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 1923년 10월 18일 군마의 학살범 34명을 검거

정종배 2025. 10. 18. 06:34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

 

 

1923년 10월 18일 군마의 학살범 34명을 검거

 

 

〇음모사건에 얽힌 정화

박열과 그 애인 사랑과 주의의 공명으로 감옥에까지도 같이 갔다

군마의 학살범 34명을 검거하였다 – 동아일보 1923. 10. 18

 

유언의 출처 산구정현 일파의 소위

일본에 진재가 발생한 당시에 전국에 유언이 돌아다닌 결과에 여러 가지 참극이 생기었다 하여 경시청과 신내천[神奈川]경찰서에서는 그 유언 출처를 극력 조사하였는데 방금 횡빈에 수감한 입현 로동당 총리 산구정헌[山口正憲] 일파 14명의 소위로 판명하였다더라 – 조선일보 1923. 10. 18

 

58명을 학살 기옥현에서 자경단이 노동자를

지나간 9월 4일 기옥현 웅곡정[熊谷町]서도 58명 참살 그곳 자경단이 노동자들 일이 발각되어 방금 범인을 염탐 중이라더라 – 조선일보 1923. 10. 18

 

〇이중고를 겪으면서 살아나던 기억(4) =제1대난이 지진화재= =동경문화가 일장춘몽= 김상철(寄) 10. 24(6) 10. 25(7)까지 이어짐

- 조선일보 1923. 10. 18

 

 

- 정종배다큐시집 1923관동대학살-생존자의 증언(창조문예사,2023)

 

 

유언비어의 출처가 최고위층인데 경찰서로 떠넘기고, 자경단에 의해 무고한 조선인들이 집단 살해당하였으나, 신문에는 그 내용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를 단행하며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20여명을 예비검속으로 9월 3일 구속하여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보도하며 '대역사건'으로 조작하였다.

 

박열은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학살을 피해 기타 잇키에게 도움을 받아 피신하였으나 9월 3일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24시간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다음날 '경찰범 처벌령'으로 대체되었다. 결국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에 의한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매 계획이 알려졌다.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것을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보도하였다. 이것을 '대역 사건'이라고 한다.

 

이때 재판 과정에서 보인 모습도 비범한데, 다음과 같이 4가지 요구를 했다.

 

- 피고라고 부르지 말 것

- 공판정에서 조선 예복 착용을 허락할 것

- 재판장과 동일한 높이의 좌석을 마련할 것(거절됨)

- 선언문 낭독을 허락할 것

 

박열뿐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도 "조선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첫 공판 당시 박열은 옛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 관대를,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였다. 이 옷은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인 당시 유학생 학우회 회장인 조헌영 씨가 제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므로,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에게는 1926년 3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확정판결 11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결혼을 하였다.

 

                                                                해방 후 박열 석방 환영회 재일동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