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

1923년 10월 14일·15일 군마현 자경단과 기특한 일본 부인

정종배 2025. 10. 15. 04:32

 

1923년 10월 14일·15일 군마현 자경단과 기특한 일본 부인

 

오충공 감독 제공

 

〇유치 중의 공부를 자경단이 학살

유치 중의 공부를 2백명의 자경단이 학살

이백명의 자경단이 경찰을 습격하야 공부 십오명을 무고 학살

일본 군마현 다야군의 자경단 2백명은 지난 9월 5일 등강경찰서를 습격하고 유치장에 있는 공부 십오명을 학살한 사실이 판명되야 주모자 수명이 검거되었는데 원인은 진재 발생될 때에 전기 경찰서의 태도가 온당치 못한 일을 하였다고 분개하여 습격하는 동시에 아무 이유 없이 전기공부 15명을 살해한 것이라더라(동경전) - 동아일보 1923. 10. 14

 

조선인 대학살을 내용을 완전하게 쓰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한 신문 기사이다.

 

동경진재 지방생존동포 조선총독부출장소조사 제15보(79명) - 조선일보 1923. 10. 14 일본과 지리적 거리가 가까운 경남북 출신이 많이 게재되었다

〇이동섭 함성군 모곡리 노동, 1935년 1월 15일 한신소비조합 아오키출장소 야학부 설립 교사 이동섭(《민중시보》, 1935. 11. 15)

 

1923년 10월 15일 기특한 일본 부인

 

〇기특한 일본 부인 진재 중에 학생을 구하고 지금은 표박하여 경성에까지

동경부 하호총정[下戶塚町] 314번지에 하숙 영업을 하던 북촌[北村] 마쓰(50)라는 여자는 이번 진재 중에 청년단과 재향군인단들이 조선인에게 대하여 엄중한 경계와 준열한 수색을 행하여 자기 집에 있는 모 조선인 학생들은 신상에 위험이 있을까 두려워할 때에 전기 마쓰는 평일과 다름이 없이 친절이 할 뿐 아니라 더욱 힘써 애호하였으므로 그 집에 있는 학생들은 전부 무사하였는데

진재 후 그 집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조선으로 귀국하게 됨에 전기 마쓰는 이로부터 생계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므로 여러 학생들은 그의 친절하던 정을 생각하고 그 집에 있는 학생 8명이 7백 원을 기증하고 그의 딸 쓰네(20)와 같이 두 사람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그 노파와 딸은 지금 경성 본정 762번지에 월세 매월 5원 되는 가옥을 빌어서 있는 중이더라 - 조선일보 1923. 10. 15

 

시사만화 박재동 화백의 할아버지 박울봉은 부두 하역 노동자로 하숙집 주인의 보호로 살아 돌아왔다 손자인 박재동 화백도 일본인 주소만이라도 알면 찾아가 인사를 드리겠다고 고대하고 있다

 

정종배다큐시집 1923관동대학살-생존자의 증언(창조문예사,2023)

 

극작가 유치진 시인 유치환 유치상 3형제는 자취방에서 한 달 동안 숨어 있다 학교에 등교하니 일본인 학생들이 어떻게 살았느냐 물었다고 동랑 유치진 극작가는 회고했다.

안창남 비행사의 기록은 당시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기영 소설가는 벙어리 흉내를 내며 사지를 벗어났다.

나라시노수용소에서 끌려나와 자경단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의 행적을 조금이나마 알고 느낄 수 있는

지바현 야치오시 고진부락 관음사 보화종루와 학살장소인 나기노 하라를 오가며 걷는 경험을 하였다.

 

지난 8월 26일 지바현 야치오시 고진부락의 관음사 보화종루 개수 준공식에 참석하여, 26일 새벽에는 나라시노수용소이던 습지야훈련장 및 사단본부 담장 따라 동쪽 길을, 27일 새벽에는 나라시노수용소이던 습지야훈련장 및 사단본부 담장 따라 서쪽 길을 걸었다. 102년 전 이유 없이 살해당한 분들의 영혼을 위무하며 걸었다. 내 걷기 기억 중 오래 남을 경건한 길이었다.

 

                                    조선인 6명의 학살 장소 나기노 하라 2025.8.27.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이었던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도 자경단에 가입했다 아 이것은 아니다 하고서 활동을 멈췄다고 한다.

 

<보화종루>가 세워진 일본 지바현 야치요시[八千代市] 다카쓰구 <관음사>는

1923년 9월 나라시노수용소에서 끌려 나온 조선인들을

처형하는 임무를 맡은 자경단원들이 임시 본부로 사용했던 곳이다

야치요시 나라시노수용소 부근의 4개 마을(다카쓰구, 가야다상, 가야다하, 오와다신덴) 자경단학살의 일기를 치바현 <조선인학살추도·조사 실행위원회>가 낸 『이유없이 학살당한 사람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1983))에서 처음 세상에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3년 9월 3일 재향군인단과 청년단이 결성되었다.

7일 모두 지쳐 있어 한숨 잤다. 오후 네 시 경 바라크(병영-다카쓰 창사)에서 ‘조선인을 넘겨줄테니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 있었다며 급하게 집합하였다. 희망자가 받아 오기로 하여 밤중에 조선인 15명을 받아 와 각 지구에 배당했다. 다카쓰구는 끌려 나온 3명의 조선인들은 관음사 경내 묶어 밤을 지새 공동으로 지켰다.

8일 9시경에 조선인 2명을 받아 와, 5명을 구덩이를 파고 앉혀 목을 베기로 결정하였다. 절 경내에서 죽이면 훗날 문제가 된다고 하여 관음사에서 5분 거리 떨어진 다카쓰구의 마을 공유지 나기노하라[ナギの原]에서 생죽음 당했다

9일 밤 12시가 지나서 모두 출동 조선인 1명을 받아 왔다는 연락이 왔다. 바로 전에 구덩이를 파놓았기에 데리고 가 제등을 밝히고 칼로 베어 묻어버렸다.

다섯명을 일본도로 학살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이가 기록으로 남겼다. 정말 끔찍하여 밝히질 않겠다.

 

자경단 단원들의 주축인 재향군인단은 동학혁명과 남도의병토벌에 참전하여, 특히 동학군에 대해서 저놈들은 독립군이 될 것이다. 동학군을 무조건 죽였다.

3.1만세운동에 대한 트라우마도 참극을 빚은 빌미였다. 10여년 무단정치로 지배당한 조선민족이 그렇게 전국을 너머 각국에서 끈질지게 이어갈 줄 몰랐다.

조선식민지 최고위 관료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면 진급하여 주요 보직에 근무한다. 관동대학살 당시도 계엄 및 유언비어 대학살 등을 결정할 보직에 조선 식민지에서 갓 본국으로 귀국한 놈들이었다.

 

 

일본 현지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활동 및 지바현에서의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 실행위원회 편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유없이 살해당한 사람들 –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관동대지진 90주년 지바[千葉]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사건’을 걷다

후나바시[船橋] 나라시노[習志野] 야치요[八千代] 현장 답사 자료 10쪽

지바현에서의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 실행위원회 편창

홍세아·다나카 마사타카 옮김

2017년 9월

 

지바현 현장 답사 안내

 

지바현 내의 학살사건 일람

 

                                   일본 군인 앞에 앉아 있는 조선인, 오충공 감독 제공

A. 군대에 의한 학살(지바현 관련)

〇시천지역 남행덕촌 하강호천교제(금정교)에서 조선인 1명을 기병 15연대군조 판본조광 일등조장 장조단십랑에 의해 9월 2일 오후 11시 반 사살하였으나,

〇시천지역 하강호천교북힐(금정교) 조선인 3명을 기병 산기중대 판본군조 기병졸 산기중대 기병졸소천주삼 소림건이 등이 9월 4일 오후 4시 사살하였으나,

〇시천지역 하강호천교북힐(금정교)에서 조선인 5명을 기병 산기중대 판본군조 기병졸 산구가중 고등보치 등이 9월 4일 오후 5시 반 사살하였으나

군대의 조치는 위수 근무령 제12조 1항 3호에 의거해 적절하였다고 보여짐이라 적었다

〇시천지역 남행덕촌 교량동단에서 조선인 3명을 기병 제13연대 제2중대 군조 무전등조 외 5명이 9월 4일 오후 9시 조선인 3명을 사살하였다 군대 처치는 기재가 없다

〇포안지역 포안촌 역장전 관동수산회사 전에서 기병 제15연대 특무조장 내등도삼랑 등이 조선인 4명을 9월 3일 오후 5시 사살하였으나,

〇송호지역 송호지선갈식교상에서 육군공병학교 공병상등병 제택모 등이 조선인 1명을 9월 4일 오전 2시 사살하였으나,

〇습지야지역 대구보촌남단경경철도답정 부근에서 기병 제14연대 기병 대위 관곡경지 외 2명이 방인(일본인) 8명을 9월 5일 오후 10시 사살하였으나

군대 조지는 제 12조 1항 1호에 의거해 적절하였다고 보여짐으로 적었다

 

                                                자경단이 일본도를 목에 들이대며 끌고가는 사진, 오충공감독 제공

 

B. 자경단 및 민중에 의한 학살(정부 조사)

조선인을 학살한 사례

〇9월 4일 오전 10시경 향취군 활천정 정거장에서 율산 십 외 2명이 박복명 외 1명을 소요살인 죄명으로 목검 또는 몽둥이로 구타 살해

〇9월 4일 밤 동갈식군 중산촌 약궁지선에서 영목충삼 외 4명이 씨명불상 13명을 소요살인 죄명으로 이치카와 고도다이 군대로 인도하기 위해 호송하던 중 일본도로 살해

〇5일 정오 경 동갈식군 중산촌 약궁지선에서 김교권삼 외 2명이 조선인 3명을 소요살인 죄명으로 관헌에 인도하기 위해 호송하던 중 일본도로 살해

〇3일 급 4일 동군 아손자정 팔판신사 경내에서 궁곡일 외 5명이 이일필 외 2을 소요살인 죄명으로 곤봉과 뭉동이로 3명을 살해

〇3일 오후 11시 동군 포안정에서 평야음길 외 4명이 최희덕 외 1명을 소요살인 죄명으로 일본도와 창 쇠갈고리 등으로 살해

〇3일 오후 4시경 동군 마교촌 마교정거장 부근에서 길천미차랑 외 8명이 씨명불상 6명을 소요살인 죄명으로 일본도와 쇠몽둥이로 살해

〇4일 오전 11시경 동군 선교정경찰서 부근 용구인삼랑 외 10명이 오택근 외 십수상해치사 죄명으로 일본도로 살해

〇동일 오후 4시경 동정 구일시피병원 앞에서 도엽영 등이 씨명불상 3을 살인 죄명으로 일본도로 살해

〇3일 오후 5시경 동군 마교촌 신작지 내에서 제등희시 외 1명이 씨명불상 남 1을 살인 죄명으로 전봇대에 묶어놓고 쇠갈고리로 구타 살해

〇4일 오전 10시 반경 동군 유산정에서 미야홀길 외 5명이 씨명불상 남 1명을 살인죄일본도로 중상을 입힌 후에 도가와강에 던져 버림

〇동일 4시경 동군 선교정 구일시에서 석정원길 외 13명이 씨명불상 38명을 소요살인 죄명으로 후나바시경찰서로 인도하기 위해 호송하던 중 일본도 등으로 살해

〇4일 천엽시려사상총옥에서 삼지 훈 등이 씨명불상 2을 살인 죄명으로 곤봉 쇠갈고리 등으로 살해

조선인으로 오인하여 일본인을 살해한 사례 10건을 기록하였다(생략함)

『이유없이 살해당한 사람들 –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관동대지진 90주년 지바[千葉]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사건’을 걷다

후나바시[船橋] 나라시노[習志野] 야치요[八千代] 현장 답사 자료 10쪽

지바현에서의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 실행위원회 편창

홍세아·다나카 마사타카 옮김

2017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