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수복작전 민간인 희생 사건

한국전쟁 함평수복작전 민간인학살사건
근현대 민족사의 가장 큰 비극인 6.25 한국전쟁
어느 산 골짜기 어느 강 기슭이나
눈 앞에 펼쳐지는 골목과 담장과 마당과 뒤안으로 이어진
대밭이나 뒷산의 솔 숲에
마을 뒤 밭두룩 동네 앞 들판 논둑 시냇가 보나 방죽 저수지
읍이나 면소재지 가는 고개 등 곳곳에
좌와 우 이념으로 죽이고 죽이는 피어린 이야기가 배어 있다
함평군 함평사건 유족회는 해방공간 좌우 이념 대립과
6.25 한국전쟁 과정에서 죽은 민간인 피해자 후손들이
하나의 유족회를 결성하여 합동 위령제를 지내는 전국 유일 지자체이다
국군·경찰 집단학살 제노사이드 10명 이상 피해자가 발생한 18곳과
인민군의 집단학살 1곳, 5중대 군인 전사비, 비금도 보도연맹수장지 등 21곳에 민간인집단학살희생비를 세웠다.
2019년 건립된 월야면 월야리 달맞이공원 안 '함평사건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간'에서 사단법인 함평사건희생자 유족회 주최로 매년 같은 날인 10월 30일 합동위령제를 치른다.
올해도 오는 10월 30일 오전 11시 '제33회 함평 양민 집단학살 희생자 합동추모식'을 봉행할 예정이다.
함평군 희생자는 약 18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18회 걸쳐 진실이 규명됐다. 현재 1557명 중 1076명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다. 나머지 481명은 추가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1800여 명의 희생자 중 300여 명의 희생자 유족들은 다양한 경우로 유족회에 등록을 하지 않고 있다.
제일 큰 이유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또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가 들은 사건 내용 중 한 마을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28명이 희생되었는데 딱 3명만 등록하였다. 아직도 이념에 대한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또랑시인 2000년 이후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살펴보며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제노사이드와
독립전쟁 기간 중 만주 일대 대종교인들의 항일투쟁 등이
철저히 묻혀버린 한국사를 되살리다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란 고향 주변
인공 때 얘기를 들여다 보았다
75년 전 오늘은 아버지가 그날 죽지 않았기에
셋째 아들 둔필로 여기에 기록을 남긴다
내 고향은 진주정가 집성촌으로
주변 마을에서 두 번이나
밤손님과 국군에 의하여
'저 동네 오늘밤 다 죽었다'고 숨죽여 봤으나
인민군 장정으로 끌러간 세 명 중
두 명은 도망쳐 돌아왔고
한 분의 행방은 지금까지 소식 없어 쉬쉬할 뿐이다
빨치산은 소 두마리만 끌고 갔다
1950년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전남 함평군 함평읍, 학교면, 대동면, 월야면 일대에서
함평수복 작전을 수행하던 제11사단 제20연대 제2대대 5중대와 제3대대 10중대와 11중대에 의해
지역 주민 윤재형 외 51명을 사살한 제노사이드이다
한국전쟁 함평수복작전
육군 11사단 20연대 3대대 10중대 11중대에 의해
1950년 10월 22일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 율동 낙천동마을과 월산리 월봉 송산 신흥동마을
10월 23일
함평읍 수호리 대등 해동마을
이 사건은 제20연대 3대대가 빨치산과의 교전 직후 교전지역 인근마을에서 빨치산 및 협조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다.
10월 23일 대동면 향교마을
10월 24일 대동면 덕산리
10월 28일 나산면 월봉리 안영동
제20연대 3대대가 빨치산과 교전 후 학교 또는 마을 향교에 숙영하면서 숙영지 인근의 주민들 속에서 인민군 협력자로 간주되는 사람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다.
11사단 20연대 2대대
10월 29일 월야면 용정리 복용마을
부대이동 과정에 마주치게 된 지역주민을 뒤쫓아가 아무런 절차 없이 살해한 제노사이드다.
6.25 한국전쟁 양민학살 제노사이드 중 가장 나쁜 사례로 들 수 있는 입에 담지 못할 짓을 범한 5중대는
1950년 12월 6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약 40여일 동안
524명(4대국회 속기록,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 1960.06.08. 함평현지조사) 희생자(나산 46명, 해보 128명, 월야 350)와 가옥 전소 1454동으로 거의 굳어 있다. 실제는 희생자 800여명으로 추정하여 유족회에서 밝혀가며 애쓰고 있다.
함평군 동삼면인 나산면 해보면 월야면 국군 11사단 5중대에 의한 집단학살 제노사이드 참상과
함평군 서삼면인 함평읍 손불면 신광면 경찰에 의한 집단학살 제노사이드 피눈물을 함께 정리 중이다.

긴 글은 댓글로 제주 4.3 여순항쟁이 전범으로 삼을 정도
잘 기록한 자료집과 논문 저서 등을 바탕으로 정리한 기록입니다.
펼쳐봐주시길 바랍니다.
함평수복에 앞서 호남선 선로보수를 하였다는 이유로
1950년 10월 19일 빨치산에게 연행되어
대동면 덕산리에서 희생된
학다리역 선로보수원 이름도 새겨 넣은 위령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전남 함평군 함평읍, 학교면, 대동면, 월야면 일대에서
함평수복 작전을 수행하던 제11사단 제20연대 제2대대 5중대와 제3대대 10중대와 11중대에 의해
지역 주민 윤재형 외 51명을 사살한 제노사이드이다
함평 수복작전 민간인 희생 사건은 크게 보아 다음 3가지 경우로 구분된다.
첫째, 학교면 사거리와 월산리, 함평읍 수호리 사건인데, 이 사건은 제20연대 3대대가 빨치산과의 교전 직후 교전지역 인근마을에서 빨치산 및 협조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50년 10월 22일과 23일, 이틀에 걸쳐 일어났다.
둘째, 대동면과 나산면 사건인데, 이 사건은 제20연대 3대대가 빨치산과 교전 후 학교 또는 마을 향교에 숙영하면서 숙영지 인근의 주민들 속에서 인민군 협력자로 간주되는 사람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0월 23일과 28일에 발생하였다.
셋째, 제20연대 2대대가 월야면 용정리 복용마을에서 부대이동 과정에 마주치게 된 지역주민을 뒤쫓아가 아무런 절차 없이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0월 29일 발생하였다.
1) 학교면 사건(사거리 율동마을과 낙천동, 월산리)
학교면에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발생한 곳은 사거리 율동과 낙천동, 월산리 송산, 신흥동이다.
특히 사거리는 1번 국도에서 함평읍으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으로서 제3대대의 수복작전에 맞서 빨치산의 저항이 있었던 곳이다. 빨치산은 수복작전 이전부터 제3대대의 함평 진주를 저지하기 위하여 무안 사창역(현 무안역)에서 고막원역 사이의 철도를 봉쇄하고 있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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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참고인 김동쉬, 녹취록(2007. 12. 28.) 2쪽.
또한 1950년 10월 22일 교전이 벌어진 뒤에는 빨치산이 함평읍과 인근 학교면, 대동면, 신광면 등에서 주민(청․장년 남성)을 강제로 불러내어 죽창을 들고 사거리 인근 전투지역에 보초를 서게 하였다.34)
제20연대의 사병은 1950년 9월 1일 소집되어 제주도에서 1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육지에 도착하여 부대 편성을 하고 작전지역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부 사병은 단지 1주일간 제식훈련 정도만을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당시의 제3대대 사병은 대부분이 처음 전투를 접한 18, 19세의 초년병27)이었으며, 무기 뿐만 아니라 군수품의 보급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28) 따라서 제3대대의 초기 수복과정에서의 전투는 여러 가지 조건이 미흡한 상태에서 치러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제주지역 거주 3대대 참전사병 중 송규석, 김성순, 양태일, 유화인, 이창우, 채희돈 등이 20세 미만이었고 함평읍 주민 이현석도 당시 국군들이 “열 몇 살 정도로 어려 보였다”고 진술하였다.
제주 출신 3대대 참전사병들은 목포를 거쳐 함평으로 들어와 전투를 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으므로 주민 가운데 빨치산과 빨치산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진술하였다. 게다가 당시 군 지휘관들이 전과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했기 때문에 수복대상 지역주민 모두를 사실상 빨치산 협조자로 간주하며 작전에 임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함평읍 수호리 해동마을에 들어와 주민을 연행한 3대대는 주민이 밤을 갖다 주자 주민들을 돌려보냈다고 진술하였다.
제3대대 출신 참고인 유화인은, 작전 중 적과 주민의 식별기준에 대하여 “우리가 전라도에서 공비토벌을 할 때는 정규 인민군인지 공비인지는 모르겠지만 산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내려와서 습격을 했다”라고 말했다.30) 즉 작전을 폈던 3대대에게는 흰옷을 입은 ‘평범한’ 주민도 언제든 자신들의 생명을 앗아갈 적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함평 수복 직후에도 국군에 대한 빨치산의 공격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참전사병 강성근은 “학교 운동장에 중대가 정렬해 있는데 갑자기 총알이 날아와 중대원 1명이 맞았다”고 진술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을에 출동을 나가 청․장년 남성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아 있는 주민들에게 눈에 띄는 대로 총격을 가한 경우도 있었다.31)
“수색을 나가보면 마을에 사람들이 없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군인이 희생도 당하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올라간 사람들이 편안치 못했어요. 그럴 때는 사람을 쏴버릴 때도 있었던 거죠. 기분이 좋을 때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고.”(참고인 강성근, 녹취록, 2007. 12. 13., 3․8쪽.)
그러나 이들은 주민들에게 대접을 받으면 호의적으로 대하기도 하였다.32)
이건영은, 함평읍 수호리 해동마을에 들어온 3대대가 주민을 모아놓고 부역자 색출을 하던 중 동생이 가져온 밤을 주자 소집하였던 주민을 돌려보냈고, 또 다른 3대대는 주민에게 밥을 해달라고 하여 밥을 차려주자 먹고 나서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마라, 나오면 무조건 죽는다”고 하여 살아남은 경우도 있다고 진술하였다.(참고인 이건영, 진술조서, 2006. 8. 22., 5․7쪽.)
함평 수복작전 당시 국군의 이동경로와 상황
1950년 10월 14일 광주시 광주여자중학교에 주둔한 국군 제11사단 20연대는 사단 작전명령에 의하여 각 행정기관의 수복과 적정수집을 하면서 대대별로 수복작전을 전개하였다.
1950년 10월 20일경부터 11월 초 사이에 수행된 국군 제11사단 20연대의 함평 수복작전 상황은 부대역사일지, 정기작전보고(육군본부, 1950.10.), 미군 문서 등에 기록되어 있다.
부대역사일지 등에 따르면 제20연대 1대대는 10월 14일 담양 방면으로 진출하였고, 2대대는 10월 18일 장성읍을 수복하라는 연대 작전명령 제10호에 의하여 장성읍을 수복하였으며, 3대대는 10월 21일 목포를 출발하여, 22일 함평, 30일에는 2대대와 합류하여 영광을 수복하였다.
제20연대 제2대대
제20연대 2대대도 3대대와 비슷한 시기에 주둔지인 광주여자중학교에서 출발하여 송정리를 경유하여 불갑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펼쳤다.
육군본부의 「정기작전보고」(1970)에는 ‘제1기 견벽청야작전의 결과 제20연대 2대대는 10월 21일에 적 사살 38명, 포로 2명 등의 전과23)와 10월 26일 장성군 북일(CQ 0216)에서 교전 후 적 사살 7명, 생포 1명의 전과를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2대대는 이후 3대대와 합동으로 영광읍을 수복한 후 1951년 2월에서 20일 ‘불갑산 대보름 작전’ 시까지 함평, 장성, 영광지역에서 토벌작전을 계속하였다
제20연대 3대대
제20연대 3대대는 1950년 10월 18일 연대 작전명령 제10호에 의하여 목포지역 출동명령을 받고 10월 20일 오후 3시 선발대가 목포(BP 6152)를 수복한12) 후 10월 21일 지역 치안을 해군에 인계하였다.
미군문서에 의하면 이후 제3대대가 북상하며 22일과 23일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BP 7483)에서 빨치산과 최초로 교전하였다.13)(<별첨 1> 참조)
또 ‘10월 27일 함평읍 인근(BP 7383, 수호리)에 무장 300명 및 비무장 400명의 빨치산이 81mm박격포, 50cal기관총과 소형무기로 3대대를 공격하였지만 3대대는 27명의 적 사살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1
제3대대는 연대 작전명령 제14호에 따라 함평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하여 10월 30일 2대대와 합동으로 고산성(BP 7385) 등에서 빨치산을 영광읍(BP 7306) 방향으로 퇴각시키고 영광읍을 수복하였다.15)
이후 제3대대는 부대를 나누어 이동하였다. 당시 제3대대장 김필상의 진술과 제주 출신 참전사병의 진술, 그리고 현지 목격자 진술 등을 종합하면, 10월 22일 이후 3대대의 이동경로는 다음과 같다.
가) 제3대대 11중대(‘K’ Co)는 학교면 사거리 인근에 300명의 적이 출현하였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동하여 10월 22일 오전 9시 무렵부터 빨치산과 교전하여 빨치산을 무안과 함평읍 북쪽으로 격퇴시켰다.16) 이로써 함평이 1950년 7월 23일 인민군에게 점령된 지 3개월 만인 10월 22일 국군에 의하여 수복되었다.17)
11사단 20연대 3대대 10중대와 11중대는 빨치산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목포에서 무안 방향으로 북상하며 작전을 계속하였다.
10중대 등은 10월 23일 함평읍 수호리 ⇒ 함평중학교 숙영․함평 인근 토벌작전 ⇒ 영광읍 수복 ⇒ 전라북도 고창으로 이동하였다.
11중대 등은 10월 22일 학교면 사거리 ⇒ 학교면 월산리 ⇒ 대동면 수복 후 향교리 명륜당 숙영 ⇒ 나산면 나산국민학교 숙영․영광읍 수복 ⇒ 전라북도 고창으로 이동하였다.
함평경찰은 10월 19일 함평읍에 들어왔다 밤이 되자 철수하였고, 이때 빨치산은 함평읍의 주요시설과 기관에 방화하였다.
제3대대는 10월 23일 오후 1시 또다시 빨치산과 교전을 하였다. 10월 22일과 23일의 교전에 대해서는 수복작전 과정에서 첫 전투였기 때문인지 조사과정에서 만난 당시 3대대 대대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마을 이름 또는 학교면이라는 지명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함평이 완전히 인민군 점령 하에 있다고 듣고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리가 들어가니까 다 달아나버렸단 말이에요. 그래서 거의 총격전 없이 함평을 점령했어요. 적정을 살피니까, 완전히 인민군 점령 하에 있다고 하여 진격했는데 저항이 없단 말이죠. 그래서 그대로 들어간 거죠.”(참고인 김필상, 전화진술조사보고, 2008. 1. 31., 2-3쪽.)
20) 당시 제3대대 12중대 3소대원으로 수복작전에 참전하였던 고수홍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목포에서 손톱, 발톱, 머리를 깎는 등 전투태세를 갖추고, 도보로 이동했는데, 얼마 후 앞에서 소총중대는 전투를 벌였고, 우리는 뒤에서 포로 지원하는 등 서너 시간의 전투 후 함평을 수복하였습니다. 함평에 진주해보니 민간인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택수색과 방송으로 국군이 왔으니 주민에게 안심하고 나오라고 하니 그때 한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참고인 고수홍, 녹취록, 2007. 12. 11., 3쪽.)
제3대대는 전라북도 정읍의 입암산성, 장성 갈재와 담양을 거쳐 화순으로 이동하여 1951년 3월 말 강원도 전선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전남지역 토벌작전을 계속하였다.
1) 학교면 사건(사거리 율동마을과 낙천동, 월산리)
학교면에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발생한 곳은 사거리 율동과 낙천동, 월산리 송산, 신흥동이다.
특히 사거리는 1번 국도에서 함평읍으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으로서 제3대대의 수복작전에 맞서 빨치산의 저항이 있었던 곳이다. 빨치산은 수복작전 이전부터 제3대대의 함평 진주를 저지하기 위하여 무안 사창역(현 무안역)에서 고막원역 사이의 철도를 봉쇄하고 있었다.33)
또한 1950년 10월 22일 교전이 벌어진 뒤에는 빨치산이 함평읍과 인근 학교면, 대동면, 신광면 등에서 주민(청․장년 남성)을 강제로 불러내어 죽창을 들고 사거리 인근 전투지역에 보초를 서게 하였다.34)
제3대대의 함평 수복작전이 시작되자 빨치산은 불갑산 방향으로 깊숙이 퇴각한 반면, 강제로 동원되었던 주민은 빨치산을 따라가지 않고 전투지역 인근 송산마을을 거쳐 대동면, 나산면 방면 등으로 피신하였다.35)
3대대는 이들을 뒤쫓아가면서 사거리 율동마을 낙천동, 월산리 월봉마을 송산마을 등에서 청․장년을 색출해 그들의 집 앞이나 야산에서 총살하였다.
그날 오전 제3대대는 사거리 율동마을 뒤편에서 빨치산과 교전을 벌였다. 오후에는 빨치산을 무안 방향으로 격퇴시켜 한동안 전투가 소강상태에 있다가 오후 3, 4시경부터 다시 총격전이 벌어졌다.37) 이 무렵부터, 제3대대는 마을에 들어와 산 바로 아래의 집부터 시작하여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주민들을 마을 뒤편 야산으로 끌어냈다.
제3대대의 함평 수복작전에 대하여 당시 12중대장이었던 김용림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 사거리 쪽에서 전투를…,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 인민군의 패잔병인가 하여튼 그놈들이 포를 가지고 있다가, 우리가 올라가니 쏘고 도망갔던 기억은 나요.

학교면 사거리 월산리 집단학살 제노사이드
국군 제11사단 20연대 3대대 11중대는
함평 진주 날인 1950년 10월 22일(음력 9월 12일)
함평 장날 오후 2시경
학교면 사거리 상가와
학야리 쪽에서 들판을 가로질러
청정 콧배기 경화동 율동 낙천동 마을마다
태극기를 내걸라는 말을 듣지 않고 꾸물거린
율동마을 집집을 수색하여
함평 무안 목포지역의 빨갱이 대장이라 소문난
경화동 부잣집 아들인 이정대와 관련 없는
8명을 오후 세 시경 율동마을 뒷산인
산 16번지로 끌고 가
집단학살 제노사이드를 저지른다
둘째 아들인 윤재형과 그의 큰형수 최귀례 셋째 누이 윤삼금 등은 율동 뒷산 옆 조밭에서, 사촌인 윤우병은 낙천동에서 제노사이드 당한다. 둘째 누이 윤이금은 2살 아이를 업고 나가 3대대 11중대는 아이를 본 뒤 다시 집으로 돌려보낸다. 큰형수 최귀례는 우는 아이를 그대로 두고 끌려 나와 살해당한다. 윤재형은 총알이 골반을 관통하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얼마 뒤 사망한다.
정양규 정종실 부자는 뒷산에서, 고용살이 추상섭, “살려 달라” 애원한 박동규는 마실을 나갔다. 할아버지 동생 박남규 고용인 전경중 등이 점심을 먹고 있는 집으로 들어오다, 11중대원과 마주쳐 고용인 전경중과 끌려가 총격을 받고서 죽는다. 전경중은 피해자 김영석의 아래 깔려 살아난다.
지방 폭도라고 부르는 밤손님한테 찍혀서
몽둥이로 찜질 당한 옆집 아재 문병 가다
밤손님이 눈에 띄어 담장을 뛰어넘다 붙잡힌
율동마을 정정환 씨 외 3명은
그날 밤 개죽음을 당한다
옆 동네 경화동 출신으로
빨갱이 대장이라고 소문난 이정대가 한 명을 풀어준다
당시 여섯 살 아들은 함평사건유족회 학교면 회장으로
방송국 기자와 대담하며
국군이나 경찰한테 죽은 이는 사람이고
밤손님한테 죽은 이는 사람도 아니냐고
배·보상 문제를 호소한다
유족회 학교면 회장인 정병수 씨와
전화 통화하며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헷갈릴 정도로
잘못된 반공교육 정보가 아직도 그대로 이어진다
율동마을 입구에서 함평읍 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대동저수지 수로 둑 위아래 마을인 낙천동을 수색하던
제3대대 11중대 국군을 보고 놀란 낙천동
김영철의 집에 들어가 그의 동생 김영수 씨가
국군을 인민군으로 오인하여
“동무 수고하십니다”라고 말실수를 저지른다.
곧바로 김영수와 김영철 성제를
김치형과 군인으로 휴가 나온 김대형 성제간을
윤상대와 윤상안 성제간과 윤우병 등
20대에서 40대 초까지 항꾼에 있던 7명을 끌어내
학다리역과 함평읍을 오가는 궤도열차가 다니는 신작로인 23번 국도 아래의 답 1006-7번지 논에서 집단학살
제노사이드를 저지른 시각은 오후 4시경이다
“김영철 김영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니까 (끌려가는 것을) 막았어야 했는데 무서워서 아무도 따라가보지도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는 마음에서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얼마 후 총소리가 나 달려가보니까 (끌려간 사람들이) 이미 죽은 채로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1950년 10월 22일 최초의 민간인 희생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학교면 사거리 율동마을 사건현장과 사거리 낙천동 사건현장을 확인하였고 주민 윤상율로부터 진술을 청취하였다.
『6․25사변 피살자 명부』 에는 장장근(張長近)은 피살 일자가 1950. 10. 23, 김영철(金永喆), 김영수(金永守), 김영석(金永石), 김대형(金大衡), 김치형(金致衡), 정종실(鄭鍾實), 정양규(鄭良奎) 등은 피살일자가 1950. 10. 15.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국군에 의해 피살된 것이나 이 명부에는 모두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내 고향 마산리 표산마을이 외갓집으로
학다리중 동기인 최민규·명규 쌍둥이의 아버지 최병석씨는 운이 좋아
국군이 두 번이나 집으로 들어와 샅샅이 뒤지지 않고 그냥 나가
그 길로 군대에 입대하였으나 키가 작아 받아주지 않자
당차게 소신을 밝혀 연락병으로 전선을 오간다
명당이라 알려지게 자식들 공부도 잘하고 잘 풀렸다
필자의 할아버지의 재종과 그의 아들 부자는 낙천동 최병섭 씨 장인과 큰처남이다. 그 부자는 보화촌 저수지 둑 아래에서 밤손님한테 사살당한다.
2022년 10월 30일 함평학살사건 제30회 추모제 때
추모시를 낭송한 뒤 점심을 먹으며
우리 고향 얘기를 쪽 뀌고 있는 보도연맹 피해자
며느리 한 분이 정확하게 알려준다.
진주정가 표산종문의 <영모당> 납골함에
이름도 사진도 없이 번호만 있는 이유를 깨닫는다
제3대대 11중대는 저녁 무렵
신선재를 넘어서 월산리 송산마을 가려고 지나는
월봉마을 윤두식을 뒤따라와 집에서 사살한다
고개 넘어 송산마을 주민 6명을 살해한 뒤
마을을 포위하고 하룻밤을 숙영한다
송산마을 판사 둘 변호사 경찰서장 등
공부 잘하는 집안의 초등 동기 김항병 총각과
전화 통화로 확인한 내용은
나이 먹어 피난 가지 않은 할아버지는
신광초 학다리중앙초 학다리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여
집 안에 들어온 군인 중에 제자가
‘아이고 선생님’ 한마디에 살아났고
학다리중학교 서무실에 근무하던 아랫집 대부는
집 앞에 끌려 나와 죽는다
친구도 지금까지 인민군한테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10월 23일 제3대대 11중대는 대동면 향교리를 수복하고
마을을 수색하여 김재덕과 김정수 모친과 이종익 계모 등 여인 세 명은 공무원 가족이기 때문에 살아난다
정순희 외 1명을 당시 남교마을 숲쟁이길에서 사살하고
함평 향교 명륜당 안에서 하룻밤을 숙영한 후
나산면 나산초등학교에서 숙영한 뒤
함평·영광 모악산·불갑산 밀재 너머 영광읍을 수복 후
전북 고창으로 이동하여 제노사이드를 범한다

함평읍 수호리 대등마을과 해동마을 제노사이드
제3대대 10중대는 10월 23일
함평읍 수호리 2구 대등과 해동마을을 수색하며
목포 쪽에서 들어온 국군을 주민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마을로 뛰어 들어가는 마을 아줌마를 첩자로 오인하여
대등마을 이병범 이재봉은 부자간으로 이병범의 형제로 부상당한 이의범을 위해 국군이 3일 후 약을 가져와 치료하였으나 그 후유증으로 한 생애를 골골 앓다 1993년 죽는다
사촌 형이 마을 뒷산에서 국군에게 살해당한 이홍범, 며느리 서희순이 진술한 시아버지 이종악, 아들인 이만행이 언어장애로 며느리 김이례가 진술한 목포 쪽에서 들어온 국군을 환영하였는데 살해당한 시아버지 이종욱 등과
해동마을 집에서 국군에게 끌려 나온 조기재와 박양길은 부부, 수리조합 감시원 조효영, 아들이 국군에게 밥을 주러 간 사이에 죽은 조기영, 국군이 손짓하며 나오라 하여 나갔던 조상현, 조기후 조백석, 아들인 장성규는 죽은 듯이 있으니 국군이 “모두 죽었다”라며 지나가 대를 이은 장장근, 딸인 이숙자는 총소리가 난 후 누가 나를 업고 논에 업드려 있었다고 기억하는 이인행, 엄다면 화양리에 살던 구장현 등 외 1명을 학살한다
1950년 10월 23일 사건이 발생한 함평읍 수호리 2구 대등마을 대딴봉과 해동마을 사건현장을 확인하고 목격자 이기영과 이건영으로부터 사건 당시 정황에 대한 진술을 청취하였다.
내 고향이 진외가로 해동마을 학다리중학교 동기인 조영관 노동자 시인과 그의 동생이며 민변 회장을 역임한 조영선 변호사의 삼촌인 조상현도 목숨을 잃는다
이 마을 박유상 친구 집에서 참상을 목격한 고향 아재 정원강 초대 민선 함평군수는 아버지와 큰형님을 한곳에서 지방 폭도 밤손님에게 생을 마감 당한다
군수로 취임하여 ‘남산뫼대학살’에서 형님을 잃은 현 유족회 회장인 정근욱 사무관에게 함평학살 전담 일을 맡겨 현재에 이른다
10월 24일에는 대동면 덕산리에서
국군이 “타이어를 어디에 두느냐” 물어 모른다고 하자 김재운을 사살한다

제3대대는 토벌 작전을 계속하면서
10월 28일 나산면 월봉리 안영동의 주민 곽원길 외 4명을 2Km를 끌고 가 천주봉에서 학살한다
9월 28일 끌려갔다 총상을 입은 마을 주민 정창근은 총상 치료 중 12월 27일 경찰에 연행되어 구산리 모퉁이에서 살해당한다
제2대대는 광주에서 송정리를 경유하여
불갑산 밀재 방향으로 토벌 작전을 진행한다
10월 29일 밭에서 일하다가 마을 앞을 몰려가던 국군을 보고 놀라 달아나던 월야면 용정리 주민 장장식은 총소리에 놀라 장규조 집 앞까지 뛰다가, 무서워 도망가던 김소님 등은 제노사이드 당한다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은 희생자의 경우에도 2007년 9월 6일부터 2007년 12월 24일 사이에 8명의 유족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현황은 아래와 같다.
미신청인 진술조사 현황
아들이 태어난 날인 10월 22일 살해당한 오길동
소에게 여물을 주려 나가다 집 앞에서 총격을 받아 죽은 채감용
국군이 “왜 여기 있느냐”라고 물어 “동무 집에 놀러 왔다”라고 대답하여 사살당한 정순희, 그의 동생 정정희는 현장에서 살아남는다
이웃 여인의 지목으로 국군에 연행된 후 남교마을 숲쟁이길에서 살해당한 조삼례
국군을 환영하러 나간 자리에서 말을 더듬어 남교마을 숲쟁이길에서 살해당한 이정수
정오에 집에서 나가 오후 두 세시 경 국군에게 살해당한 작은댁 김순임
마을 이장으로 마을 사랑방에 있다 국군에게 끌려가 대딴봉에서 살해당한 이홍범
신청인 측 참고인 24명에 대하여 2006년 8월 22일부터 2007년 12월 28일까지 조사를 진행하였다
신청인 측 참고인 조사 현황
이기행(79) 총소리를 듣는 순간 잿더미에 숨은 덕분에 살았음. 국군이 사건 발생 3일 후 마을에 와서 사과하였음.
이건영(77) 국군이 숙부, 남동생과 나를 끌고 가 부역 여부를 물었고, 밤을 주었더니 살려줌.
김정순(82) 집에 있다 딸을 업고 나왔는데 국군이 “엎어져”라고 하면서 총을 쏘았음.
김동쉬(81) 빨치산과 대치하던 국군은 송산마을에서 하룻밤 잤음.
박계근(84) 조병수 아들은 보도연맹원으로 죽었음. 국군은 명륜당에 며칠간 주둔했음.
이현석(71) 국군이 주민을 함평중학교로 데려갔음. 국군은 누런 군복과 철모를 썼으며 어려 보였음.
최병영(70) 주민 18명이 희생되어 15명이 신청하였고 3명은 신청하지 않았음
이장원(70) 국군이 명륜당에서 “인민군을 토벌할 테니 안심하라”며 불갑산 쪽으로 갔음.
김영휴(60) 1950. 12. 27. 경찰이 아버지 김복수와 정창근을 연행하여 죽였다고 들었음.
신정식(76) 수호리 사건은 엄다면에 있던 인민군이 수호리 방면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임.
전형기(85) 천자봉에서 국군이 사격하는 것을 보았고 같은 마을 나규환은 총 쏘는 걸 보다가 죽었음.
나병한(76) 국군이 함평중에 주둔한 후 성남리에 와 부역자 색출을 하였지만 주민들을 죽이지는 않았음.
정헌표(71) 국군이 나산국교에 진주 후 전 여맹위원장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았음.
김만종(69) 대를 베어 나산면소재지에 울타리를 만들었음.
군․경찰 측 참고인 조사
2008년 1월 31일과 2월 1일과 12일 가해부대로 지목된 제20연대 3대대 대대장과 12중
대장의 전화면담조사를 하였다. 그 현황은 <표 5>와 같다.
김필상(88) 3대대장 목포에서 입성식을 하고 나서 연대장이 즉각 함평으로 진격하라고 하였음. 함평에서 전투는 없었으며 주민들이 환영하였음.
김용림(82) 12중대장 인민군 패잔병이 포를 쏘았음. 진격 당시 적은 산에 올라간 상태였으므로 민가를 수색한 기억은 없음. 함평에서 어린이가 울 때 5중대가 온다고 하면 그쳤다는 소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었음.
2007년 12월 11일부터 13일까지 제주지역 거주 참전사병 11명의 자택을 방문하여 진술을 청취하였으며, 함평지역 참전경찰 등 참고인 4명의 진술을 청취하였다.
<표 6> 사건 당시 참전사병 및 참전경찰 조사 현황
송규석(75) 제20연대 9중대 제주에서 3일 동안 훈련받고, 삼랑진에서 9중대에 배치받았음. 20연대에는 대정읍, 9연대에는 한림읍과 애월읍, 13연대에는 성산읍 출신이 많았음.
이창우(75) 제20연대 9중대 제대 후 11중대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들었음. 함평 수복작전은 2시간 동안 하였으며 포 지원까지 받았음. 주민에게 포탄을 메고 다니게 했음.
강성근(81) 제20연대 10중대 1개월 동안 비무장으로 훈련받았음. 권돈 중위가 창설 당시부터 중대장이었음. 함평중학교 운동장에서 10중대원이 빨치산의 총에 맞았음.
김인권(79) 제20연대 10중대 함평에서 작전한 기억은 있고 도보 이동 중 부패한 시신을 보기도 하였음.
유화인(76) 제20연대 11중대 삼랑진에서부터 함평 수복작전을 할 때까지 중대장은 권준옥이었음. 흰옷 입은 사람이 밤에 습격하였음.
채희돈(77) 제20연대 11중대 학다리는 처음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기억이 남. 중대장은 권준옥이었고, 그 사람이 우리를 지휘하였음.
고수홍(80) 제20연대12중대 우리는 뒤에서 포로 소총중대를 지원하였음. 민가를 수색한 후 방송으로 “국군이 왔으니 안심하고 나오라”고 하니, 주민들이 한두 명씩 모였음.
양태일(77) 제20연대 12중대 수색 중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 즉시 진압하였음. 주민들에게 적을 도우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주민들을 죽이기도 하였음.
허경일(87) 제20연대 12중대 함평에 특이한 기와집이 있어 주민에게 어떤 곳이냐고 물으니 향교라고 하였음. 그곳에서 포공격을 하였음. 민간인은 의심되면 사살 후 중․대대에 보고하였음.
양창규(76) 제20연대 6중대 삼랑진에서 6중대에 편성되었는데 중대장은 이용배였음. 장성 수복 1주일 후 함평 해보를 거쳐 영광으로 갔음. 고창과 불갑산 전투에도 참여하였음.
김성순(76) 제20연대 제7중대 중대장이 소대장이나 분대장에게 “작전 나가면 하루에 최소 2, 3개의 무기를 탈취해와라, 적을 사살하면 귀를 잘라 오라”라고 지시하여 한 쪽 귀만 잘라 오는 사람이 있었음.
임봉섭(77) 함평경찰서 빨치산이 산으로 갔다는 정보를 듣고 함평으로 들어갔음. 인민군이 강하여 함평 수호리 쪽까지 들어갔다가 후퇴함. 그때 수호리에서 서○○라는 경찰이 인민군에게 죽었음.
정금용(83) 함평경찰서 함평읍 방향인 수산봉에서 깃발이 올라 안심하고 함평에 진주하였음. 실탄이 부족하여 미군에게 실탄을 받고 함평에 들어갔음.
나진수(83) 함평경찰서 군경은 따로 작전을 하였고 경찰은 한청과 합동작전을 함. 국군이 경찰보다 먼저 함평에 들어가 수호리를 거쳐 대동면으로 갔음. 수호리 희생자 중에는 좌익활동을 한 사람은 없었음.
최정례(74) 함평경찰서 경찰은 1950년 10월 19일에 함평에 들어갔음. 경찰이 후퇴한 후 빨치산이 함평경찰서 등에 불을 질렀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통해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수는 52명이고
부상자는 2명으로 총 54명이다
희생자 대다수는 함평수복 작전 중인
수색작전 중에 있는 동네와
부대이동 경로에 있는 마을의 주민들로
이들이 빨치산에게 협력한 것으로 간주한
2대대와 3대대에 의해 적법 절차 없이 살해당한다
국군과 빨치산의 교전 직후
빨치산 및 빨치산 협력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추적경로에 있는 마을의 주민이 살해를 당한다
또 일부 지역주민들은 국군을 인민군으로 오인한 실수 때문에 살해를 당한다
토벌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동 중인 국군을 보고 놀라 도망가다 살해를 당한다
제주대학 김준표 교수와 짧은 만남 깊고 오랜 이야기
어제는 제주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김준표 교수를 만났다. 점심시간 포함 네 시간 정도였다.
김교수 가족사가 민족의 아픔으로 절절했다.
김교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처남 즉 외할머니의 오빠 등 두 분은 6.25 전쟁 때, 20대 후반의 나이로 억지 생을 마감한다.
제주 4.3항쟁과 관련 있는 이념의 갈등이 빚은 시대의 비극이라 말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깊다.
김교수는 외가 어른 두 분이 희생당한 곳이 함평군 대동면 강운리라 듣고 자랐다.
강운리는 내 고향 앞 냇가인 학교천의 발원지로 백호리를 지나서 십리를 걸으면 오르는 고산봉과 그 산자락 남동쪽이다.
또한, 북한으로 형 대신 의용군에 나갔다, 북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오영재와 그의 형 오승재 소설가가 자란 곳이다. 오영재 시인의 글에서 남쪽을 생각하면 어릴 적 뛰놀던 강운리와 고산봉의 산천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을 밝혔다.
오영재는 아버지가 교장으로 근무하던 월송국민학교를 다녔다.
학교 옆 집성촌인 동암 마을 낙안 오씨 집안이다.
동암 마을 출신 중에 백병원 제약 관련 사장을 역임한 분이 계셨는데 안타깝게 작년에 작고했다고 오효진 시인께서 말씀해주셨다.
38년생으로 지금도 돋보기 없이 원고를 쓰는 이명재 평론가 겸 소설가의 고향이 함평이라는 제주대 국문과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서 일요일 오후 2시쯤 연락을 하였다.
이명재 평론가를 만나기 위해 월요일 서울로 제주도에서 올라오겠다는 전화를 주고받는 현장에 있던 나와 전화 통화를 한 김교수가 어제 오전 10시 20분에 집사람 작업실을 찾아왔다.
김교수와 전화를 받은 후 이명재 평론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일요일 오후 3시 중계근린공원에서 출발하는 독립전쟁 영웅 흉상 철거 백지화를 위한 서울시민 걷기 대회 약속 시간보다 1시간 30분 늦게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에서부터 대열에 함께 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정문 앞 시민대회를 치렀다.
행사가 끝난 후 소설 범도의 작가 방현석 교수 일행인
민족문제연구소 김희원 운영위원부위원장 및 경기동북지부장과
문창과 후배인 더봄출판사 김덕문 대표 사회연대 본부장인 고석배 중대 법대 출신 이영진 국회의원 김한전 보좌관인 이영진 동문 등과
저녁 7시까지 막걸리 한 통 1000원인 집을 소개한 장훈고 제자인 강남욱 서울여대 교직원이 함께 했다.
방현석 일행은 서성란 작가와 제11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장편소설로 수상한 임재희 작가와 시간을 함께 보낸 후
퇴직 후 거의 없는 늦은 밤 10시 30분에 집에 도착하였다.
집에서 유족회 카페에서 김교수 외갓집 관련된 자료를 뒤졌으나 실패했다.
함평사건 희생자 유족회가 30여 년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모아 정리한 자료집 11집까지 출간했다.
작년 10월 30일 제30회 추모식에서 추모시를 낭독한 인연으로 기증받아 보관 중인 자료집을 보기 위해서였다.
집사람 작업실인 화실에서 2시간 동안 내가 듣고 얻은 내용을 얘기했다.
김교수는 제주 태생이다. 외할머니 고향은 함평군 대동면으로 알고 있다. 외할머니 성함은 정순례이다. 외할아버지 성함은 장재형이다. 외할머니 아버지 즉 김교수의 외증조의 성함은 정팔용이다. 본은 진주였다. 김교수는 어릴 적 외할머니 고향이 진주라고 생각하였다.
내 집에 있는 진주 정가 충장공파 족보를 가져와 김교수와 함께
정팔용 정순례 정성훈 이름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김교수가 제주 4.3 희생자 명단에 있는 함평출신 정찬근 이름도 족보에서 찾지 못했다.
김교수는 외갓집 자료를 찾기 위해 작년 함평을 처음 찾았다. 함평읍 주포 한옥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퇴직 후 살아가도 될 곳으로 함평은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함평군 발행 군사 대동면 편에 정성호(인제대학 사무국장) 이름을 확인하였다. 정성호는 외할머니의 조카, 즉 외할아버지와 함게 경찰에 의해 생을 마감한 외할머니 오빠의 조카이다. 정성호 이분만 찾으면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
인적 연결망을 통해서 확인하였으나 거의 접근을 하였으나 그 분은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 후손들과의 연결은 숙제로 남았다.
김교수의 어머니는 1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막내 이모님은 살아 계신다. 막내 이모가 태어나자 예쁜 둘째 딸 얼굴을 보고 싶어 함평 처가에 들렀다가 외할아버지 처남 즉 외할머니 오빠를 아는 경찰에 의해 두 분이 총살을 당했다. 동네 사람들의 신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근욱 유족회 회장과 통화를 하였으나 개별 사건이라 신고하지 않으면 명단을 파악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오는 10월 30일 오전 11시 함평군 월야면 달맞이공원 추모의 공간에서 치르는 제31회 함평사건희생자추모식에 함께 참석하기로 약속했다.
비행기 탑승 시각에 맞춰 3시까지 김포공항에 도착하기 위해서 구파발역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졌다.
70여 년 전 이야기를 되새기는 이야기로 소설 같은 24시간이었다.
김교수는 소설을 써서 외할머니 집안을 이야기하겠다 다짐한다.
이명재 평론가는 치과 진료 10시 예약을 깜박 잊고
약속을 잡아 함께 이야기를 못 나눈 미안함으로 점심을 냈다.
혹 앞에 말한 내용이나 사람을 아시는 분은 댓글로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2023.9.26. 함평군 관련 단체 및 개인 카톡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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