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망우인문학

육군 준장·대령 이량·이양(李亮, 1896~1955)- 카프 결성 100년을 맞이하며, <꺼비딴 리> 한 분을 소개합니다

정종배 2025. 9. 8. 08:28

육군 준장·대령 이량·이양(李亮, 1896~1955)

- 카프 결성 100년을 맞이하며, <꺼비딴 리> 한 분을 소개합니다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서

어제 오전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한 인물의 30년 공백이 채워졌다. 또랑시인 아마추어 인문학자 가슴이 벅차올라 뛰고 있다. 오늘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량은 1917년 와세다대학 노문과 3년 수료, 1920년대 시인 소설가 카프 동맹원 및 7인의 중앙위원, 1930년대 이후 만주국 육군 중좌, 대한민국 육군 대령 순직, 준장의 묘비로 망우리에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봉안 등으로 이력을 요약할 수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한 인물을 통해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밝힐 수 있어, 온 밤 지새 눈은 감기지만 마음은 더 깊이 확실한 근거를 찾으려 들떠 있다.

어제 하루 페이스북 댓글도 달지 못했다. 이윤옥 시인이 요구한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미서훈자 인적 사항도 보내지 못했다.

 

<은평뉴타운 도서관>에서 일주일 전에 책을 빌린 이유는, 오는 8월 26일 화요일 일본 지바현 야오치시 고진 관음사 보화종루 개보수 준공식에 참석하며, 준비하는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1923년 9월 1일 이후 10여일 동안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의 참혹한 상황을 목격한 유학생 특히 작가들은 대부분 살아서 돌아왔다.

교과서에 수록하는 시인 김소월 이상화(애족장,문화운동,1990) 김동환(친일,문학) 김영랑(건국포장,국내항일,2018) 박용철 이육사(애국장,의열투쟁,1990) 윤동주(독립장,학생운동,1990) 등의 항일저항시의 바탕은 관동대학살 제노사이드와 직간접 관련있다라고 주장한다.

 

소설가 이기영 채만식 한설야 장지락 등과 극작가 유치진 등도 현장의 목격자이다,

김응교 교수는 관동대학살은 한국문학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폭제라고 주장한다. 1922년 결성된 염군사와 1924년 10월 결성된 파스큘라 동인들이 주축이 되어, 1925년 8월에 카프가 결성된 결정적 계기라는 것이다.

2013 이장하기 전 묘비

 

“이양(량)은 1896년 12월 9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191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노문과(露文科) 3년 수료했다.

대령 이양(군번 : 13180 / 보병)

-생년월일 : 1895.12.06.

- 입대일자 : 1949.03.29.

- 전사일자 : 1955.12.17

- 출신 : 육사8기(3차)

- 소속 : 노무관리단

- 전사망주소 : 서울 중구 수표동91-3

- 유가족 : 조선녀(처)

 

1949년 2월 24일부터 1949년 3월 22일까지 교육 기간인 육사8기 3차 병과 보병으로 1949년 3월 29일 임관했다. 군번은 13180, 키는 188cm, 몸무게는 78Kg, 혈액형은 O형, 종교는 기독교였다. 임관근거는 국특 23호였다. 대위 진급은 1949년 5월 1일, 소령은 7월 15일, 중령은 1949년 8월 15일 진급하였다. 6.25한국전쟁 중인 1951년 3월 1일 대령으로 진급하여 부산 노무관리단 단장으로 복무하다. 1955년 12월 17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1955년 12월 19일 망우리공원 소오 설의식 가족묘지 뒤 망우산 제2보루 가는 능선에 안장됐다. 1955년 1월 10일 충무무공훈장 1985년 4월 10일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2015.1.1. 망우산 해돋이

필자는 2000년부터 만해 한용운 시인의 묘역을 거쳐 설태희 가족묘지 뒤 능선에서 새해 아침 해돋이 맞이한다. 그 능선에 육군 준장 이양의 묘지가 있었다. 묘역도 좁고 묘비도 작았다. 왜 장성 묘역이 현충원에 있지 않고, 망우리에 있는지 궁금하여 여기저기 뒤적여도 자료를 찾지 못했다.

2013년 봄이 지나자 묘역이 사라졌다. 2020년 3월 31일 국립현충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량’이 아닌 ‘이양’으로 바꿔 성명을 쳤다. 2013년 6월 2일 망우리에서 파묘하여, 6월 3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02실 088호에 안장됐다. 대상 육군, 사망일자 1955. 12. 17. 사망장소 부산. 본적은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 14번지, 유가족인 부인 조순녀의 주소는 서울 중구 수표동 91-3번지였다.

- 『망우리공원 인물열전』(정종배, 지노, 2021. 10.)

 

1926년 12월 24일 카프 임시총회

 

김태준는 『조선소설 발달사』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일을 1925년 8월 23일로, 해체일은 1935년 5월 21로 기록하고 있다.

경종경고비京鐘警高秘 제3426호의 1

다이쇼大正 14년 8월 24일

경성 종로경찰서장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검사정 전殿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발기회의 건

 

그저께 22일 오후 5시 30분부터 부내 관수동 160번지 이인李仁(독립장,문화운동,1963) 변호사 집에서 모여 제목(首題)의 회를 개최했는데 참석자 12명으로써 다음(左記) 사항을 결의하고 동 7시에 아무런 혐의점 없이 산회했다.

 

이에 따라 보고(통보)합니다

 

간사: 박영희, 이호

 

발기인명

박영희(친일,문학), 이성해(이익상,친일,언론), 심대섭(전 『동아일보』 기자,심훈,대통령표창,학생운동,1999), 이호(북풍회, 염군사), 송영(염군사), 김온(경성청년회), 이적효(염군사, 애족장,국내항일,2007), 김영팔(도쿄 형설회), 박용대(경성청년회), 안석주(친일,영화), 김기진(조선문단朝鮮文壇,친일,문학)

 

카프가 본격적으로 제재를 정비하고 조직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창립 1년 뒤인 1926년 12월 24일 임시총회 때부터였다. 당시 카프 임시총회를 저널리즘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동맹원

이기영, 김영팔, 이량李亮, 조명희(애국장,노령방면,2019), 홍기문, 김경태, 임정재, 양명(애족장,중국방면,2007), 이호, 김온, 박용대, 권구현, 이적효, 김기진, 이상화, 김복진(애국장,국내항일,1993), 최학송, 최승일(친일,영화), 김려수(박팔양), 박영희, 김동환, 안석주

 

위원

김복진, 김기진, 이량, 박영희, 김경태, 최승일, 안석주

 

위 7인의 중앙위원 중 김복진, 김기진, 박영희, 안석주 등 4명이 파스큘라 출신이다. 최승일은 염군사, 김경태, 이량은 사회주의 활동가였다.

 

묘비 뒷면 해독이 필요함

1926년 2월 경성청년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사무소는 재동 84번지였다, 책임사원을 아래와 같다.

 

서무부: 송봉우 박해성 김유선 김평주

편집부: 이민한 이적효(애족장,국내항일,2007) 최승일 이량

사업부: 김평산 이규송 신주극(애족장,국내항일,2010) 오대근 삼도

선전부: 김❉ 이호 박용대 강아근냐

이량은 1920년대 중후반 사회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흥미로운 인물이다. 《매일신보》 1927년 8월 31일자 기사(「적화赤化된 청년 2명을 인치引致-리량과 소진형 두 명을 종로서鐘路署에서 잡아 취조」)에,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사회주의자 중진 이량을 검거·취조하는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연전 쏘베트 로서아에서 돌아온 주의자로 전 정우회正友會의 위원으로 있던 청년인데 얼마 전 동서(종로경찰서)에 한 번 검거되었었으나 일단 석방되었다가 이번에 또다시 검거된 것이라 하며, 그 내용은 빈민구제회를 중심으로 주의 사상의 선전과 기타 여러 가지 혐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사로 미루어 보아 이량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체류하며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감옥에 투옥되는 일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험을 담고 있는 소설이 「올야비시모」(《현대평론》, 제1권 제6호, 1927. 7.) 이다.

이 소설 속 창수의 이력이 이량의 실제 경력과 얼마나 합치하는가는 불분명하지만, 소련에 체류했던 사실과 그 인식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실제로 이량은 「우리가 외국에서 보고 가장 경탄한 것=새 조선 사람의 본밧고 십흔 일들=, 러시아는 특징 만흔 나라」(《별건곤》 7호, 1927. 7.)를 통해서 자신이 경험한 소련의 이모저모를 전하고 있다.

 

경성부 당국은 동대문 밖 오간수교 동편 개천 언덕길에 있던 빈민굴을 철거하려고 하였는데, ”진정단을 데리고 온 경성자유노동자조합의 조합장 이량 씨는 말하되 ‘이 사람들은 달리 갈 곳이 아모데도 없습니다. 집은 헐고 떠나가라 하면 모두 다 같이 경찰서에 구금이 되드라도 한사하고 떠나지 않겠다 합니다. 어떻게 곧 떠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더라

「”우리들의 진정은 철거기한의 연장, 당장 지금 헐어갈 수는 업소“ - 자유노동조합장 이량 씨 담談」《중외일보》 1927. 6. 25.

 

이량은 이즈음 정우회 집행위원, 경성청년회 임원, 경성자유노동자조합장, 빈민구제회 위원장 등을 맡아 정력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였다.

「순녕청년회 사상강연 개최」, 《시대일보》 1926. 1. 6. ”함남 영흥군 순녕청년회에서 경성청년회 이량 씨의 래영을 기회로 제1회 사상대강연회를 지난달 21일 오후 7시 순녕면 사립 창송학교 내에서 개최한 바 청중이 무려 수백 명에 달하야 자못 대성황을 일우었는데 연제와 연사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농촌에서 얻은 사상’, 이량“

 

한편으로 카프 동맹원이자 중앙위원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 중에도 「올야비시모」 비롯하여 소설 「와우리」(《신민》 제49호, 1929.5.)와 시 「이윤利潤」(《시대일보》 1926. 6. 20.)와 평론 「신흥예술에 대하야」(《문예운동》 제3호, 1927.1.) 등을 발표했다.

또한, 「문예시장론에 대한 편언」(《개벽》 69호, 1926. 5.)은 잡지 《가면》 1926년 3월호에 염상섭이 게재한 프로문단의 계급문예운동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는 비평문이다.

이량이 인용한 ‘문예시장이 성금배들이 뿔조아화하지나 말아주기를 바란다’는 염상섭의 말은 당시 ‘가펼우남’이라는 문예시장을 열었던 이량에 대한 비아냥이었다. ‘가펼우남’이란 무엇인가?

 

러시아에서 문예를 연구하고 돌아온 이량 씨가 책임을 지고 프로문사들의 작품을 일반 무명작가들에게 소개, 윤독 또는 판매할 목적으로 시내 공평동 십번지에 ‘가펼우남나라’라는 원고 시장을 신설하였다는데, 원고가 들어오는 대로 종로 네거리 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판매한다는 바 ‘가펼우남’이라는 뜻은 ‘뿌-늰, 알렉세이’ 등 러시아 작가들이 모여서 논담하고 또는 웃고 토론하던 집 이름이더라

염상섭, 「원고 시장 - ”싸구려! 원고가 싸구려」, 《조선일보》 1926. 1. 18. 염상섭의 글

 

이량은 “‘가펼우남’이라는 문예시장의 형식을 비러서 유무명 무산 작가의 원고를 교환하여 선전하며 논전을 열어서 참된 계급문화를 차저내자자느 것이 문예시장이 생긴 본의요, ‘가펼우남’”의 목적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량, 「문예시장론에 대한 편언」(《개벽》 69호, 1926. 5. 116쪽

하지만 이량의 제안은 소수의 작가들과 관계자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물물교환에 불과한 것이어서 프로문학의 대중화와는 무관한 시도였다.

1930년대까지 식민지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이량이 어느 순간 조선 출신의 유일한 만주국 군인 중좌가 되어 신문지상에 나타난다. 「사소한 감정을 떠나 대국에 착안하라」(《매일신보》, 1934. 9. 12.)라는 인터뷰에서 일본이 만주에서 기도하는 시도가 일본·중국·조선이라는 경계를 넘어 동양의 대평화를 이루는 사업이며 일본의 큰 사업이 안정되면 조선문제와 복리도 해결될 것이라는 1930년대의 친일적 동양론의 논법으로 발화하고 있다. 그는 또한 조선총독부가 만주로의 강력한 이민 계획을 세울 것을 주장하고 있다. 1920년대 사회운동을 하던 이량과 만주국의 조선인 중좌 이량은 같은 사람일까? 새로 재발간된 《개벽》지의 한 기사는 “만주국 육군 중좌 이량 씨는 귀경 중 조선호텔에서 체류하였다. 전날 000노동조합 숙소에서 유숙하던 일을 생각하면 씨도 감개무량할 듯”하다고 적고 있다 「백인백화」, 《개벽》 신간 제1호, 1934년 11월호

정우회와 경성청년회, 빈민구제회 활동 등 계급운동을 하던 시절 노동합숙소를 전전하던 이량을 염두에 둔 당대의 기사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두 사람이 동일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이상은 와이비 아카이브 006, 『카프를 넘어서』 사회주의와 식민지 조선문학(정종현 지음, 역사비평사, 2025, 6. 30.)을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김팔봉이 동아일보 1929년 12월 27일자 「1년간창작계 1」라는 제목으로

“그러면 기성문단의 작가와 신흥 프롤레타리아적 작가의 1년간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보자 대개 금년 1년간의 발표된 작품을 일별하면

『조선지광』 사자생(이종명) 흑해의 밤(이량) 우리들의 사랑(송영) 곱창칼(김영팔) 鍾이(최송일) 그들의 남매(이기영) (이상 1월호) 다섯해동안조각편지(송영) 미로(전묵암) 산汽笛(이량) 월희(이기영,承前物)(이상 2월호) 燃戀(이량)(8월호) 등으로 이량은 세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량은 세 편이 단편을 발표할 정도로 활발한 창작에 집중했다.

『신소설』 가튼 길을 밟는 사람들(서해) 『동아일보』 그와 감방(라일) 『조선일보』 먼동이 틀 때(서해) 등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피아의 단편소설이 작자 50여 명에 80여 편을 발표했다.

필자가 망우역사문화공원의 서해의 묘지 관리인으로 등록된 서해 최학송도 왕성하게 소설을 발표하였다.

관동대학살 참상을 목격한 이기영 한설야 라일(정우홍) 등도 소설을 발표하였다.

「그와 감방」을 발표한 ‘라일’은 본명이 ‘정우홍’으로 신석정 시인의 쌍둥이 사촌누나 남편이다. 그와 감방의 소설은 관동대학살 때 일본 현지 감방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또한 파스큘라 카프의 동인인 성해 이익상도 정우홍의 아래 동서이다.

 

동아일보 1929년 12월 27일

1930년대 일제가 독립전쟁 기간에 본격적으로 밀정을 통해 대일본제국에 몸맘과 목숨을 바칠 인물을 선정 친일 인사로 변신을 시도했다.

나이가 20년 차이 나는 이량과 박정희 두 인물을 통해 항일무장투쟁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본군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밝히는 글을 인용합니다.

 

“삼천리” 37년 5월호는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란 기사에서 만주국 행정기관 관리와 관동군, 영사부, 경찰, 중앙은행, 법조, 학교, 언론기관에서 활약하는 조선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만주군 육군 중좌 이량(李亮)과 군의(軍醫) 소좌 안익조(安益祚)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전향 공작에 굴복한 사회주의자들은 김명식(金明植), 인정식(印貞植,친일,교육학술), 차재정(車載貞친일,친일단체), 박치우(朴致祐), 서인식(徐寅植) 등이 있다.

 

1940년 2월에 박정희(친일,군)는 만주로 떠났다. 박정희가 선택한 것은 “대일본제국”의 황국 군인의 길이었다. 사범학교에서 제국 체제의 우월성과 식민지 엘리트로서의 자의식을 강요당해 제국 신민으로서의 국가관과 체제 순응적인 인간관을 몸에 익혔다면 이상한 것은 아니다. 군인을 동경했을 것 같은 박정희는 그 꿈을 실현할 찬스를 붙잡았다.

 

4월에 만주국군관학교에 신경 2기생으로 입학했을 때 이미 22세가 된 박정희는 연령적으로 그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적(國籍)”과 결혼 상황도 장애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한 것은 사범학교 시대 은사인 아리카와 케이이치(有川圭一)와 선배 강재호(姜在浩,친일,군))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사범학교 성적은 가까스로 졸업할 정도로 낮았던 박정희였지만, 교련과 체육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관동군으로 복귀한 아리카와 케이이치(有川圭一)와는 친밀한 관계였다고 한다. 또한 그 역할에 대해서 여러 설이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군관학교 입학시험의 시험관(試驗官)을 맡게 된 강재호(姜在浩)가 박정희를 시험장까지 안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박정희는 “모든 조건에 부적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一死以って御奉公朴正熙(결사 봉공 박정희)”라고 쓴 혈서를 종이에 말아 “열렬한 군관 지원의 편지”를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에 보냈다. 편지에서 “일본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정신과 기백으로 결사적인 봉공(奉公)의 굳은 결심”을 밝혔고, “목숨이 있는 한 충성을 다 할 각오”를 밝혔다.

 

당국은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가 보낸 편지에 감격했지만, 이 두 번째 청원을 “정중하게 사절”했다고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 은 “혈서 ▶◁군관 지원-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표제를 붙여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열의가 전달되었는지, 아니면 아리카와(有川)와 강재호(姜在浩)가 힘을 썼기 때문인지 박정희는 그해 10월에 군관학교 시험에 합격했고, 다음 해 2월 만주로 향했다. 이 문제는 박정희의 “친일 경력” 문제로 오늘날까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을 차치(且置)하더라도 출세 지향적이었던 박정희가 군인으로 나아가는 길은 “황국 군인” 일뿐 아니라, 만주국 군관학교장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 중장이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바와 같이, “천황 폐하에게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면에서 그는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다.” 라고 행동한 것이었다.

 

물론 식민지 교육기관에서 규율을 심어주는 식민지 학생으로서의 비애는 원초적인 민족적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민족주의적 저항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선택한 길은 “동아신질서”에 있어서 제국의 정당한 주체로서의 지위를 살려서 황국 군인으로서 그 “은혜”를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사범학교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모티베이션을 발휘해 성적우수자로서 예과를 졸업했다. 41년에는 일본식으로 개명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가 되지만, 다시 다음 해 그 “민족색”을 배제하기 위해 오카모토 마모루(岡本 実)가 된다. 성적우수자에게 부여된 특전은 일본육군사관학교 편입이었다. (“일본육해군총합사전(事典)에는 42년 10월에 본과에 진학했고, 일본 육사에는 유학생으로서 공부했고, 57기에 상당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 사관으로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44년 7월에 화북지방 열하성(熱河省)에 주둔한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하게 된다. 소속 부대의 주된 임무는 8로군의 방어와 토벌이었다. 같은 해 12월 소위에 임관했고, 45년 7월에는 만주국군 중위로 승진하지만, 이미 일본은 항복이 임박한 시기였다. 박정희는 일본의 패전을 바라지도 예측도 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1954년 1월 13일

▶전후, 사형 구형에서 박정희를 구한 만주 인맥 .

 

만주에서 종전을 맞이한 박정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광복군에 합류했고, 다음 해 5월에 귀환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만주로 갔던 조선인으로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도박이었지만, 이 ‘도박’은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만주광(滿洲狂)과 마찬가지, 아니 그 이상으로 “친일파”라는 불명예로 끝났다. 일본 제국의 주체는 해방 후 조선에서는 권력의 주체가 될 리 없었다.

 

이것은 박정희뿐 아니고, 훗날 한국의 권력 중추를 구성한, 만주가 키운 대부분의 제국 군인들의 현실이었다. (정일권, 백선엽, 두 분 친일,군) 만주에서 패전을 맞이한 황국 군인들은 쫓기듯 만주에서 한반도로, 북한에서 남한으로 잠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훈련된 제국 군인을 중용하자, “불명예”로 몰렸던 제국 군인들에게는 한국 국군으로서의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귀국 후 여러 달 고향에서 허송세월하던 박정희는, 1946년 9월에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해,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소위로 군에 복귀했다. 그러나 형 박상희(朴相熙)가 대구에서 발생한 좌익세력의 10월 폭동 과정에서 사망했고, 이것이 박정희에게 커다란 정신적 쇼크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남로당에 가입했고,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투입된 병사가 남로당계 장교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킨 여순사건으로 개시된 숙군(肅軍) 수사 과정에서 48년 11월 11일에 체포된다. 혼미한 정치 정세에 휘말린 것은 박정희도 똑같았고, 게다가 좌익에 가담했던 것은 만주에 인생을 걸었던 것 이상으로 커다란 시련이 되었다.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박정희는 남로당 조직을 털어놓아 군(軍) 수사에 협력한 것이 구명의 결정적인 조건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육사 출신으로 항공사관학교 교장이었던 김정렬(金貞烈,친일,군)이 구명 운동에 나섰고, 만주 인맥인 육군 정보국장 백선엽의 결단으로 한 달 뒤 석방되었다. 49년 2월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과 파면이 언도(言渡)되고, 다시 10년이 감형, 이것도 형집행정지가 되었다. 자신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던 박정희의 탁월한 군사 정보 전문가로서의 능력을 산 백선엽의 배려로 그 후에는 비공식 문관으로서 군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박정희를 다시 군인으로 복귀시켜 준 것이 한국전쟁이다.

 

[출처] 대일본, 만주제국의 유산/ 제국의 귀태(鬼胎)들 - (1)|작성자 필코더

[출처] 대일본, 만주 제국의 유산/ 제국의 사이에서 (4)|작성자 필코더

blog.naver.com此竹彼竹

원제: 대일본. 만주제국의 유산

(大日本, 満州帝国の遺産)

저자: 강상중(姜尙中) 현무암(玄武岩)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47집

 

林翰周(애국장,의병,1990)의 思想과 獨立運動*

 

김 상 기**

 

* 이 연구는 충남대학교 학술연구비에 의해 지원되었음.

** 충남대학교 교수, 박물관장.

 

자료소개 – 「李圭彩(독립장,임시정부,1963) 年譜」 319쪽

 

계유년(癸酉年, 1933)

○ 1월에 홍만호가 와서 모였다. 대대장 오광선( 독립장,만주방면,1962)역시 대사하로 돌아왔다. 조선일보 합이빈 지국장 오철주(吳鐵周)가 대사하로 와서 만나보기를 요청하기에 허락하였다. 그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는데, 그 뜻은 대개 나로 하여금 일본에 귀화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고는 즉시 그에게 “일본이 2,000만원을 빌려주고, 또 동성의 개간권을 주며, 내지의 총독부로부터 500명 이상의 이민을 인준 받아 주면 내가 귀화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오철주가 난색을 표하면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없었던 일로 하자” 하였다. 오철주가 이에 하직하고서 갔다. 그 뒤 며칠 뒤에 오광선으로부터 또 오철주와 김약수(金若水)란 자가 만나보기를 청한다는 전갈이 왔기에 역시 허락하였다. 김약수란 자는 합이빈의 특무기관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학식과 언변은 오철주에 비해 열 배는 더 우수하였으며, 늘어놓는 교묘한 말들은 단지 나를 일본에 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위에서 말한 세 가지의 일이 성사된 뒤에 다시 말하자고 하였다. 김약수가 회보해 줄 기일을 정하고 떠나갔다. 사흘 뒤에 김약수와 오철주가 태평산(太平山)으로 찾아와서는 소매 속에서 세 통의 서신을 꺼내어 주었다. 한 통은 합부의 일본 특무기관장으로 있는 죽목(竹木)이 나에게 보내는 편지로, 완곡한 말로 나에게 귀화하기를 요청하는 편지였다. 또 한 통은 이량(李亮)과 나와 이씨와 신씨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또 한 통은 이씨에게만 보내는 편지였다. 그러나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이에 나 역시 완곡한 말로 거절하였다. 이것은 몸을 빼어 산해관(山海關) 안으로 들어갈 계책을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당시에 이른바 중국 군사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 귀화하였기 때문에 고군약졸(孤軍弱卒)로는 지탱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즉 산해관 안으로 들어가 전체가 탈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완곡한 계책을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