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초대 주필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1947.12.2.) 78주기

장덕수 박은혜 부부 유택
장덕수는 동아일보 초대 주필 및 부사장으로 신한청년당 한국민주당 외교부장과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쳤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간사와 국민의용대 지도위원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장덕수는 본관은 결성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인, 교육자, 학자, 언론인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귀국 후 체포되어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남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했다. 그 뒤 임정 외무부차장 여운형(대한민국장,임시정부,2005)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이승만(대한민국장,임시정부,1949)의 독립운동을 보좌하였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으로 궁지에 몰린 이승만을 적극 도와주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합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 사회계몽운동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절했고, 일제강점기 전시체제 시기에 친일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했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며 발기인 성명서 작성을 기초하였다. 이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를 역임하였다. 신탁통치 찬성과 미소공위 참가 문제를 놓고 김구(대한민국장,임시정부,1962), 이승만 등과 갈등하다가 제2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단정 지지 노선으로 선회했다. 장덕수는 이승만의 돈암정을 마련하고 거주하는 데 힘을 썼다. 이승만과 백범은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인하여 정치적 결별을 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 되었다.
장덕수는 1894년 12월 10일 황해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에서 태어났다. 농부인 아버지는 장붕도이고 어머니는 김현묘의 셋째 아들이다. 1900년 서당에서 1년간 한문 교육을 받았고,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연의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아버지까지 9대 독자였는데, 4형제가 태어났다.
형 장덕준(독립장,문화운동,1963)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재령 보강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일찍이 신문물에 눈을 떠 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1920년 동아일보의 특파원으로 만주의 간도, 훈춘 등에 파견되어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일본식민통치하에서 최초로 순직한 한국 언론인이 되었다. 동생 장덕진(독립장,만주방면,63)은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의 행동대원이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인 카지노를 털다가 사살되었다. 형제들이 외국어 능통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유년기 때 진남포 이사청 급사로 취직했다. 진남포의 한 학교에서 장덕진 등과 하숙,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독학으로 판임관시험에 합격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이때 평생친구인 송진우(독립장,문화운동,1963), 김성수(친일,교육학술)와 사귀게 되었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졸업하고 1917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에 도착, 독립운동을 하다 여운형, 서병호(애국장,임시정부,1990), 신채호(대통령장,계몽운동,1962) 신성모(애족장,계몽운동,1960) 등과 교류하며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한 신한청년당 조직에 간여하였다.
1919년 여운형은 상하이로 귀환하기 전 장덕수와 헤어지면서 보다 나은 환경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다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이별은 여운형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운형의 '동경회담'에 통역으로 선정되어 거주제한에서 풀려났다.
1920년 4월 《동아일보》의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이 되어 활동했다. 동아일보 창간사를 썼다. 그 창간사를 고등학교 인문반 심화학습에서 공부하고 배웠다.
또한,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해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에 관여하고 의사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 장도빈, 오상근 등과 함께 청년단체의 통일을 위해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조직했으며 1921년 1월에는 김한(독립장,중국방면,2005), 홍증식, 김사국(애족장,국내항일,2002), 이영, 오상근(애족장,계몽운동,1990), 김명식 등과 함께 서울청년회를 조직했다. 한편 1920년 가을 최팔용(독립장,일본방면,1962), 이봉수, 주종건(건국포장,국내항일,2007), 김철수(애국장,일본방면,1990) 등과 함께 사회혁명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1921년 6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재무위원 및 국내부 간부로 참여했다.
그러나 1922년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레닌 정부로부터 받은 자금 문제로 일어난 '사기공산당' 사건으로 서울청년회계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사회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망우리공원에 부인과 함께 묻혔다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한, 조선청년연합회와 서울청년회의 간부 김사국은 그를 축출하려 음모를 꾸민다.
김성숙(독립장,임시정부,1982))에 의하면 '김사국은 1921년 가을부터 이른바 사기 공산당 사건이 일어나자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의 지도자 장덕수를 맹공격하여 1922년 4월에 장덕수를 내모는 데 성공한다.‘ 장덕수를 비난한 김사국은 곧 사망했지만 장덕수에 대한 공금 착복 의혹과 비난은 계속되었다. 그가 죽은 지 37년 뒤에야 결백이 증명되었다.
이 사건에 관해 뒷날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김철수는 장덕수의 결백을 증언했다. 김철수가 1980년 5월 16일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그 돈은 장덕수가 아니라 최팔용에게 전달됐다. 이 사건으로 장덕수는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리하여 1923년 4월에 도미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도쿄를 경유한 장덕수는 치요다 구 간다에서 박열(대통령장,일본방면,1989)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장덕수 구타사건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단체와 선을 긋게 된다. 그러나 후일 대한혁명단에서는 그의 이러한 경력을 들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704명에 포함 수록되었다.
해방공간 좌우익 이념 대립 속에서 1945년 12월 30일 최초로 암살당한 고하 송진우 선생에 이어 두 번째로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된 설산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새벽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종로경찰서 소속 현직 경찰관 박광옥, 한독당 당원인 교사 배희범 등의 총에 맞고 절명했다. 장덕수는 한민당의 정치부장으로 당의 이념을 정립하는 것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 관련자로 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받은 모욕감 때문에, 이승만을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르던 백범 김구는 이승만과 결정적으로 결별하였다. 암살현장에 망우리공원 이영준 박사도 함께하여 입방아에 올랐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장덕수 박은혜 부부는 유명인사 인물에 선정되어 새로운 인물가벽에 간략하게 소개될 예정이다.
묘역은 아차산 산성을 살펴볼 수 있는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묘비는 장덕수는 유광렬(친일,언론) 박은혜는 김활란(친일,교육학술) 박사가 지었다. 글씨는 원곡 김기승의 글씨를 새겼다.
석물 중에 한국전쟁 망우리 전투 총탄으로 깨지고 떨어진 흔적이 남아있다. 선비상 중 대장동 50억 클럽인 곽모 의원의 얼굴과 닮았다. 안영정 시인의 눈 밝은 유머 한 꼭지였다.
장덕수 자녀들은 미국에 이민을 가 살고 있다. 큰 따님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이제는 막내 남동생이 나이를 먹어 일 년에 한 번 귀국하여 부모님 묘소를 관리하는데 못하겠다는 것이다. 중랑구청 담당자에게 알려 방법을 찾고 있다. 구청에서 관리가 어렵다면 파묘하여 산골로 뿌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어떤 묘지도 구청에서 관리하고 있지 않다. 후손들은 전적으로 사설관리인에게 적게는 2만 5천원 많게는 3백만원을 일년 관리비로 맡기고 있다.
김사국이 장덕수를 모함하여 밀어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중 서로 간 라이벌이나 갈등을 빚은 인물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세창(대통령장,3.1운동,1962)과 김규진, 최학송과 계용묵, 신명균(애국장,국내항일,2017)과 박승빈, 이량과 함세덕(친일,연극), 김이석과 이중섭, 이기붕과 조봉암, 이기붕과 김윤근, 이기붕과 김석영, 김활란과 김말봉, 김활란과 임숙재(친일,교육학술), 이병홍과 박희도(친일,언론), 이정재와 임화수, 곽영주와 박동훈 진영숙 전한승, 박마리아(친일,교육학술)와 조봉암의 딸과 김윤근의 부인 등이다.
'망우리공원(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3.1혁명 선천군 선천읍 만세 시위 주도한 김봉성김봉성(金鳳性, 1901~194512.18.) 80주기 (3) | 2025.12.19 |
|---|---|
| 5.16 군사쿠데타 군부세력에 의해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민족일보》 사장조용수(趙鏞壽, 1930~1961.12.21.) 64주기 (1) | 2025.12.18 |
| 국외 항일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국군창설 주역소아(素我) 김진성(金振聲, 1892~1968) 57주기 (1) | 2025.11.20 |
| “이 겨레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사회운동가 이경숙(李景淑) (0) | 2025.11.18 |
| 순국선열의 날 (1) | 2025.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