 현상문예 시 당선

대전대 및 미국 오스틴대 고교생 작품모집 시 당선

196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학생부 시 당선

경주고 졸업

신라문화제 시 장원

1967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입학

1969년 육군 입대

1972년 군제대

197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74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 당선

이수인 씨와 결혼

1976년 '자유시' 동인 결성 (동인: 박정남, 박해수, 이기철, 이동순, 이태수, 이하석, 정호승 등)

백혈병 발병

1977년 중앙대 예술대 졸업

투병 끝에 타계

'자유시' 2집에 15편의 유고시 수록

1979년 동료들이 추모 책자 '이 식물원을 위하여' 발간

1986년 경주시 진현동「우정의 동산」에 이경록 시비 제막

1992년「그대 나를 위해 쉼표가 되어다오」(고려원) 출간

 

 

 

그대

 

이경록

1

표의문자로 적는, 그대의 이름

그대의 이름이 내 몸을 감싼다.

어둠의 껍질이 굳게 덮인 이 저녁

어둠 속에 적어 보는 그대의 이름이

내 몸을 감싸고 소용돌이친다.

부호들은 아직도 문체 속에 박혀 있고,

제자리를 찾지 못한 낱말 하나

행간과 행간 사이를 건너가고 있다.

이 편지, 그이의 마음이 숨은 이 편지,

사랑하는 마음이 종처럼 울려서

멀리 숲길을 헤매도 은은히 들린다.

은은히 울리는 종의 마음은 어둠 알맹이,

내 몸에 닿으면 전파처럼 떨려나

다시 말이 되고 그대 목소리 되는 것을.

그대 목소리 내 몸을 밝혀 든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고 찍던 그 쉼표,

젖은 바다의 물머리를 쓸어 올리고

내리는 빗방울에도 헤아리던 그 의미.

그것들이 쌓여서 흐르는 곳곳에

그대와 내 마음이 합쳐서 바람 분다.

 

2

아직도 그대와 나는 불완전 명사,

어떤 내용에서도 홀로 쓰일 수 없고

홀로 하나의 구문을 이룰 수 없다.

그대는 꿈속에서 전서구(傳書鳩)를 날리고,

그 새는 내 잠의 하늘을 건너온다.

전서구의 발목에 매달린 쪽지,

보고 싶다, 보고 싶다고 그대 말하는

거기에는 바다가 있고 출렁이는 그리움 넘친다.

 

 

 

 

김기문 일병

 

이경록

 

우리들의 시대에는

김기문 일병, 그가 있다.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는

3천만분의 1, 조국이 있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경주와, 가차운 포항의 겨울 바다가 있다.

존 메이스필드가 있고, 지오바니 세칸디니

그 사람의 증세가 있다.

우리들의 권 형, 민이가 있다.

친구 강아가 있고, 복희가 있고,

또, 춘향 언니가 있다.

혼자서 푸는 괴롬의 끈의 매듭이 있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권오운 형과 마종하 형,

김형영 형과 이동하 형이 있다.

우리들의 수도와 대학이 있고,

학문과 천재가 있다.

실크빛 연애, 언짢은 결혼이 있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김기문 일병, 그가 있다.

월남전으로 떠나는 친구놈이 있다.

비겁한 이마와, 떠드는 입이 있다.

또, 말없는 귀가 있고, 눈이 있다.

우리들의 시대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이경록

 

저 흰 북극의 곰들

머릴 휘두르고, 일어서고

대낮의 거리에서 껄껄거리는,

저 흰 북극의 곰들

 

통행을 무시하고 표지판을 무시하고

말과 수사법을 무시하고

라디오와, 한 장의 커피와, 시민들의

끝내 모호한 신문, 텔레비전을 무시하고,

 

저 흰 북극의 곰들

머릴 휘두르고, 일어서고

대낮의 거리에서 껄껄거리는

저 흰 북극의 곰들

 

 

 

달팽이

 

이경록

 

자기 시대에서 벗어나 오직 떡갈나무의

그 울울한 숲속에 묻혀

달팽이는 지낸다. 한때를

이 얼마나 고적한 일인가.

언제나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연약한 두 개의 뿔로

나무와 나무의 줄기와 잎들을 더듬으면서

맹인처럼 두 개의 뿔로

나무와 나무의 줄기와 잎들을 더듬으면서

맹인처럼 살아가는 현대인.

이 얼마나 고적한 일인가.

그러나 암놈은 재빨리 몸을 움츠러뜨린다.

주위와 환경에 적응하고

행동을 규제하는

이런 점이 숫놈과는 다르다.

그들에게도 가벼운 사랑은 있는 것인가.

식사와 신문과 라디오와

한 잔의 커피와 막연하게 오후를 기다리는

그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는 것인가.

그러나 언제나 숫놈은 마찬가지다.

솟아오른 두 개의 뿔로 나무와 나무의

줄기를 더듬으면서,

한가하게 조금씩 기어나간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묻지 마라.

실크빛 연애나 언짢은 결혼

학문과 천재의 그런 것에서부터 기어나간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맹인처럼 더듬고 주의하며 살아가는 현대인.

자기 시대에서 벗어나 달팽이는

오직 떡갈나무의 그 울울한 숲속에 묻혀 지낸다.

 

 

 

 

문법

이경록

 

1

반짝이며 뛰는, 나는

시간의 한 알 핵이네.

전화를 걸고, 기다리고,

걸터앉은 조용한 등의자, 책상 위

구두점을 찍는 연필이네.

나는 의식의, 때로 바다네.

온몸에 유리의 섬은 돋아나, 돋아나,

해변마다 잠기는 익사.

그 파도네. 밀리는 모래알이네.

집게를 들고, 나는 시작하네.

쉼표를 줍고, 끝의 마침표

聯 속에 박혀 있는 낱말들을 뽑아내네.

나는 讀書네.

 

2

공간의 구멍에 내리는, 빛의

비듬, 나는 그것을 터네.

벽에 기어다니는 햇살을 잡고,

잠시 귓속을 후벼파네.

가득찬 귀지, 하늘의 소문을 듣네.

나는 언제나 바늘이네. 실이네.

허옇게 드러난 한낮의 풍경

작약의, 그 터져 있는 내장을 꿰매고,

떨어진 바람의 소매를 깁네.

나는 소리들을 모아, 생각에 헹구네.

맑게 씻어서 밖으로 띄우고,

공기 속을 헤치고 소리들이 떠도는 것을 보네.

사물의 굳은 껍질을 벗기고 있는

정신의 칼, 나는 그 칼이네.

 

 

 

방의 주어

이경록

 

1

바퀴를 달지,

바퀴를 달고 굴러가지, 내 방은,

四壁에 못을 박고,

철책으로 문을 달고,

밀폐된 잠속을, 잠속의 복도를,

굴러가지, 내 방은,

불편한 밤은, 덜그럭거리며

심야를 갈아눕히고,

책들의 피로를 갈아눕히고,

한밤내 굴러가는 마차. 내 방은,

 

2

아내여. 나는 네 잠을 못질하고,

잠시 네 꿈속을 건너간다.

너와 나의 遺産, 어두운 우기의

비오는 농지를 건너간다.

농지 속의, 젖은 흙탕길을 건너간다.

아내여. 나는 건너가다가, 가다가

이윽고 네 사지를 가르고, 두 개의

흔들리는 유방을 가르고

못질한 잠을 헐고 들어가 눕는다.

아내여. 나도 네 잠의 한 모서리로 잠든다.

 

 

 

병(病)

이경록

 

우리들의 편집국 위로

그 무엇이 떨어진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전신의, 흐린 그림자도 없는.

그것은 옥상에서 내려와

재빨리 보도실의, 벨을 울린다.

주의하라 주의해

우리들 오랜 영사(映寫)의, 의식망이 말한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포착의, 잡혀지지도 않고,

달려가는 빠른 전신(電信)에 묻어

국(局)의 대리석 층계를 뛰어내리는 그 무엇

주의하라 주의해

지하층에서부터 상층, 현관과

복도, 곳곳이 이미 황색신호를 가리키고

탁송의 철자판을 두들긴다.

무엇인가, 모두들 깊은 혼란에 빠져 있다.

말하라. 우리들의 편집국 위로 떨어지는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무엇.

보도실을 거쳐 재빨리 사회면에 가 닿는 활자

여론의 균인 그 무엇을……

 

빈혈

이경록

 

밤이 되면 내 몸에서 피가 빠져 나갑니다. 피는 어디로 가나. 피는 공중으로 공중으로 흘러서 하늘로 갑니다. 하늘나라, 피가 가는 그곳은 언제나 내 죽음의 집입니다.

 

피가 빠진 몸은 홀로 꿈을 꾸다가 차게 굳어서 흑연이 됩니다. 鉛이 된 몸. 鉛의 꿈. 鉛이 눈물을 흘립니다. 내 피는 하늘에서 별이 됩니다.

 

 

 

이경록

 

모든 인연이 끝나

돌아가는 한 마리의 새,

그 지평을 넘는 회상의 어디쯤

새의 영지로 자라는 한 그루 나무여.

그 어느 가지엔 달이 뜨고

또 어느 가지엔 화안한 시간의 낮,

햇빛 눈부신 그 속을

바람은 문답 한 번 하는 일 없이 불어가고,

문을 열고 계절은 나서지만

언젠가의 책임처럼 눈을 뜨는 꽃이여.

사방에 가득한 살내음, 살내음 묻은 속옷의

그 깊은 생명을 자극해 오는 여자여.

때때로 의식의 뿌리를 흔드는 비가 내리고

신경과민의 사랑을 앓고 있을 때

정박하고 있는 노을의 流域.

까만 원형의 밤을 밴 여자여.

내실의 깊은 회랑을 돌아 조금씩 내의를 벗겨가는 소리,

불안과 불면의 눈을 들면, 거기

생리의 우수 속을 강물이 흐르고

미지의 對岸에서 등불 밝히는 최초

시작되는 모든 방향의 동서남북.

수분을 빨아올리는 식물성, 어느 관능의 여자여.

그 깊어가는 일상의, 진한 밤의 침상 위

차라리 완강히 거부해 보는 뜨거운 욕망이여.

한아름 열정의 꽃잎을 뿌리며, 뿌리며

속살내음 散髮히 씻겨가는 바람 속에

어데쯤, 맑은 눈을 뜨는 한 마리 金銀의 새여.

 

 

 

시간

이경록

 

시간의 털이 있다면

우리도 그 중 한 개겠지.

시간은, 항상 털을 흔들며 빗질한다.

떨어지는 것은,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간의 한 단면을 잘라서 보면

우리는 굳어져 있다.

굳어져, 죽어 있다.

시간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편지를 쓰게 하고,

또한 벌레를 털게 한다.

시간의 살갗은 언제 어디서나 깔려 있다.

간혹, 숨구멍 같은 데서

우리를 뿜어냈다가, 끌어들인다.

 

 

자료 재공, 문학 전시관 (kumari문학관)

 

홈으로 index.htm바로가기

 

 

 

 

 

출처 : 감포를 아십니까 | 글쓴이 : 곰배 | 원글보기

 

이경록 시인의「빈혈」,「말」,「이 식물원을 위하여 4」

나는 집으로 간다

'정종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관사 국행수륙재  (0) 2018.10.13
화가 정현웅의 책그림전  (0) 2018.10.13
동리목월문학관 답사  (0) 2018.10.03
한국근대미술 ,그 울림의 여정  (0) 2018.09.06
마산리 표산 고향 방문  (0) 2018.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