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김사국 박원희 부부 독립운동가

1920년대 국내 사회주의 상징적인 인물 해광 김사국 대종교인과 ‘2022년 5월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여권신장 항일투쟁 박원희 부부 독립유공자
해광(解光) 김사국(金思國, 1895~1926) 박원희(朴元熙, 1898~1928)

김사국 박원희 훈장증 사진
서울청년회를 주도한 김사국은 1895년 11월 9일 충남 연산에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명 해광(解光)이다.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본적이 서울 종로 통의동 28번지로, 백과사전에는 출생연도가 1892년생으로 되어 있다. 1907년 아버지를 여의고 같은 주의자인 아우 김사민과 함께 두 아들이 명이 짧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 안국당을 따라 금강산 유점사에서 불도와 한학을 공부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생활고로 중퇴하고 1910년 일제에 나라가 강제로 병탄 되자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였다. 1919년 국민대회사건으로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인품이 호탕하고 활동적이었으나 나중에 망명 중 폐결핵에 걸려 귀국 끝에 1926년 5월 8일 숨졌다.
일제의 조선 강점 독립전쟁 당시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다가, 1919년 3·1운동 전에 귀국하였다. 1919년 3월 17일 경성 내자동 한성오의 집에서 홍진·이규갑·한남수 등과 모여 3.1운동의 불꽃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다. 김사국은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정부를 구성하기 전 회의 내용을 민중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민중대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받아들여져 대표자들이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정부수립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4월 19일 그의 집에서 안상덕·현석칠·김유인 등이 회합을 갖고 자금을 모집해 1919년 4월 23일 보신각 일대에서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약법이 적힌 선전물이 뿌려지고 한성임시정부의 건설이 선포되었다. 이 국민대회사건으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성임시정부 건설 이를 기리는 표지석은 3호선 광화문역 1번 출구와 2번 출구 사이 인도에 세웠다.

김사국 숙소 터 종로 공훈록에서
1920년에 출옥 후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노동대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며, 1921년 1월에 창립된 이영·김명식·장덕수 등과 서울청년회 결성을 주도했다. 1921년 4월 5일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또한 4월 9일에는 박사직·김병규·김종범 등과 '조선교육개선회'를 조직하였다. 4월부터 조선청년회연합회위원, 조선노동대회의 간부로 활동하다 7월 박원희와 결혼한 뒤 9월에는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며, 11월 비밀리에 초청받아 도쿄로 건너가 『오일신보』를 발기하고 박열(대통령장,일본방면,1989)·김약수·조봉암 등과 함께 흑도회를 결성했다. 1920년대 국내 사회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2월에는 재일유학생 중심의 ‘조선고학생동우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청년연합회 창립회관 터 주소는 당시 경성부 서대문정 1정목 128 지금의 주소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기 163 오피시아 빌딩 앞 택시 정류장 주변이라 추정한다.
1922년 1월 귀국하여 '무산자동지회'를 조직하였다. 무산자동지회는 '동일한 사회운동에 뜻을 두는 사람만이 회합하여 무산자계급의 생존권을 확립한다'는 목적 아래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1922년 2월 동우회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농민의 사상단체를 조직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김윤식 사후 사회장을 고집하는 민족주의 계열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자 조선귀족 자작이었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하는 것은 과하다는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사회혁명당 조선공산당 등의 사회주의 계열이 사회장을 반대했다. 죽은 지 2주만인 1922년 2월 4일 1,000 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치렀다.그해 3월에 열린 조선청년연합회 제3회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사건' 관련자인 장덕수(친일,교육학술)·김명식(애족장,국내항일,1999)·박이규 등의 제명을 제안하고, 이영 등과 18개 단체로 이루어진 연합회에서의 서울청년회 탈퇴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은 좌우세력의 불분명한 관계가 명확해지는 하나의 계기였다. 또한, 4월에 열린 조선노동공제회 제3회 정기대회 때 차금봉(애국장,국내항일,2005)과 손잡고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 10월 25일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 개최 등을 지도하였다. 11월에 일어난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계기가 되어 아우 김사민(애족장,국내항일,2009)은 투옥되었고 김사국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대 종로의 시상지도
김사민은 1922년 10월에는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자유노동조합自由勞動者組合 발기총회 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자유노동자조합 취지서’를 이시우(李時雨) 등과 인쇄하고, 그 내용을 1922년 11월 11일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잡지 『신생활(新生活)』 11호에 게재하였다. 이로 인해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발생하여 『신생활』 11호는 일제 당국에 압수되고 출판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23년 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을 받는다.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 중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여 간수의 칼을 빼앗아 머리를 찍어 중상을 입혔다. 김사민은 이 일로 모진 고문을 당하여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김사민은 1924년 출옥 후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에서 어머니의 간호를 받는다. 아마도 형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석왕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3월 조선노동대회를 경성노동회로 개편하는 데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후 행적에 대해 구체적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1933년 5월 4일자 『조선일보』에서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사민은 모친과 견지동 청년총동맹 사무실 한쪽 구석에 다다미 석 장을 깐 방에서 살고 있었다. 일제의 고문과 굶주린 창자에 구걸로 정신이상이 생긴 김사민은 그 와중에서도 그날그날의 각종 신문 수십관을 방 한모퉁이에 정연히 쌓아두고 있었다.”
김사국의 딸 김사건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아버지 김사국은 딸이 역사를 바르게 세워라, 그 열망으로 딸의 이름을 김사건(金史建)으로 지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까지 생존해 있었으나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성숙(독립장,임시정부,1982)은 김사국을 언급하면서 김사민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 대목이 있다. (김사국은)서울 사람으로, 정상적인 학교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한문을 많이 알았어요. 동생이 사민이었는데 그 역시 항일운동을 하다가 왜놈의 감옥에서 하도 심하게 고생해서 미쳤지요. 그래서 미친 사람으로 돌아다니다가 죽었지요. 어머니는 뒷날 중이 되었습니다.(혁명가들의 항일회상, 50쪽)
김사건은 재동국민학교를 다녔다. 정신이상자인 작은아버지가 학교에 자주 나타났다. 어린 조카는 창피하여 외면했다. 한참 뒤에 알았다. 자신의 얼굴이 아버지를 빼닮아 형님이 생각나면 조카 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또한, 작은아버지는 피리를 불며 북촌 일대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문으로 저렇게 됐다며 동전을 던져 주었다. 사건은 어린 소견에 무섭고 창피한 것만 생각하고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김사건의 배화여고 동기인 여난구의 동생인 여연구, 몽양 여운형의 둘째 딸은 1991년 11월 25일, 45년 만에 서울을 방문하였다. 이때 김일성이 여운형의 묘소부터 참배하라고 하였으나, 여연구가 공적인 일로 서울에 가는 사적인 참배할 경황이 없다고 하자, 김일성이 여운형의 묘소를 참배하지 않으면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예의도 없다고 욕할 것이라면서 무조건 가라고 강권했다고 한다.
이때 김사건은 호텔 앞에서 기다리며 여연구와 만나고자 하였으나, 옆에 있던 친구가 배앓이로 화장실에 함께 갔다 와서 보니 이미 여연구 일행은 지나가고 말았다. 그때 전언은 작은아버지 김사민은 6.25전쟁 중 북한에서 모셔가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사건은 해방공간에 여운형 선생을 뵈었다. 그때마다 몽양은 고맙고 대견하다고 말씀했다. 김사국 박원희의 핏덩이 혈육 한점이 성가를 이루어 산다며 칭찬하였다. 6.25 전쟁 당시 아버지 절친인 이영(李英)은 북한에 가면 김일성대학에 공부할 수 있다며 설득하였으나, 사건은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서울파 공산주의그룹은 1923년 2월 고려공산동맹 창립을 위한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김사국·김영만(애족장,국내항일,2009)·이영·임봉순·장채극(애족장,3.1운동,1993)·김유인(애족장,국내항일,2005)·강택진(애국장,임시정부,2005) 등 17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였다. 김사국을 대표(책임비서)로 선임하여 블라디보스톡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원동부에 파견하였다. 처음 때는 공산주의운동 사나운 장수였다. 김사국은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었다가 1923년 3월 용정에 동양학원, 영고탑에 대동학원을 설립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재차 러시아로 망명해 조선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항일무장투쟁을 하다 폐병이 악화, 귀국하여 1924년 5월 통일적 당 건설을 위해 ‘13인회’를 주도하였다. 12월 사회주의자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주의운동의 양대 산맥이 형성되었다. 서울파의 지도자로서 화요회(맑스가 태어난 1818년 5월 5일이 화요일이기에 명명, 홍명희·홍증식·조봉암·윤덕병·김재봉(애국장,국내항일,2005)·박일병(애국장,국내항일,2007)·조동호(독립장,국내항일,2005)·김찬·박헌영·김단야(독립장,국내항일,2005)·임원근(애국장,국내항일,1993) 등)와 대립했다. 1924년 12월 6일에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1925년 4월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고려공산동맹 대회가 개최되었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활발히 활동하는 등 선두에서 조선공산당과 대립하는 파벌투쟁을 전개하였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그때 신문기사 내용: 김재봉·김두전(약수)·유진희(애족장,국내항일,1992)·권오설(독립장,국내항일,2005)·김상두·진병기(애족장,국내항일,2005)·주종건(건국포장,국내항일,2007)·윤덕병·송봉우·독고전·홍덕유(애국장,국내항일,2020)·조봉암·김찬·조동우(호) 등은 재작년 사월 십칠일 오후 한 시 경에 시내 황금정 아서원이란 중국요리점에 모여 조선을 일본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조선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조선공산당>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야...)이 탄생될 때 김사국의 서울파는 배제되었다. 김사국은 만주와 러시아 그리고 동경을 오가며 조선공산주의운동 일통을 위하여 애썼던 피 끓는 주의자였다.
1926년 5월 8일 서울청년회 회관에서 폐병으로 사망했다. 김철수는 화요회와 서울파의 40여 단체가 연합하여 사회단체합동연합장례식을 추진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러온 민중은 철저히 차단됐다. 만장이 동대문까지 이어졌다. 1,000여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가운데 수철리(금호동)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40년대 초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두 분의 묘비는 수철리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묘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사국과 박원희 사이에서 태어난 인석(仁石) 김사건(金史建, 1925~2010) 여사의 『인석 김사건 여사 고희기념문집』(문경출판사,1994)을 우체국 택배로 소중하게 받았다. 김사건 여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조카 김영훈 소설가 본인의 작품집 『익명의 섬에 서다』·『장군님의 말씀』 두 권과 함께 정성 담긴 택배로 보내주었다. 김사건 여사의 고희기념문집을 읽고 김사국·박원희 부부 독립운동가에 대한 궁금증이 많이 풀리는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고희문집의 첫 장 ‘나의 인생 나의 시련’ 중 ‘나의 출생’ 내용과 생애 활동을 소개한다.
“나의 아버지 金 思자 國자와 어머니 朴 元원 熙희자의 딸로 서울 종로구 계동 225의 1호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곳은 친가가 아닌 외가댁이었다. 그러나 2살에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살 되던 해 12월 13일에 역시 독립운동을 하셨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고아가 된 후, 나는 외조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얼굴도 알지 못하고, 어머니의 얼굴도 알지 못하고, 외할머님이 사랑 속에서 자라났다. 독립운동을 하시다 부모님도 돌아가셨다는 것도 내가 어느 정도 철이 들어서였다. 내가 지금 아련하게 떠오르는 첫 기억으로는 어느 겨울날 이종사촌 오빠에게 업혀서 어딘가를 갔는데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앞에 어머니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오빠 등에 업혀 돌아올 때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던 생각이다. 후일에 안 일이지만 내가 갔던 곳은 교동에 있는 천도교 강당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1주년 추도식에 참석했던 것이었다. 3살 되던 해 12월 13일에 돌아가셨으니 1년 후인 4살 나던 해 12월 13일이다. 이것이 나의 출생 이력이다.“
이후 김사건 여사는 외할머님의 사랑으로 공부도 잘하면서 씩씩하게 대자유치원 재동보통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육영수 여사와 배화여고 동기였다. 농촌계몽운동으로 농한기를 이용하여 한글 해독을 하게 했다. 새마을운동 및 학교 자모회장 일을 맡으며 청와대 전폭적인 지원으로 받아 학교 앞 다리 건설 및 학교 신관건립과 도서구입 교회봉사 등 지도자로서 역할을 다 했다.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집 문제였다. 1985년 김사건은 소설가 이병주가 발행하는 월간지 《북한》을 읽으며 그 궁금증을 해결했다. 아버지 김사건이 돈 일천이백원을 청년회관 지으라고 써 버렸다. 그 돈은 할머니 안국당 여사가 아들 김사국에게 준 돈이다. 그 돈을 사돈인 박원희 어머니이자 김사건의 외할머니 즉 사돈에게 내놓으라고 떼를 쓴 것이다. 김사건 여사는 친할머니 안국당 여사가 집에 오는 것이 싫었다.
배화여고 졸업 후 조선총독부 집계계에 취직했다. 정신대 문제로 은행 다니는 김상태 씨와 1944년 결혼하여 종로구 원서동에서 신혼생활하다 1945년 대동아전쟁으로 서울 소개령을 겪으며, 남편의 고향인 청양군에 정착했다. 농촌계몽과 학교 및 교회 봉사활동으로 칭송을 많이 받았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한 장한 어머니와 모범적인 지성인이었다. 부모님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 신문을 뒤져가며 발품과 정성을 다하였다. 하나하나 찾아서 기어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을 받는 기틀을 다졌다.

박원희 여성 근우회 강연 사진
여성권익 향상에 힘쓴 독립운동가 박원희는 1898년 3월 10일 대전 유성에서 태어나 1928년 1월 5일 서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이명은 박연희(朴延熙)였다. 학교 다닐 때는 박근희(朴謹熙)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본적은 서울 종로 통의동 28번지이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부설 사범과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의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에 3년간 유학하였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인 김사국이 주도한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에 참여하였다. 1923년 김사국이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4년 5월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를 서울에서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어 1925년 초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여성단체인 ‘경성여자청년회’를 주도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이를 이끌었다. 동회는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말에는 화요회계 여성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과 함께 통합적 사회주의 단체인 중앙여자청년동맹을 탄생시켰다. 이는 근우회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총회에 참여하여 근우회 활동 청사진이 될 8개 항을 결의하여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당시의 여성운동가 40명이 발기인이 되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를 조직할 때 21명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다. 이후 1927년 5월 27일 YMCA 강당에서 회원 150명, 방청인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21명)으로 선출된 선생은 근우회 집행위원회 교양부원으로 활동했다. 교양부 활동의 핵심은 여성들의 교양을 위한 강연 활동과 계몽운동이었다. 특히, 1927년 10월‘특수환경에 처한 조선여성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강연에서 일제의 경제 침탈과 조선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던 중 일본 경찰에 의해 중지당하고 경찰서에 연행되는 고초를 겪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원희 선생은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신간회 본부의 정기대회 준비 활동, 신간회 경성지회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이 여성의식 향상과 민중계몽에 힘쓰던 중 그는 병을 얻어 30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그의 장례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남편인 김사국은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경기여고 개교 100년 기념식 최은희 기자 아들과 더불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사국과 여성권익 사회운동의 독립운동가 박원희 외손자인 김영열 선생과 전화로, 외조부모님의 삶과 그 따님인 어머니 김사건 여사의 외조부모님 기개를 닮아 맵고 짠 삶을 극복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 김사건 여사의 두 분에 대한 서훈 추서를 위한 노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 분의 초장지는 수철리(금호동)공동묘지였다. 해방 이전 망우리공동묘지 어머니 안국당 묘지 입구 왼쪽 위로 이장했다. 2002년 10월 28일 대전 국립대전현충원(애국지사 2-1012)으로 이장하여 안장됐다. 후손들은 서훈받기 전 사회주의운동 전력으로 숨죽이는 연좌제 그늘에 수많은 나날을 고뇌와 아픔을 겪었다.
또한, 망우리공원 안국당 묘지 앞에 며느리 박원희 묘비는 서 있고, 아들 김사국 묘비는 그 아내 묘비 앞에 묻히게 된 사연을 알게 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날 포그레인 작업하며 김사국 선생의 묘비는 손상을 입어 땅에 묻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아들과 며느리 나라 사랑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 어머니 안국당 묘지 왼쪽에 세우고 묻었다.

경기여고 개교 100년 기념식장
김사국 박원희 외조부모님에 대한 ‘학술 논문’을 포함된 어머니 인전 김사건 여사 회혼기념 문집 『노을에 기대어 건져올린 세월』(문성사,2005)을 큰아들인 김영렬 선생님이 우편택배로 보내줬다. 중랑구청에서 후손들의 모임이나 자료 요청이 오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말씀을 나눴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 통합적 여성단체인 근우회 창립을 주도하고 민족차별에 맞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박원희·김영순(애족장,국내항일,1990)·조복금(대통령표창,3.1운동,2019) 선생을 ‘2022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근우회는 1927년 5월에 신간회 자매단체로서 민족계와 종교계, 사회주의계의 여성을 통합하여 ‘한국 여성의 단결, 지위 향상 및 항일운동’을 위해 조직된 단체로 국내외 60여 개 지부가 설치되었고 일제 탄압에도 각종 강연회나 토론회 등을 통해 여성 계몽 활동, 여학생 주도 시위 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2022년 3월 중랑구청 망우리공원과에서 김사국 묘비를 어머니 안국당 묘지 오른쪽에 세웠다. 그런데 이장할 때 묘비 깨진 상단이 없는 채로 작업을 하였다. 김사국 외손주인 김영열 선생과 통화하여 다시 확인하였다. 김영열 선생은 만약 지금의 망우역사문화공원이라면 어머니를 설득하여 대전현충원에 모시지 않고 이곳에 그대로 모셨으리라 아쉬워하였다. 2022년 5월 8일 김사국 외할아버지 96주기 기일과 박원희 외할머니의 ‘2022년 5월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맞아 망우역사문화공원 옛 묘지 터를 둘러보았다.
김사건 여사의 큰아들 김영렬 선생님은 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정년퇴직하였다. 청년시절 청양군 단오날 씨름대회에 우승하여 황소를 탈 정도로 힘이 타고났다. 학사장교로 근무하였다. 안국당 여사의 묘지를 다시 사설 관리인에게 맡겼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 길 삼거리 인물가벽 앞에서 구청장 후보인 현 류경기 구청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묘역 관리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이윤옥 시인 김윤숙 김영숙
2025년 8월 5일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20년대 사회주의 항일투쟁 넘버원 김사국 박원희 부부 그의 동생 김사민 그리고 외손주와 소통 통화
이윤옥 시인과 망우역사문화공원 항일투쟁 인물 중에 미서훈 분들의 자료를 찾아 서훈 신청 여부를 묻는 사이다.
8월에도 ‘정용식 김명신 변성옥 세 분은 서훈을 신청해도 될 듯 싶다.’는 의견이다.
그리고 후손이 보훈부에 신청하면 6개월 안에 서훈 여부를 판단하여 연락을 받을 수 있다.
후손이 아닌 분이나 단체 등에서 신청하면 2~3년 뒤에나 심사를 이뤄질 정도로 신청자 많다는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심사 인원을 늘리거나 서훈 조건을 완하하여 가정과 가족을 외면하고 핍박받은 현실 속에 삶을 꾸린 후손들의 피눈물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고향인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영산 김씨 일강 김철 임시정부 국무위원 항일투쟁 독립장 서훈받은 분의 집안 후손이
소설 김철을 썼다.
내용은 아직 보지 않았으나
이번에 <일강김철선생추모회>를 만들며 개설한 단톡에
만석군의 집안 재산을 항일투쟁에 써버려 후손들의 경제적 어려움
일경과 밀정의 눈과 총과 칼 등에 핍박받은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대통령 8.15해방 축사에서 3.1혁명이라 말을 하고
'범도' 작가 방현석 교수가 독립전쟁 3대 역사 용어 바로잡기 청원운동에 동참해주세요!
핸드폰 단톡에 돌리고 있다.
안중근 의사를 '안중근 장군' 또는 '안중근 참모중장'
독립운동을 '독립전쟁' 또는 '항일투쟁' '항일무장투쟁'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대를 '독립전쟁기' '항일투쟁 시대' '항일무장투쟁 시대’
김사국(애족장,국내항일,2002) 박원희(애족장,국내항일,2000) 항일무장투쟁가의 외손주로
중교장 정년퇴직한 김영열 선생님과 통화를 하였다.
이윤옥 시인한테 핸드폰 전화번호를 알려주기 위해 허락을 받으려는 이유라 말씀을 드렸다.
통화 중에 새로운 사실 좀더 구체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사민(애족장,국내항일,2009) 항일무장투쟁가는 전기고문으로 정신이상자로 피리를 불고 북촌의 재동 계동 원서동 거리를 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주며 독립운동하다 저렇게 되었다며 안쓰러워 대접하였다.
6.25전쟁 중 북으로가 나름 대접을 받았다는 전언은
여운형 선생 따님 여연구 남북 여성 협의회 북측 대표로 남쪽에 와 말씀을 했다는 것이다.
김사민 서훈은 후손들이 신청하지 않았는데 보훈처 연락 받고 건국훈장과 증서를 집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님 김사건 여사의 기억으론 어릴 때라 삼촌의 행동에 무섭기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따님은 외가에서 살았는데 친할머니 안국당 여사와 외할머니가 만나면 싸웠는데
그 이유는 김사국 사회주의 항일투쟁하며 당시 천원을 빌며가 사회주의 건물을 사는데 사용하여
그 돈문제로 사돈끼리 관계가 나빠져 친할머니가 외갓집에 오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윤옥 시인 김영숙 화가 정종배 시인
2025년 8월 22일 김사건 여사의 둘째 딸인 김윤숙 씨의 집에서 필자도 포함 흥성한 시간을 보냈다. 그날의 풍정을 시로 엮어봤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독립유공자 집안의 백년 넘은 일제 미싱
20년대 사회주의자 넘버원 김사국 박원희 부부 독립유공자 집안을 이끌어온 한 세기의 재봉틀
1920년대 사회주의 상징적 인물 해광 김사국
여권신장의 선구자 박원희 부부 독립유공자
엄마를 닮은 둘째 윤숙과 할머니를 닮은 넷째 영숙 두 손녀와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그분들의 치열한 삶을 시로 노래하는 이윤옥 시인과
오늘 하루, 파주시 금촌 사는
둘째 손녀 윤숙이와 신학대학 cc인 양상규 퇴임목사 집에서
펄펄 끓는 가마솥 시간을 함께 했다
1922년 동경에서 귀국하며 사온 일제 재봉틀
주의자 넘버원 남편과
서대문감옥 간수의 칼을 빼앗아 머리통을 찍어버려
고문당해 정신이상자로 배회하는 시동생 김사민
두 동지인 남편의 활동과 시동생의 옥바라지와
외동딸 25년생 '사건'이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으려 서울에서 결혼 후
청양 벽촌 시댁으로 내려가
2남 4녀와 조카를 기르는데
일등공신
백년 넘은 일제 미싱
손녀들이 돌리는 손바퀴 소리가
할머니와 어머니의 재봉질 되새기는 손길로
한 가정의 피눈물이 백년을 뛰어넘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박음질하는
대한독립 만세 만세 여성 만세 소리가
열대야를 이어가는 매미소리 자장가로 뜨겁다
할머니는 여권신장 강연과
구호를 외치며 갓난아기 들쳐업고
밤새 돌린 재봉틀 손바퀴
어머니는 청양 산골 가난을 구하고
친가 외가 연좌제로
자식 조카 큰공부했지만
작가와 교직과 성직자로 버티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항일투쟁 및 항일무장투쟁가의 유품 중
지금도 쓸 수 있어 살아있는 재봉틀
독립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와
전국적 투어와 홍보가 이뤄지길 바란다
할머니 훈장과 훈장증 아래 두 손녀들
주의자의 아내와 그 딸이 대식구 건사로
고생한 가정의 버팀목인 재봉틀
손바퀴 손잡이를 꺼내 닦고 닦는다(끝)

김사건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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