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인문학)

5.16 군사쿠데타 군부세력에 의해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민족일보》 사장조용수(趙鏞壽, 1930~1961.12.21.) 64주기

정종배 2025. 12. 18. 02:52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열전

 

5.16 군사쿠데타 군부세력에 의해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趙鏞壽, 1930~1961.12.21.) 64주기

 

 

남과 북 분단의 조국에 옳고 바른 언론을 펼치겠다던 한 사내의 결기가 꺾인 분노의 죽음이 한 갑자 돌고 네 해를 더한 한파에 움츠린 가슴에 뜨겁게 닿았다. 한 젊은 언론인의 꿈이 짓밟힌 억울한 길은 이제야 꽃봉오릴 터트리고 꽃향기가 번진다.

통일의 길을 가고자 한 사내의 탕탕한 길을 반공으로 끊어버린 스네이크 박정희(1917~1979) 대통령은 반신반인 반열에 오르고, 그 딸 박근혜(1952~ )는 아버지의 후광과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 정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권좌를 누리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 국정농단 탄핵받아, 가슴에 503 수인번호 박고서, 밥 먹는 시간이 엄격한 국립호텔 큰집에서 밥을 먹다, 요즘에도 윤석열(1960~ ) 친위 내란으로 탄핵받은 뒤에도 더욱더 많이 아파, 태극기를 흔드는 귀한 분들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다. 지금은 대구 근처 사저에서 종종 밖을 나와 세상과 소통하며 안타까운 공주님으로 살아간다.

 

한 사내의 눈을 감지 못한 주검은 망우리 공동묘지 밤하늘 별빛과 함께했다. 한겨울 깜깜하게 언 땅을 파면서 흘리던 피눈물이 참숯이 되었다. 언젠가는 다시 불이 불길 기다리는 ‘가슴에 피’는 아직도 가족들의 한이 되어 눈에 선한 빛으로 타오른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이념 대립과 남과 북 분단과 한국전쟁과 독재정권의 아픔을 올곧게 거둬내 통일의 기틀을 다지려 대한해협을 넘나들던 청춘의 길을 이제는 기리고 실천해야 한다.

이 땅에 자신의 출세와 소속의 카르텔을 견고히 하려는 이들이 날뛰지 못하게 하는 길은 소중한 투표를 행사하는 길밖에 없지 싶다. 다시는 국립4.19민주묘지·마석민주열사 묘지에 묻히는 이들이 끝나도록 하여야 한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에 회부 되어 1961년 12월 21일 사형을 당한 이들은 경무대경찰서장 경무관 곽영주,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1919~1961), 영화로 유명했지만 정치깡패였던 본명이 권중각이었던 임화수 그리고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등이다. 이 중에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던 이는 곽영주(1924~1961), 임화수(1919~1961), 최백근(1914~1961), 조용수 등이다. 2018년 마석민주역사 묘역으로 이장한 미복권 최백근 선생을 마지막으로 망우리공원에서 연고지로 이장했다.

 

경기도 하남시에 살다 형님의 남한산성의 묘지를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재이장을 하거나 이장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만 죽어도 좋다던 조용준 씨는 지난 11월 4일 지병으로 운명했다. 이제 그의 소망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생겼다.

 

조용준 씨는 1961년 12월 22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그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형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시신을 인계받았다. “아침에 형에게 면회 갔더니 부모님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더라. 이틀에 한 번꼴로 면회를 다녔는데 그 말이 형의 마지막 유언이 될 줄 몰랐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용준씨는 12월 21일 오후 4시 라디오로 형의 사형집행 소식을 들었다. 당시 형의 나이 31세였다. 《민족일보》 창간을 문제 삼아 사형까지 시킨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에 대한 분노가 컸다. 이튿날 시신을 수습한 용준 씨는 아버지와 상의해 조용수 형님을 깜깜한 밤 9시 반 넘어, 언 땅을 피눈물로 파 망우리공동묘지에 묻었다.

 

1963년 남한산성 동문 밖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검복리 야산 자락 중턱으로 이장했다. 2021년 12월 18일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60주기 추도식 행사를 묘역에서 치렀다. 코로나19 팬데믹 최고 대 유행으로 민족일보기념사업회의 관계자 몇 분만 참석했다.

 

이제는 그 동생인 용준 씨도 1934년생 요양원에 누웠다. 아들인 성재 씨와 통화하며 아버지가 휠체어를 탈 수 있는 지금이라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재이장한 형님의 유택을 보고 죽은 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조용수 사장과 용준씨는 네 살 터울이었다. 동생 용준 씨에게 형은 까다롭고 엄격한 스승에 가까웠다.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가 창간되고 형이 사장을 맡자, 용준 씨는 기획실장으로 들어갔다. 폐간될 때까지 매일 3만 5천 부를 발행했다. 그 당시 제일 잘 팔리던 신문이 《동아일보》였는데 가판에선 《민족일보》가 그보다 앞서 1위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창간 전후 용준 씨는 주로 형의 자금 마련 심부름을 했다. “아버지는 살고 있던 부산 집을 팔아 창간자금을 댔다. 진주에서 병원을 하고 있던 형의 고향 친구도 제법 큰 돈을 보탰다.”

하지만 창간 3개월 만에 터진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장에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워 5월 18일 구속했다.

 

언론과 언론인들에게 군부 세력에 반대하는 경우는 이렇게 당한다고 본보기로 걸린 게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장과 간부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조달한 창간자금을 문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조용수 사장이 조총련계 자금 1만환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했다고 밝혔다. “형의 장인어른이 일본에서 파친코를 하던 민단 간부였다. 거기서 들어온 돈을 박정희와 김종필 등 군부 세력은 조총련 자금이라고 날조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공소장에 쓴, 형에게 돈을 댄 북한 간첩이라고 지목한 이영근(1919~1990)은 나중에 노태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까지 받았다. 그에게 "교포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취 시켰다."는 이유로 무궁화 훈장을 추서 받았다. 이 때문에 몇몇 역사가들은 조용수의 사형이 광복 이후 남로당 전력이 있었던 박정희가 자신의 용공 전력을 물타기 하기 위해 저지른 헌법 살인극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기막힌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조용수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독립유공자 송지영(애국장,중국방면,1990)은 1969년 출소했다. 출소 후 송지영(1916~1989)은 문예진흥원장과 KBS 이사장, 광복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송지영은 시인 박인환과 어울리며 1956년 노래 <세월이 가면>이 태어난 ‘경상도집’에 함께 했고, 망우역사문화공원 시인 박인환 묘역 단비의 시와 글을 그가 새겼다. 1923년 관동대학살 관련 제노사이드 당한 한국인 기림시설 26개 중 유일하게 한국인의 기술과 인력·자재·후원 등에 의해 건립된 1985년 일본 지바현 관음사 <보화종루> 현판의 글씨를 써 새겼다

 

조용수는 1

930년 경남 진주 대곡면의 부유하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진주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2·3·4대 자유당 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조경규(1904~1983)씨가 삼촌이고, 미군정 시기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하만복(1911~1965)씨가 외삼촌이다.

 

조용수는 진주에 있던 외삼촌 집에서 자라면서 광복 후 진주중학에 진학해 주로 우익 학생모임 ‘민연’에 가담해 활동했다.” 좌익학생들과 마찰을 빚어 대구 대륜고로 전학 졸업했다. 이만섭(1932~2015) 국회의장이 동기동창으로 연세대학 정경학부에 진학한 조용수는 한국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내려가 외삼촌 하만복 의원 비서로 근무했다.

 

1951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정경학부 2학년으로 편입했다. 조용수는 재일 한국인 모임인 거류민단 기관지 《민주신문》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언론과 첫 인연을 맺는다.

 

일본에서 그의 활동은 대부분 보수적이었다. 재일동포 북송 사업이 한창이던 1956년 조용수는 앞장서서 ‘북송 반대 운동’을 조직했다. 1958년 이승만(1875~1965,대한민국장,임시정부,1949) 정권이 진보당 대표 조봉암(1899~1959)을 간첩혐의로 구속한 사건을 계기로 조용수의 활동에 변곡점이 생긴다. 진보당 사건이 터지자 조봉암의 비서였던 이영근씨가 일본으로 도피했다. 1959년에는 ‘조봉암씨 구명청원서명운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이 사법살인 사형당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진다. 조용수는 귀국길에 올랐다.

 

결국, 조용수는 자신이 진보 신문 창간에 전념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자금 마련을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모금에 성공한 조용수는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사시로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 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등을 내걸었다. 특히 《민족일보》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역설했다.

 

박정희 군부는 군사쿠데타 이후 바로 혁신계 체포에 돌입했다. 5월 18일 《민족일보》 간부 10여 명을 전격 체포했다. 《민족일보》는 5월 19일 지령 92호를 마지막으로 강제 폐간됐다. 당시 선고공판 배석 판사가 대쪽판사라 알려졌고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이었다.

 

군사정권은 국내외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1961년 12월 21일에 사회당 간부 최백근 등과 함께 사형을 집행했다. 조용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입회한 윤형중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날 사형당한 분 중 가장 나중 집행했고 목숨을 쉬이 놓지 못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그로부터 한 달 뒤 1962년 1월 국제저널리스트협회는 조용수에게 ‘국제기자상’을 추서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007년 ‘송건호언론상’심사위원회는 ‘조용수 민족일보사 사장’을 ‘제6회 송건호언론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청암 송건호 초대 한겨레신문 사장은 필자의 고교 선배로 모교 교지 《한성》에 학창 시절 헌책방 순례하며 책읽기를 통해 성장했다는 글을 실었다. 그 글을 읽고 길을 좇는 또랑시인 청암 선생의 뜻이 조금이라도 흘러가길 바라며 기를 쓰고 있다. 2019년 3월 관동대진재 다큐제작 오충공 감독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며 청암묘역 앞에 깊이 머리 숙여 한참을 머물렀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에 대한 사형집행이 위법이라고 판단하고 재심을 권고했고, 2008년 1월 16일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2020년 10월 15일 (사)민족일보기념사업회는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작년 제1회 수상에 이어, 고승우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상임대표를 제2회, 2022년 11월 26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개최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을 제3회 민족일보 조용수 언론상 수상자로 선정해 수상했다.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김삼웅 수상자는 ‘조용수’ 이름을 부를 때 눈물을 삼켜 식장은 더욱 엄숙하였다. 2023년 민족일보 조용수언론상 수상자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선정됐다.

 

2024년 12월 21일 남한산성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유택에서 거행된 63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원희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올해 주요한 활동으로 제6회 민족일보조용수언론상을 정동익 사월혁명회 전 의장에게 수여하고 오늘 추모식을 주최한 것을 꼽고 참배객들에게 사의를 표했다.

 

오는 2025년 12월 21일 오전 11시에 거행될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64주기 추모식에 초대를 받았다. 그동안 병을 앓고 있던 동생이 아니라 조카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몇몇 분들과 함께 참석하기로 약속했다. 그 자리에서 조용수 민족일보 유택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재이장할 수 있는 길을 찾고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기를 다짐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