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배 시

노숙자

정종배 2018. 12. 17. 19:57

 

노숙자/정종배

 

 

없는 자가 버티기 가장 어려운 겨울 아침 출근길

1호선 소요산행 전동차

멋진 신사 한 분이 맨 앞 칸 전 좌석을 차지하여

전철역마다 들어오는 손님들 왠 떡이냐

빈 자리 앉으려다 급하게 일어나

코끝을 문지르고 자리를 옮긴다

스포츠용 썬그라스 푸른 빛이 두리번 거리고

챙 짧은 모자 반쯤 돌려 쓰고

반백의 턱수염 구렛나루 콧수염

누구도 따라 기를 수 없는

폼나는 기운을 내뿜으며

목 긴 방한 신발까지

한 눈에 확 띄게 여유롭다

오로지 냄새를 잡지 못해

들통나는 노숙자

밤새 언 몸을 이른아침 전동차를 집어타고 녹이는데

무늬가 예쁜 장우산까지

잘 나갈 때 모습의 치장을 그 누가 해주었을까

씻지 않은 몸과 옷에 밴 찌든 내

확 벗겨 몸 씻기고 옷을 세탁한 뒤

손 잡고 발맞춰 걸으면

쑥부쟁이 꽃향기 풀풀나는

정말 멋진 애인이 되고도 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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