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 못 돌아올지 모른다 새옷 입고 집 나선 천도교인 3.1혁명 민족대표 33인
봉암(浲菴) 나용환(羅龍煥, 1864~1936.8.19.) 89주기

봉암 나용환 사진
나용환은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1864년 8월 7일 평안남도 성천군 숭인면 흥인리에서 태어났다. 소설가 나도향의 원적지이다. 나용환의 본관은 나주, 도호는 봉암이다. 어려서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이후 벼슬길에 나가려고 몇 차례 과거시험을 보기도 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고향에서 훈장 노릇을 하며 지냈다. 나용환은 천도교인이다.
1907년 5월 나용환은 정주순독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 5월에는 도사에 임명되었다. 또 1910년 천도교 중앙총부의 현기사장으로 활동하였고, 1911년에는 공선관장에 임명되었다. 3·1운동 직전까지 그는 중앙총부에 머무르며 교회의 중요정책을 결정하였다. 아울러 그는 성천 등 서북지역의 교인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권동진은 《삼천리》(1935.6.) 기고문에서 "손병희가 천도교의 재정과 행정에 대해서는 오영창, 나용환 두 분을 가장 신임했다"고 썼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나용환이 3.1혁명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된 것은 1919년 2월 26일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이날 오전 돈의동 권동진의 집에서 권동진과 오세창을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과 독립선언서 서명 건에 대해 얘기를 듣게 됐다. 평소 조선의 국권회복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오던 그는 즉석에서 이에 찬성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만세를 외칠 경우 처벌당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기꺼이 이 일에 동참하였다. 이튿날 27일 오후 7시경 재동 김상규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하여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28일에는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열린 최종점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거사 장소가 애초에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된 사실을 알게 됐다.
예정대로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의 아들 경덕의 회고에 따르면, 이날 아침 그는 아내 강숙화에게 '새 옷을 내오라'고 하여 옷을 갈아입은 후 '이번에 내가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 모르니 애들을 잘 건사하고 잘 있으라'는 말을 하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한용운의 식사(式辭)가 끝날 무렵 일경이 들이닥쳐 참석자 전원을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나용환은 3.1거사 준비 초기단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독립선언서 역시 3월 1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 자리에서 처음 보았다. 그는 전적으로 오세창과 권동진의 말을 믿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모였다. 그는 이때 민족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도사로 활약했다. 1930년대에 들어 수년간 병석에 있던 그는 1936년 8월 19일 오후 9시 40분 서울 소격동 자택에서 향년 73세로 타계하였다. 장례는 8월 22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교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묘소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마련됐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6년 5월 18일 정부는 나용환 등 독립운동가 14명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하단 22번에 안장됐다.
1956년 군인묘지로 개설한 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10년 뒤 1965년에야 안장 범위를 확대하여 그 이듬해인 1966년에 들어서 항일투쟁 독립유공자를 안장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장남 경덕은 소파 방정환의 장녀 경화와 결혼하였다. 1933년에 조직된 소녀악극단 '낭랑좌' 소속의 가수 나선교는 그의 딸이다.
3월은 오는데.... 32인의 유가족을 찾어서 완(完)
경향신문 1962.03.02. 기사 (기획/연재)
3월은 오는데... 32인의 유가족을 찾아 완(完)
님들의 「무덤」 너무나 처절
초가 셋방살이의 나경덕씨
다서애들은 이불쓴 채 눕고
망우리 고인묘지 허물어져
3월은 왔다 그리고 3.1절 기념행사도 크게 치르었다. 그동안 당국은 32인 유가족 도움의 운동 기간이라도 앞으로는 이들 유가족들에 대한 항구 대책이 꼭 서야만 하겠다.
그동안 기자는 32인의 유가족을 찾아보았다. 43년이란 오랜 생활이 간 뒷자리에서 모두가 옛 영예를 잃어버린 채 굶주림에 잇닿은 생활들을 하고 있었다.
3.1절을 가장 뜻깊게 맛이하고 가장 감격을 느껴야할 그들일터인데도 아무런 표정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32인의 유족들이었다.
지난날 입으로만 불어대던 경출나팔은 그들의 귀에 불청증의 병세만 남겨주었다.
한번씩 주어본 쌀 한가마와 광목 한통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우리가 못나고 가난해서 밥먹지 못하는 것을 누구에게 원망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손병희 선생의 미망인 주옥경 여사는 아픈 몸을 남의 집 찬방에 누여놓고도 섰다가 그대로 쓰러져도 남한테 구차한 소리를 하기 싫다“고 혀를 짓씹는 것이 아닌가?
기자는 나용환 씨의 장자인 나경덕(45)씨의 집을 찾기 위해 온종일 헤맨 적이 있다.
간 곳마다 통장조차 그의 집을 모르는 데다가 몇 번씩이나 셋방살이를 옮겨갔기 때문에 찾지를 못했다.
마침내 아픈 다리를 끌고 세 번째 찾아간 일곱 식구가 기거하는 초갓집 단칸셋방에는 어린애들만이 문을 잠가놓고 기자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실직자인 나씨는 일거리를 찾아 밖에 나가고 그의 부인은 담석증의 몸으로 이웃엘 가고 – 다섯 애들만이 통이불을 쓰고 그대로 누워 있었으니 그들은 점심을 굶고 있는 것이었다.
거리에서는 경축일색이던 1일 철 아닌 눈이 내리는데 망우리의 32인 묘지도 찾아가 보았다. 한용운 씨를 비롯한 일곱분의 묘가 있었으나 나무쪽 목비가 서 있는 홍병기 씨의 묘나, 묘 앞이 허물어져 내려가 사태가 진 박희도 씨의 묘나, 무덤이란 흔적만이 겨우 남아있는 참혹한 한용운 씨의 묘 등-정말 ”민족대표의 무덤“이라고 부르기에는 낯이 뜨거워질 처절한 잠자리들이었다.
붉은 흙이 모래처럼 허물어져 가는 한용운 씨의 묘에는 발을 디디면 그대로 구두발이 푹푹 빠져들어 갔다.
시체를 묻은 인부들조차 비참해서 못보겠다고 측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록 그들에게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대리석기념비를 세워주지 못하고 높은 작위를 주지는 못할망정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슴마다 ”무엇인가“ 느끼기라도 해야할 것은 아닌지-
그들의 무덤에는 한 개의 돌비와 한 줌의 잔디가 너무나 아쉬워 보였다. 이제 3월은 간다. 가기 전에 어서 구호의 손길을 서둘러야겠다(기基)
사진 上下 ”쓰러질듯한 초가에-부끄럽다“고 문을 잠가놓고 들어오지 못하게하는 나경덕 씨의 셋방 下 허물어져 가는 고인들의 묘소

이승만 정부 1공화국은 1949년 이승만 대통령 이시영 부통령 두 사람만 자가 셀프
최고 등급 '대한민국장' 서훈만 하고
친일 인사들에 둘러싸여 정권 유지 독재정치만 일삼고 항일투쟁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서훈을 외면하였다.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은 빈약한 정권의 정통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1962년도부터 서훈을 이용하였다.
아직도 연해주 원동 간도 만주 중앙아시아 미주 유럽 남미 하와이 등 수많은 항일투쟁 묻힌 분들을 국가보훈부에서 발굴 서훈해야 한다.
멕시코 한인 항일투쟁 인물 장소를 발굴 표지판을 세우는 민족문제연구소 중남미 정갑환 대표의 헌신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변성옥 김명신 정용식 조봉암 나우 허연 이영학 김기만 김찬두 임용하 등도
항일투쟁 활동을 잘 살펴 서훈 문제를 마무리 짓기를 바란다.

태화관의 기생인 주옥경과 손병희 선생과의 러브스토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사동 태화빌딩은 1919년 3월 1일 33인의 독립선언이 선포된 음식점인 태화관이 있던 곳이다. 태화관 자리는 1896년에 이르러 고종은 대한제국으로의 칭제건원을 앞두고 한양의 중심점을 나타내는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을 이곳 주변에 세웠다. 지금도 건물 밖 서울시에서 조성한 소공원에는 홍범도 장군의 표지석도 자리하고 있다.
순화궁 터인 이곳은 매국7적 이완용 형제가 사들였다가 사업가 이종구에게 팔았다. 이종구는 이 자리에서 요식업을 하려고 했는데 동네 건달들이 방해가 많아 단독으로 하기보다는 1903년부터 조선요리 전문점인 명월관(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아일보사 일민미술관) 분점을 열었다. 명월관 대표 안순환(친일, 친일단체 일진회 평의원·대정친목회 이사)에 의뢰해 경영하게 하였다.

동학의 재력가 손병희(대한민국장,3.1운동,1962)는 명월관의 큰 손님이었고 큰 마담격인 평양출신 수의당(守義堂) 주옥경(朱鈺卿,1894~1982)과 관계가 깊었고 이후 주옥경은 손병희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헌신적인 삶을 살며 동학의 발전에 집중하였다. 주옥경의 역할은 지식과 조직 장악력 등 경영 능력이 있는 이난향이 하게 된다.
3.1혁명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이 원만히 마치고 너무 과격하게 가는 항일투쟁이 아닌 비폭력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탑골공원에 모인 청년들과 떨어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송했다. 바로 앞에 있는 종로경찰서에 명월관 주인 안순환에게 최린(친일, 천도교 장로·중추원 참의·매일신보사 사장)이 전화하게 하여 체포된다. 당시 참석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사전에 가족들과 마지막 이별과 유언을 남기고 29명이 태화관에 모였다.

봉암 나용환 수형 사진
봉암 나용환 민족대표도 ”영영 못 돌아올지 모른다 새옷 입고 집 나선“ 3.1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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