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명가 사회주의 항일투쟁 독립유공자
오기만(吳基萬, 1905~1937.8.23.) 88주기

오기만의 주요활동은 1928년 신간회 백천지회 준비위원으로 격문 배포, 1929년 상해 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참여,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 조직, 1930년 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 활동, 1932년 귀국후 진남포에서 조선공산당 재건활동 전개하였다.
오기만은 1905년 8월 21일 황해도 연백군 배천에서 태어나 1937년 8월 23일 순국하였다. 이명으로 오기만(吳基滿), 윤철(尹哲, 尹喆), 윤광제(尹廣濟), 윤창선(尹昌善), 박태성(朴泰成), 주인국(朱仁國) 등을 썼다.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제2학년을 수료한 후 면학을 목적으로 수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민족 운동가들과 교유하였다.
1919년 배천 만세시위 당시 고향 배천에서 동료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연안헌병대에 잡혀갔다가 해주감옥으로 이송되어 옥고를 겪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서울에 올라와 사립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을 수료하고 학업을 위해 중국을 여러 차례 왕래하였다. 1928년 세 번째 중국행 당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구연흠(具然欽)·조봉암(曺奉岩) 등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16일 황해도 배천의 배천예배당에서 열린 신간회 배천지회 창립대회 준비위원으로 대회 당일 항일 격문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이때 창립대회 준비위원들은 신간회 백천지회 창립 3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할 것을 계획하며 개회사, 회록낭독현황보고, 연극 등도 준비하였다. 이로 인해 연백경찰서에 붙잡혀 10여 일의 조사 끝에 동지 4명과 함께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해주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다.

이후 1929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에 가입하였다. 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는 1920년대 중반 좌우 독립운동 노선을 통합하자는 취지하에 민족협동전선론이 대두된 여파로 1926년 5월 독립운동촉성회가 성립된 후 이듬해인 1927년 4월 조직된 것이었다. 같은 해 5월 의열단(義烈團)에서 발표한 독립당촉성운동선언에는 새롭고 완전한 진로를 도모하는 시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곧 독립운동의 통일과 통일적 당조직운동, 대독립당촉성운동이라는 내용이었다. 1929년 10월 26일 상해촉성회 해체가 결의되었고 유일당운동도 결렬되었으나 좌익진영에서는 동일한 목적을 표방하는 유호(留滬)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성립하였다. 이때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원으로 활동하며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 교민들을 대상으로 항일 격문을 반포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1930년 2월 무렵에는 청년반제(靑年反帝) 상해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청년반제 상해한인청년동맹은 조직 계통 상 중국공산당 민족위원회 산하에 있었다. 1930년대 초중반 무렵 항일의 기치 하에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 규약에 따라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하여 중국공산당 반제운동 계열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30년대 초반 무렵, 중국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김단야(金丹冶)가 코민테른의 재정지원을 받아 국내에 혁명적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조국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할 때 함께 협력하였다. 이때 1932년 국내로 귀국해 김형선(金炯善)과 협력하여 지하 공작을 펼쳤다. 공산주의 운동 격문을 국내 각 도시 노동자에 배부하는 등 동지 규합에 앞장섰다. 또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진남포상공학교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한편 평양에서는 면옥노동자 총파업을 일으켰다.
지하공작 중 김형선이 붙잡히자 평양을 탈출한 후 북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피신하였으나, 1934년 4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로 압송된 후 5월 6일 인천을 거쳐 경기도 경찰부에 수용되었다. 이어 그 해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옥중에서 중병이 발병하여 1936년 6월 11일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풀려난 후 동생 오기영의 집에서 요양하다가 이듬해인 1937년 8월 2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오기만 가족묘지는 국가등록문화재 제691-4호로 지정되었다. 묘지번호 204390이다.
형님 오기만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그리워하는 애끊는 마음이 녹아 있는 『사슬이 풀린 뒤』(오기영, 1948,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2 복간)의 지은이 오기영은 독립전쟁 시대 동아일보 기자였다. 열 살 나던 해 3.1혁명을 맞아 또래 아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었다가 일제 헌병 분견대에 잡혀가 모지락스런 족대기질을 당하였던 오기영은 1937년 도산 안창호 등과 같이 ‘동우회 사건’에 얽혀들어 괴로움 당한 항일투쟁가이다.
아버지 오세형과 형님 오기만 그리고 아우 오기옥 등 4부자가 모두 항일투쟁에 몸 바쳤던 집안이다. 첫 부인인 치과의사 김명복은 시아주버니 오기만 독립운동 밑돈 몰잇구럭이었다. 매제 강기보는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 평남 채잡이로 기운차게 움직이다가 왜경한테 붙잡혀 징역 2년 살고 1933년 만기 출옥했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2년 만에 순국했다.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더구나 몇몇 학교에서 임시교재로 썼다.”는 『사슬이 풀린 뒤』였다. 이 책은 일제 식민권력에 앙버티었던 식구들에 대한 이야기로 짜여 있다. 오기영이 책을 쓰게 된 까닭이다. “꿈이 아닌 현실로서 몸에 얽혔던 사슬이 풀리니 역사발전에 대한 강철 같은 믿음을 굽힐 수 없어 목숨조차 수월히 여긴” 선형(오기만)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3.1혁명 때부터 광복될 때까지 한 가정의 4부자와 사위까지 민족해방운동전선에 투신하여 고생한 사실을 기록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몇몇 학교에서는 임시교재를 쓴 동생 오기영의 자서전이다.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피와 눈물과 뼈와 살의 기록 『사슬이 풀린 뒤』 이승만 정권이 성립되고 닷새 뒤 1948년 8월 20일 머리말에 삼년 전 해방의 감격은 벌써 하나의 묵은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렇게도 기쁘더니, 그렇게도 감격스러웠더니, 이제 우리의 가슴속에는 이 기쁨과 감격 대신에 새로운 슬픔과 환멸이 자리를 바꾸어 들어찼다.
이제야 제2의 해방이 있어야 할 것은 누구나 아는 바요,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도 누구나 초초하다. 삼 년 전의 해방을 정말 해방으로 알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엮은 이 책을 읽을 때에 누구나 달라진 세월에 부대끼며 다시금 슬픔을 아니 느낄 수 없이 되었다.
무엇이 달라진 세월인가? 똑바로 따지면 다르기는, 1945년 8.15 이후 잠깐일 것이다. 도로아미타불이라면 심한 말일까?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 먹이고 하던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러한 권리가 있는 세상이다. 스스로 ‘자유주의자’ 임을 내대며 해방 뒤에도 중도주의를 내세우며 정치 논설을 많이 나타내 보이던 오기영은 친일세력에 바탕을 둔 이승만정권 밑에서 괴로워하며 친일경찰이 그대로 제 권리를 행사하는 세상 된 것을 보고 도로아미타불이요 제2의 해방이 필요하다 외치다가 1949년 초 평양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오기만의 가족묘지 오기영의 책
1945년 8.15해방 다음날 오기영은 망우리공동묘지 가족묘지를 찾아갔다. 무덤 위에 태극기를 덮어놓고 그 앞에 서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곳에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형님 오기만 그리고 시숙의 후원자이자 그의 아내인 김명복이 안장되어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조문하는 이들도 죽음의 상처로 얼룩진 소유자들이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하다 수감 중에 해방과 더불어 서대문감옥에서 놓여나온 동생 오기옥과 조카 오장석 그리고 사회주의운동으로 수감 된 적이 있는 여동생 오탐열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병으로 친정오빠를 잃은 오기옥의 부인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폐결핵을 사망한 남편을 둔 누님이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오기영은 소리쳤다. 이제부터는 노예의 무덤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의 탄성이면서 심장에서부터 울려나온 통곡이었다. 그 가족의 수난사 가족사이면서 민족사 민족사이면서 대서사시이다. 가족(9명)들의 독립운동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친 오세형 고향 배천의 3.1혁명 주동자로 투옥. 모친 6인의 자녀들이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는 역사를 온몸을 감당. 본인 오기만 신간회 사회주의운동과 상해 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5년형을 받고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병사(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동생 오기영 3.1혁명으로 투옥(11세), 사상범으로 투옥, 수양동우회 등 총 4회 투옥. 동생: 오기옥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 중 해방을 맞아 석방. 제수 치과의사 김명복 오기만의 동지로 시숙 오기만의 독립운동 자금 조달원으로, 여섯째 아이를 낳던 중 간독으로 병사. 누이 오탐열 사회주의운동으로 수감. 매제 강기보는 오탐열의 남편,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의 평북 도책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순국(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조카 오장석 조카 사회주의운동으로 수감.
독락정 정자에서 구리둘레길 제1길을 타고 올라 면목동 양지말마을치성터를 지나 망우산 주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자락 밑 사색의 길 위 죽산 조봉암 선생 묘역이 끝나는 지점의 의자를 지나 오른쪽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오세형 일가 가족묘지 납골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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