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7일 조선인 폭동의 허설
〇조선인 폭동은 허설
조선신문사 보고 강연의 성황 야기진삼 씨의 실제 시찰 보고
조선신문사 주최의 관동대지진재 보고회는 예정과 같이 재작 15일 오후 7시부터 시내 장곡천정[長谷川町] 공회당에서 열리었는데 이번의 진재는 임의 유사 이래의 첫 기록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견문한 보고들은 강연은 경성에서는 처음임으로 기다리던 부민은 시각을 다투어 모이게 되어 너른 공회당에 만원의 성황을 이루게 되었는데 정각에 이르러 석삼전무[石森專務]의 간단한 개회사를 비롯하여 특파원의 실제로 보고들은 자세한 보고로 만장 청중의 숨을 죽이고 동 11경에 폐회하였는데 그 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진재 각지를 시찰하고 돌아온 야기진삼[野崎眞三] 씨의 보고 중 조선인 폭행 사건에 대하여 일부 주의자들이 폭행을 하였다함은 전연 근거가 없는 풍설이며 모모단체를 조직하였느니 폭탄을 가지고 건물을 파괴하며 인명을 살상하였느니 하는 등 사실도 무근한 일일뿐아니라 당장 독약을 우물에 넣었다는 그 물을 먹어보아도 아무 상관이 없었고 그밖에 여러 방면으로 이러한 사실의 유무를 조사하여보았으나 도무지 그러한 사실을 발견치 못하였다는 의미로 보고하였더라
〇가족의 안부 몰라 밀양군에 대비극
금년 2월경에 밀양군 하남면 수산리에 사는 방봉준(35) 방재영(37) 김택서(36) 김성록(36) 김삼록(34) 등 다섯 사람은 노동을 하고자 동경으로 갔고 그 동리에 사는 김종철(42)의 김석윤(19)은 동경으로 고학을 하러갔는데 이번 재난의 소식을 들은 부모 친족은 밤낮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바 김석윤의 현주소는 동경시 신전구 금정 1정목 1번지 임전유삼랑[林田留三郞]의 집이라더라
〇동경을 탈하여 귀향
동경에 유학하던 진해 니동리 김진석 군을 대동하고 지난 12일 오후 4시에 진염의 동경을 탈하여 진해에 도착하였는대 동경 진재 시 자기는 지진 당일부터 3일간은 그 여관에서 체재하다가 경관의 보호를 얻어 소석천구[小石川區] 경찰서에서 4일간 유숙하고 지난 8일에 동경을 떠나 도중에 하룻밤을 지나고 9일 오전 6시에 일비곡역[日比谷驛]에서 차를 타고 귀향하였다더라
〇보성 학생 안부 동경 재유학 보성학생 중 9월 13일까지의 금번 진재 피난 소식을 접한 자는 다음과 같다 김영학 박계용 김홍채 김병규 (전보) 김용태 (서신)
〇전주 구조파원불능 부형의 초조하고 우려하며
동경 진재 후 전주 재적자로 동경 재유학생의 안부를 알지 못하여 귀성 중인 유학생과 전주청년회 주최로 6백여 원의 의연금을 모집하여 9월 8일 일본 구조원 2명을 파송하기로 하였다가 당국의 금지로 중지하였다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그후에도 당국에 대하여 하루라도 빨리 출발 구급의 길을 교섭 중이던바 송본 내무부장이 월 15일 동경으로 출장한다 함으로 송본과 한 사람만 동행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여 30여 명의 생사를 알지 못해 초조하게된 가족은 물론이요 일반 인사의 우려가 막심하며 차후 될 수 있는대로 파원 구조하기로 하는데 금전 구조비로 의연한 제씨는 다음과 같다 (제씨는 생략)
〇진영 학생 전부 귀환
동경에 유학하는 경남 진영 유학생 김란곤 서병지 강대홍(일제강점기 부산지역에서 활동한 언론인 사회운동가) 김영주 4군은 금번 진재를 서소압[西巢鴨]에서 9월 5일까지 피난하다가 8일에 전부 무사 귀환하였는데 도중 경난은 형언할 수 없었다더라
〇관세면세와 조선 생우의 타격을 입었다. 조선 생우의 일본내 수요는 축년 격증하여 금년도 이른 봄 이내 수출이 왕성하던바 진재 당시 시모노세키에는 이미 300여 두가 있었고 부산에도 상당히 기다리는 중에 있었는데 그러나 1차 진재의 보도가 전해지자 시세는 한 마리당 15원의 폭락을 알린지라 이 수출업자는 대 타격을 입었고 소자본 중에는 재차의 곤란을 예상하는 바이다
〇진재와 선철 수입 하루 약 2만원이 떨어졌다. 동경지방 대진재로 한일 간 여행자가 아연 두절 되어 기차는 거의 빈차로 다니는데 간간이 증차하는 때는 일본으로부터 송환자와 피난민 등 무임승차 등 뿐이오 조선내 각지 단거리 여행조차 점멸하는 경향이다. 하루 예정 수입이 3만 7천원 내외였는데 일시에 격감하여 1만 4천으로 떨어졌다. – 《동아일보》, 1923. 9. 17
- 정종배다큐시집 1923관동대학살-생존자의 증언(창조문예사,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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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사회부장으로 진재 각지를 시찰하고 돌아온 야기진삼[野崎眞三] 씨의 보고는
조선인대학살 제노사이드 당한 이유가 거짓이었다
조선인 폭행 사건에 대하여 일부 주의자들이 폭행을 하였다함은 전연 근거가 없는 풍설이며 모모단체를 조직하였느니 폭탄을 가지고 건물을 파괴하며 인명을 살상하였느니 하는 등 사실도 무근한 일일뿐아니라 당장 독약을 우물에 넣었다는 그 물을 먹어보아도 아무 상관이 없었고 그밖에 여러 방면으로 이러한 사실의 유무를 조사하여보았으나 도무지 그러한 사실을 발견치 못하였다는 의미로 보고하였더라
당시에도 이렇게 유언비어가 거짓이라고 발표하였다.
102년 지난 지금 일본정부 당국은 ‘자료가 없다’ ‘검토 중이다’며 일관되게 발뺌을 하고 있다.
이재명 빛의 정부는 관동대학살 관련 특별법에 대한 의지 표명이 분명하다. 특별법을 제정하고 그 법대로 실행하여,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의 진상 규명과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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