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

1923년 10월 11일 유학생 전학 배분, 1923년 10월 13일 진재 중에 참사한 동포

정종배 2025. 10. 14. 01:07

1923년 10월 11일 유학생 전학 배분

 

 

〇유학생 전학 배분 총계 129인

조선인 유학생 중에는 금번 동경진재로 인하야 조선지방 각 학교로 전학코자 하는 희망자가 많다함은 기보와 같거니와 학무당국에서는 본인의 희망과 출신지 등을 참작하야 조선내 각 관공사립학교의 상당한 학년에 전학케 하야 속히 취학의 도를 열 필요상 각 관립학교장과 도지사에 대하여 학무국장이 각각 통첩을 발표하였다는대로 각 학교에 배당한 학생의 총수 129명 중에 여학생이 2명이며 기 학교별은 좌와 같다하더라

 

중학교. 경성중학 13 부산중학 17 평양중학 13 용산중학 9 대전중학 7 대구중학 8 원산중학 1 광주중학 3 군산중학 1 중학교 계 72

고등보통학교. 경성제1고보 2 평양고보 3 함흥고보 4 전주고보 3 경성제2 1 신의주고보 3 광주고보 4 동래고보 4 사립양정 1 배재고보 3 휘문고보 4 중앙고보 1 고보계 33

실업학교. 상업학교 4 부산제2상교 1 강경공상 1 선린상업 6 경성철도학교 4 실업학교 계 16

경성제2고녀 1 부산고녀 1 이상 총합계 129명

 

유학생의 조선 내 학교 전학과 편입 문제가 대두되었다. 일본 문부성이 피재지 학생의 무조건 편입 방침을 발표했고 학생들의 주요 거주 지역이었던 도쿄의 간다[神田] 등지의 피해가 컸으며 무엇보다 다시 도쿄로 돌아가기 꺼려 하는 유학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총독부 학무국도 각 학교의 수용 인원 제한을 일시 철폐하여 유학생의 전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경성법률전문학교 64명 경성의학전문학교 16명 연희전문학교 14명 경성고등상업학교 10명 보성전문학교 6명,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3명, 수원고등잠업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2명 등 중학교 90명, 고등보통학교 76명 실업학교 33명 여학교 4명 등 총 321명 유학생이 유학을 중단하고 조선의 학교로 전학했다.

- 동아일보 1923. 10. 11

변희용 전 성균관대학 총장 조선일보 1964년 4월 3일

 

1923년 10월 13일 진재 중에 참사한 동포

 

 

동경진재 지방 생존 동포 조선총독부 출장소 조사 제14보

정강현하[靜岡懸下]피난재주가(103명)

〇요코하마 진재와 미삼판로尾蔘販路 조세감면 문제를 상해실업가 옥관빈 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〇이중난을 겪으면서 살아나던 기억(1) 제1대난이 지진인재 동도문화가 일장춘몽 김상철(기) 김상철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1925년에서 1929년까지) 설립자 준비회 구성을 하였다 - 조선일보 1923. 10. 13

 

〇진재 후 에 귀래와 도항

돌와온 자가 19,685인 건너간 자가 2,544인

일본에 진재가 일어난 후 10월 8일까지 조선 동포들의 돌아온 자와 또 일본으로 건너간 수효가 아래와 같다더라

9월 중에 귀래한 자

진재지로부터 학생 675명 노동자 877명 기타 72명

진재지 이외로부터 학생 71명 노동자 12,329명 기타 589명

10월 1일부터 8일까지 귀래한 자

진재지로부터 학생 553명 노동자 1,142명 기타 48명

진재지 이외로부터 학생 10명 노동자 3,248명 기타 165명 합계 19,685명

9월 중에 도항한 자

진재지에 학생 88명 노동자 131명 기타 39명

진재지 이외 학생 131명 노동자 1,862명 기타 159명

10월 1일부터 8일까지 도항한 자

진재지에 학생 13명 기타 2명

진재지 이외에 학생 7명 노동자 79명 기타 33명 합계 2,544명

– 조선일보 1923. 10. 13

 

〇진재 중에 참사한 동포

일본 제빙회사에서 노동하던 8명의 청년은 사망하였다

진재 중 동경부 하정교[下淀橋]에 있는 일본제빙회사에서 노동하는 동포로 일사행위불명에 있다가 사망한 것으로 판명된 사람이 8명이라는데 그 씨명은 다음과 같다더라

원적 황해도 황주군 황주면 안계용, 제주도 조천리 김한주, 제주도 함덕리 김도현, 김덕현, 김원준, 김석봉, 김재익, 한민훈 – 조선일보 1923. 10. 13

 

- 정종배다큐시집 1923관동대학살-생존자의 증언(창조문예사,2023)

최승만 증언 조선일보 1982년 9월 1일

102년 전 오늘에야, 신문에 관동대학살 조선인 피해자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그것도 학살당한 분들이 아니라 재해로 건물이 무너져 내려 죽은 피해자 분들의 이름이다.

신문에 재해와 제노사이들 피해 귀국한 분들이 2만여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학생이 1천 5백여명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참혹한 동경의 현장을 전하여질 수밖에 없고, 알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제에 의해 유언비어라 통제하고 잡아넣어 구류를 살렸어도 알게 모르게 다 퍼졌으리라 믿는다.

 

일제가 10월 20일에야 동경 진재 관련 신문 기사에 대한 통제를 풀었으나, 그 참혹한 학살에 대한 기사는 내지 못하게 막았다.

102년 전 관동대학살 제노사이드 당한 조선인 피재자 약 6,661명 숫자는 1923년 12월 5일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격인 <독립신문>에서 발표한다.

일본 동경 유학생과 목숨 걸고 돕고 후원한 종교 관련 몇 분들과 특파원 등이 일제의 삼엄한 통제 속에 통합하여 현재까지 남한에서는 인정하고 있다.

 

북한은 당시 독일에서 파악한 2만 3천명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에 만난 탈북작가도 인원 숫자는 모르지만, 공부를 하였다고 말하였다.

 

6,661명 피해자, 그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있는 분이 400여명 정도이다. 그 중에 이름 나이 고향 주소까지 드러난 피해자는, 김종수 목사가 지은 <엿장수 구학영> 구학영의 주인공 한 분 뿐이다. 그 당시 동경의 엿장수는 대부분 유학생 중 고학생들이 택한 지금의 알바 한 분야라 볼 수 있다.

 

재일한국인 2세 다큐제작 오충공 감독의 40년 넘는 노력으로 조선인 피해자 후손들의 모임까지 결성하여 찾았지만 10여명에 불과하다.

지난 번 제가 제 다큐시집을 다시 점검하며 약 38명 이름을 찾았다.

 

일본은 기록을 잘하고 보관도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철저한 나라로 알고 있다. 강덕상 교수가 위험을 감수하고 수집한 자료를 보면 단적인 예라 들 수 있다.

한일외교 재수교를 맺으면서 몇 푼의 외자로 퉁쳐버린 한 갑자 전 어처구니없는 군사정부를 통탄할 뿐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나라에서 경제 10대 강국, 군사력 5위, K-문화가 최고 수위까지 이르렀지만, 한일 관계는 늪에 빠져 헤칠수록 잠겨버린 현실이다.

 

102년 신문을 소개하면 할수록 화가 치민다. 당시 목격한 분들의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없다.

당시 현장에 목격자로 잘 알려진 유명인사들도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관동대학살 40여년이 지난 196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조금씩 조금씩 당시 현장에 있었다고 고백하고 회고하였다.

 

국회에서 관동재지진 특별법이 법사위 소위원회를 통과하였다. 언젠가는 법사위와 국회 본회의 통과를 거쳐 한일외교에 본 의제가 될 지 기대는 하지만, 녹녹치 않을듯 싶다.

해방 후 친일로 반민족행위자들을 정확히 파악하여, 처벌은 하지 않더라도 그 명단과 그들의 행위를 기록으로 남겼으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리라.

 

지금은 대표적인 반민족행위자들을 언급하면 사자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설 수 있을 정도다.

특히 반민특위 해체를 명령하였다고 당당하게 고백한 이승만의 지시는 지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반민족 모리배의 행동이다.

 

일본을 정확히 알고 동경에서 102년 전 제노사이드 당한 피해자들에 대한 원혼들을 위한 기도나 합장의 진혼을 한 뒤에, 일본 공항 입국장을 통과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잘못이나 과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