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

1923년 9월 14일·15일 비행사 안창남과 이주만 군

정종배 2025. 9. 14. 06:21

 

1923년 9월 14일·15일 비행사 안창남과 이주만 군

 

 

〇동경 부흥책의 전도 일본이 시련 기회

 

〇안창남 씨 사거 금번 진재 중에 사거하였다고 동경 심천구 주기 일본항공학교 교원으로 있던 일등 비행사 안창남 씨는 금번 진재 중에 사거하였다더라

사거를 전한 안 씨 23세의 단촉한 일생으로

조선의 과학상 위대한 공로자 비행기술은 일인도 감탄하였다

흉보를 접하고 영매 실신 아우의 이름을 부르며 미친 사람같이 몸부림을 치고 있다

《동아일보》, 1923. 9. 14

 

1901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1930년 순국한 안창남은 비행사로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을 겪고 국내로 돌아와 1924, 5년경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평에서 조선청년동맹에 속하여 활동하였으며, 여운형의 권유를 받아 산서성 태원에 가 염석산 산하의 비행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상해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공명단에 가입하고 1929년 비행대의 설립을 위하여 국내에 파견된 공명단 단원 최양옥(독립장, 중국방면), 김정연(독립장, 중국방면) 등에게 600원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30년 4월 산서비행학교에서 비행교육 중 추락하여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어 독립유공자로 운동계열 중국방면 2001년 애국장을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안창남과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들과 관련은 다음과 같다

 

안창남은 서울 상공을 최초로 난 조선인 비행사로

비행 성공 축하 식장에서

‘이화여전 기숙사 미인 이정애’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 온다, 아니다’ 격론 끝에

”내가 누군데“, 호기를 부렸지만

안창남도 여지없이 딱지를 맞았다

동경에서 당시 천도교 기관지 격인 《개벽》의 동경 특파원인 방정환과 대담한 내용이 《개벽》 잡지에 수록되었다

1949년 영화감독 노필의 데뷔작은 영화 <안창남 비행사>이었다

 

〇귀환동포 소개 12일 오전 창경환 25명 신라환 27명, 오후 덕수환 17명

- 동아일보 1923. 9. 14

 

〇동경을 탈하여 9일 만에 귀향 창원 이주만 군

금번 동경 진재 중에서 간신히 일신의 위기를 탈출하여 9일 만에 귀향한 창원 이주만 군은 지난 9일에 백난 중 무사 도착하였는데 마산에서 자제를 동경에 보낸 일반 학부형들은 그 안부를 알지 못하여 심히 민울한 중에 재하든터에 군의 귀향을 들은 만산 일반 인사는 씨를 청하여 당취삼라관에 위로회를 개하고 씨가 목도한 동경의 광경과 사정담이 유한 바 씨의 말에 의하면 참재가 발생하던 익일에 살기가 긴장한 동경을 떠나 창원에 도착하기까지 8,9일간의 그 구사일생의 모든 고초는 듣는 자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케 하였으며 경관의 힘을 의뢰하여 겨우 집에 도착은 하였으나 같이 갔던 제군의 안부는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하더라(마산) - 《동아일보》, 1923. 9. 15

 

대표사진 삭제

AI 활용 설정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