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시

함부로

정종배 2018. 8. 7. 22:43

 

함부로/정종배

 

진관사 아미타불 아래의

바위 틈새

제비꽃 일곱 형제가 살고 있다

 

올 여름 최악의 폭염에 이파리가 데처져

오가는 길 불편해

 

페트병에 감로수를 가득 채워 물을 줬다

다음 날 파랗게 살아나 잘했구나

어깨가 으쓱했다

 

며칠째 물을 주니 즐거웠다

 

저녁 산책 바위에 삼배하고

제비꽃을 헤아렸다

여섯개다

다시 세어 봐도 그렇다

한 녀석이 뿌리를 드러내 말라 비틀어졌다

 

태조 이성계 피비린 내 나는 말발굽소리

집현전 학사들의 훈민정음 창제 사가독서 가갸거겨

김신조 일당의 다급한 군화 발자국 소리와

선남선녀의 발자국 먼지를 퍼담은

바위 틈 억겁의 흙과 이끼에

제 힘만큼 이슬이나 빗방울을 받아 먹고 자랐는데

 

또랑시인 겁없는 물주기에

터전 잃고 목숨까지 버렸다

 

지금까지 함께한 아이들의

끼와 힘이 익기 전에

내 얕은 눈과 거친 입으로

뽑아내고 거덜내지 않았는지

 

달빛 아래 쏘쩍새 울음소리

구슬프다 가슴을 후벼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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