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이야기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정종배 2025. 10. 16. 10:45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광복 80주년 기념

이육사 완창 시낭송 콘서트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2025년 10월 15일 수요일 오후 3시에서 6시까지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다목적홀(서울시 노원구 동일로 1238, 중계동)에서

문화공연 <시예랑>이 주최하고 <용산도서관 시동>에서 후원한

 

항일무장투쟁 시인으로 우뚝한 이육사(원록, 원삼, 활. 자는 태경)의

시 36편 한시 3편 시조 한 수 등 총 40편을

한 자리에서 20여명의 시낭송가들이 펼친

시낭송 콘서트장에 앉아 즐감 홍복을 누렸다.

 

20명 아니 40편의 문청들이 제각각 살아온 삶과 길을 꽃피운

멋과 맛의 향연에 취하여 올가을 단풍길은 흥그럽고 넘치겠다.

 

이육사의 따님인 이옥비 여사가 좋아하는 시 「꽃」을 소개합니다.

 

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나리쟎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라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85세의 외동딸인 옥비(沃非)가 세 살 때 본 용수를 쓴 등을 마지막으로

청량리역에서 북경으로 잡혀가는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노래한 「꽃」의 아버지로

 

주권을 빼앗긴 조국의 독립전쟁 ‘매운 계절’ 굴하지 않는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의 「절정」에서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를 노래한 시인으로

 

나라를 찾기 위한 희망을 외치는 「청포도」에서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알알이 들어와 박혀’ 듬뿍 조국의 여름을 노래하며 ‘청포를 입고 찾아 오는 손님’으로 실천한 선비로

 

항일무장투쟁으로 17번 투옥당하며 시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 「조선혁명선언」의 <의열단> 단원으로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장진홍 의사 사건 연루되어 형 원기 동생 원일 원조 등과 대구경찰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1931년 대구격문사건

1929년 11월에 터진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인 1930년 1월 중순에 동맹휴학이 시도되었고 6월에도 동맹휴학이 단행되었으며, 대구에서도 10월에 대구농림학교, 1931년 1월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육사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0월 20일 입학하여 1933년 4월 23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졸업했다. 관련 인물은 약사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 등이다. 의열단의 군사간부 교육이다.

 

1934년 6월 <서대문 감옥>에 수감 되었다.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음. 일본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으며, 체포 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보고내용은 육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43년 7월, 모친과 형의 소상(小喪)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 후,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 및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이때 청량리역에서 딸 옥비가 3살로 마지막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뚱(東廠胡同, 일제 시기에는 東昌胡同) 1호에서 순국. 이곳에는 당시 일제의 문화특무공작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있었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가 시신 거두어 화장하고,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하여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의열단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인 이육사 약사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음력 4월 4일) ~ 1944년 1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문학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15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어지자 이육사의 가족들은 안동군 녹전면 신평동 듬벌이로 이사했다. 그러다 재차 대구로 이사한 뒤 이육사는 서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서병오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인성 화가도 지도한 대구의 화단의 선구자인 서병오 그림은 현재 덕수궁 광복 80주년 특별전 <향수, 고향을 그리다> 기념전에 전시하고 있어 감상을 권합니다.

 

17세 때인 1921년, 이육사는 영천 출신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한 다음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에서 1년 동안 공부했는데, 바로 이때 원삼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1923년부터 9개월 동안 백학학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육사의 처가 영천이 육사의 시 <청포도> 시작 배경 장소라고 알려졌다.

 

1924년 4월, 이육사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는 도쿄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등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검찰신문조서에는 이와 달리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에 1년간 재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3년 9월 1일부터 10여 일에 걸쳐 일어난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 참상을 알고 귀국하였고 미루어 볼 수 있다.

 

1925년 20대 초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인 원기, 맏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이원록의 필명은 여러 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 '李活'과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 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다.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 - 1944)와 같고 이원록이 '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문단 등단 시기는 1930년 1월 3일 《조선일보》에 ‘이활’이란 본명으로 〈말〉을 발표하였다.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체포·구금되었다.

 

1925년 가을부터 2~3학기 동안 베이징에 있던 공립 중궈 대학(中國大學, 베이징 대학이 아님)에 들어가 문과 수업 등을 청강하기도 하였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20일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 23일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는데, 1932년 6월 상하이에서 들렀던 한 중국 국민당 인사(양싱포(楊杏佛): 중국 국민당 정권 특무에 의해 피살)의 장례식 자리에서 루쉰을 우연히 인사를 나누었다는 본인의 회고가 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이 이육사의 「루쉰추도문(魯迅追悼文)」에 기록되어 있다. 이육사는 루쉰이 1936년 10월 19일 세상을 떠난 후 4일만인 10월 23일부터 10월 27일까지 이육사가 당시 「조선일보」에 「루쉰추도문(魯迅追悼文)」을 연재하며 루쉰을 만난 사실은 언급하며, 루쉰의 생애를 요약하고 루쉰 문학의 전개 과정과 특징을 분석한 후 마지막에 그에 대한 애틋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도문'에서 이육사는 루쉰 문학의 성숙한 깊이에 주목하면서 당시 혼란한 중국 사회 현실에 맞서 명확하고 진실한 묘사로 감동 깊은 문학작품을 창작한 측면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당한 평가로 설명하고 있다. 「루쉰추도문」을 연재한 후 이육사는 루쉰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인 「고향」을 우리말로 처음 번역하여 1936년 《조광》 12월호에 발표했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가 시신 거두어 화장하고,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하여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미아리공동묘지에서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한 유명인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박희도 소설가 서해 최학송 등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김해경)은 실전되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우정의 공원>을 조성하여 나도향, 이상, 차근호 등 이태원, 미아리, 망우리 외 서울시 권역 19개 공동묘지 등에서 실전된 문화예술인들의 가묘라도 써서 원혼을 달래고 그 예술혼을 기리면 좋지 않을까 싶어 길을 찾고 있다. 함께하시어 힘을 실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